내 크레파스는초록색이 제일 먼저 닳아 내가나무와 풀산과 들을그릴 때마다 지구별은초록 생명체들로가득 채워지지 내가지구별을 초록별로 되살리는 거야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맞아요. “내가” 존재함으로 “초록별”도 더욱 초록이지요. 위기의 “초록 생명체들”을 이처럼 분명하게 짚어주는 작품도 흔치 않습니다. 지구별이 애원하는 구급 신호를 아이의 눈높이로 감상합니다. 날이 갈수록 온난화가 진행되는 지금, 미래세대를 위하여라도 초록의 “크레파스”를 더 많이 닳도록 해야겠습니다. 김용우 동시집 『초록별에 놀러 온 고양이』(2024,고래책방
모든 움직이는 것들이 우두커니 멈춰 서있는얼마 남지 않은 시간의 모롱이에서낙수 소리를 듣는다 살구나무 밑동이 몰라보게 자란 내가 살았던 옛집처마 밑에 간간이 떨어지는 빗방울은공허한 마당을 옴폭하게 파놓는다 둥지를 떠난 제비장마철에 요란한 맹꽁이환한 달밤 다듬이질밥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저물녘 재잘거리는 참새 있던 것들이 사라져 없어진 자리에먼 산 풍경을 가까이 불러 앉혀 놓고적막 공간 틈서리로 한 방울씩 스며드는낙수 소리를 듣는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내가 살았던 옛집”에 홀로 앉아 낙숫물 소리를 듣노라니 처절히 익혀진
날개로 난다 물론이다날개로 먹이를 잡아낸다날개는 손이다날개는 발이다태어나는 새끼도 날개로 싸안는다거꾸로 매달려 살아도 좋다날개만으로 충분하다무엇을 더 달라 애원하리까날개 하나로 모두 해내는 박쥐검은 동굴에서 날개 하나로 날아나온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온몸의 9할 이상을 차지하는 나의 “날개”는 곧 목숨입니다. 우리가 그리 살아왔듯 상상의 날개는 지금까지 살아내 온 ‘나의 힘’입니다. 노시인이 시인으로서 예까지 오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시의 날개’를 갖고 지탱한 상상력 때문입니다. 날개는 사랑의 궁극적인 수단이자 내
산도 녹이 슬고들도 녹이 슬고 녹물이 흐르는 강녹물이 넘실대는 바다너도나도 삭아내리는녹슨 세상에빛나거라 24k오로지 순금 가락지!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내 안의 용광로에서 ‘분노’를 삭이는 연금술사가 바로 “시”가 아닐까 싶습니다. 평생 찾아 헤매던 대의는 이내 절망하거나 “녹”이 납니다. 하지만, 그러나 “순금 가락지”처럼 빛날 시만이 지구별에 영원히 남겠지요. ‘여기까지인가보다’라고 한숨을 쉴 때마다 나를 구원해주던 시가 늘 가까이에 있었으니, “녹슨 세상”에서 별똥별처럼 사라지는 그날까지 ‘시의 끈’을 놓지 말아야겠습
어느 동네서 왔을까, 저 할마시아침을 등에 지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싸전 옆 나물 함지 빽빽한 곳에엉거주춤 엉덩이를 디밀고 앉는다대광주리 속 뭉쳐진 다섯 개 털복숭이낯선 햇빛에 놀라 얼굴을 파묻는다허리춤 뒤적이는 할머니에게 불을 켜드리며이걸 팔아 어디 쓰시려구요 여쭈어도애잔한 것들 앞에 두고또다시 기다리는 일만 남은 할머니는쪼그라진 입으로 호물호물 담배만 빠신다종재기의 깻잎장아찌는 몇 장 남았을라나후― 내뱉는 담배연기에또 다른 강아지가 눈에 아슴하여즈 에미 떠난 뒤 마른 젖을 물리던 가슴이중천 햇빛에 스물스물 바스라진다젖먹이를 팽개
풀꽃에 하얀 나비가 앉는다낱자가 떡잎을 밀어 올린다요람의 아기가 웃는다도화지는 크레파스를 부른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언제나 마음은 “봄”입니다. 내 청춘의 봄은 세월이 무색하도록 노을이 지고요. 한겨울 견딘 달래 냉이 씀바귀 개나리 진달래 철이 지난 어느 봄날, 나는 파스텔톤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어집니다. 새로운 걸 찾으려는 내 마음은 늘 “도화지”입니다. 그러니 “공부”는 공부할 때마다 사는 재미를 던져 주지요. 올봄엔 “떡잎”에 “낱자”를 쓰고 있는 “나비”에게 기어코 말을 걸어 “아기”가 짓는 웃음꽃을 피워 봐야겠습
내 안에 섬 하나 있다.그곳엔 바람도 소통할 수 없는 고독감만이 깊숙이 닻을 내리고 정박 중이다. 고개 파묻힌 시커먼 고독은 바다 끝 간 데 없이 다릿돌을 놓는다. 기척을 두고두고 기다리지만 물때만 바쁘다.교실 문짝 흔들리도록 언제 구구단 외운 적이라도 있었는가.돛은 언제 펄럭이려나.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가만히 조아려보면 “섬” 아닌 사람 없습니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백석의 ‘흰 바람벽’이 아니더라도 사는 동안 우린, 늘 고독하였습니다. 정현종 시인의 ‘사람과 사람 사이가 섬’도 따지고 보면 혼자 살 수 없기 때문
돌계단 올라 골목 작은 공터에매여 있는 당나귀 한 마리뭔가를 열심히 뜯어 먹고 있다종이상자다저 상자 속에 흐르는 강물 소리를 알아낸저 동물의 커다란 귀등에 곡식 가득 싣고서 이집트를 떠나허기진 고향 땅 가는 요셉 형제들의 나귀가귀를 쫑긋 열고 고향의 물소리에 귀 기울이는 모습 보인다세상의 귀들이 자유를 누리고 있을 때저 작은 체구의 동물은귓불 크게 열고끝에서 끝으로두수없는 세상 험한 일 찾아 걸으며물 흐르는 소리를 당기고 있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삶의 근원인 “물 흐르는 소리를” 찾아 오늘을 맞습니다. 인간과 함께하는 만
죽은 사람의 얼굴 위로 흰 천을 덮는 것은 죽음을 가리려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게 삶의 누추를 들키지 않으려는 것이다 사랑이 끝난 지표 위에 눈이 쌓여 덮인다 사랑 이후의 남루를 들키지 않으려는 듯 누군가의 이름을 한사코 지우려는 결기 같은 것들 끝내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차라리 묻어버리려는 마음 같은 것들이 무수한 점묘의 붓끝이 되어 지상을 덮는다 방치된 차들의 검은 지붕과 지붕이 내려앉은 슬픔의 가옥들 도시의 흉곽을 길게 찢어놓은 검은 도로 위로 거대한 데드마스크가 떠오른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살아오는 동안 “사랑 이후
왜 사람들은 순위를 따질까 따뜻하게 정을 나누는 가족 모임실컷 대접받은 후에 물이 최고다또는 역시 김치가 제일 낫다왜 굳이 최고를 따질까‘도’자만 써주면 모두가 행복할 것을김치도 맛있고 물도 맛있네잡채도 맛있더니 집안 분위기도 최고네엄마도 좋고 딸도 좋네신랑도 멋진데 각시도 최고네이 얼마나 좋은 ‘도’자인가도레미송에서도 그래서 음계의 ‘도’가 모임의 리더인가?도레미파솔라시도 시작과 끝으로 다시 돌아가는 화합의 ‘도’.윷놀이 ‘도’, 도개걸윷모, 도로 ‘도’의 유쾌함생각할수록 즐거운 ‘도’자의 매력분위기를 띄우는 “니도 좋고 내도 좋
강릉을 떠나 대관령을 넘는 버스 속두 할머니의 대화에 빠지다 “깅자 어무이요, 오른펜짜글 보우야저 고라뎅이 소낭구 사이루 잎파구울긋불긋 몽길몽길 한기 도루멕이 알 같잖소?“ “어머야, 우떠 저닷하나 잎파구 단풍든기똑 도루멕이 알 씨러농기 같네야.“ 시인의 눈보다 더 아름다운 걸 보고시인의 상상력보다 더 깊은 그분들의 대화에 스며들었다 “요점엔 바우에 도루멕이 알 귀경두 모하장가아덜 어릴짼 시장통 질바닥서 주먹뎅이 마한도루멕이 알 찐거르 사 먹으메 꼬십다 했장가.“ “그 적엔 갈쿠렝이 들고 물에 들어가맨바우에 도루멕이 알이 씨글씨글
눈을 감아야 보이는 새를 만지는 밤숲에서 새 한 마리 날아간다날이 밝으면 날아가 버리는 어둠처럼 모자가 새장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새가 날아들고모자에서 새를 꺼내는 일은 단순하지 않아발목이 하얗게 떨릴 때까지 바라보아야 한다 손목을 긁히면서도 새에게 잡혀있던 손으로 슬픔을 빻는다 멀고 먼 서랍 속의 작은 모자엄마, 모자를 벗으면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나요?죽은 척 엎드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돌돌 마는 오후새들은 매번 다른 목소리로 외출했다 돌아오고누군가 나를 흔들고 지나갈 때마다 모자를 산다 모자를 사지 않는 날은 나를 꽁꽁 묶어
눈이 편지를 쓴다지금 이 순간 하염없이 내리는저 점선의 행간을 따라가면붉게 밑줄 친 그대가 있을까내 속에서 사슬로 이어지는 생각이그 사이를 꽃잎처럼 흩날린다꽃핀 날만이 사랑이랴매운바람으로 뒤엉키고 풀어지는뒤안도 있다꽃 진 마음이 덮인다세상의 경계를 하얗게 지우면서하지만 내가 덮는 그대는자꾸만눈밭에 붉은 찔레 열매로 솟아거기내 발자국 찍히겠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폭설이라도 내린다면 내 그림자를 품고 있는 지상은 순진무구한 책으로 변합니다. 책갈피마다 쌓인 눈발이 글자(기호)로 들어앉아 “생각”의 밥을 먹고 잠을 잡니다. 노
바람 없이도 흔들리는 꽃이 있다.한쪽 꽃잎을 떼어 버리고 만든비대칭으로 스스로 흔들고 있다. 불균형 비행으로 비대칭을 찾는 나비가꽃잎 버린 자리에 앉는다. 나비 날개로 꽃잎을 채운 꽃과꽃에 다리를 접붙인 나비가한순간에 들어 하나로 고요하다. 한순간이라는 생물은식물과 동물이 나뉘기 전의 감정.왜, 식물은 동물의 이동을 찾으며왜, 동물은 식물을 감정을 빌리는가. 기어이 내 눈동자를 찾아내 머무는 꽃과이성을 찾아 떠도는 내 체온의 향방을 묻지 않는다. 내가 오늘에 도착했는지 궁금할 뿐이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2023년 7월에
산자락에 검은 승용차가 잠들어 있었다늦가을 낙엽이 앞 유리를 덮어갔다 열흘이 지나서야 차가 안 보였다차가 사라진 자리에 간간이 도토리가 떨어졌다차 주인이 산속에서 목을 맸다는 말을 느티나무 잎 푸릇할 무렵에 들었다 어쩌지 못하게 괴로웠을 건데 고향 같은 산에서 떠나 다행이라는 마을 노인 음성이차를 세우고,차를 잠그고,간,사람의 갈피를 다독여주었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절망스럽지요. 민주주의도 인간애도 혼돈에 빠졌어요. 사회를 지배하는 사람들이 내면은 돈이고 외피만 사람인 존재로 특화되었어요.
바람이 사이렌처럼 울어댔다 나는 낮과 밤이 왕래하는 창가에 앉아 바람의 세기와 유리창의 흔들림을 바라보며 담장 아래 고여 있는 사계절 꽃물로 낯익은 소년의 머리 색깔이나 바꿔 놓고 있었다 사이렌은 요란했다 바람이 되고 남은 오후는 사이렌이 되는 게 분명했다 하나로 모은 귀는 사이렌의 것이었다 그런 후에 천천히 먼지가 되어가는 사람들,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마른 꽃으로 묶은 날은 골목길을 걸어가도 서러웠다 소년은 낡은 천 조각에 싸여 있던 한번 본 남자보다 더 오래 남자가 되어야 할 것이고 사이렌은 슬픔만큼만 창문을 열고 소년 곁에
이곳에 있는 바퀴들은 이미 속도를 잃었다나는 이곳에서 비로소 자유롭다나를 속박하던 이름도 광택도이곳에는 없다졸리워도 눈감을 수 없었던 내 눈꺼풀지금 내 눈꺼풀은꿈꾸기 위해 있다나는 비로소 지상의 화려한 불을 끄고내 옆의 해바라기는꿈 같은 지하의 불을 길어 올린다비로소 자유로운 내 오장육부내 육체 위에 풀들이 자란다내 육체가 키우는 풀들은내가 꿈꾸는 공기의 질량만큼 무성하다풀들은 말이 없다말 없음의 풀들 위에서풀벌레들이 운다풀벌레들은 울면서내가 떠나온 도시의 소음과 무작정의 질주를하나씩 지운다이제 내 속의 공기는 자유롭다그 공기 속의
툭!내 발끝에 떨어진 단감 하나마른풀로 도르르 굴러가기에불붙을까 얼른 집어 들었다이글거리는 불덩이 같아두 손으로 감싸 드니 등잔불처럼가슴 밝히며 일어나는 어린 날엄마의 야윈 뺨에 볼 부비며뽁뽁 소리로 퍼붓던 입맞춤할 때들큼하게 맡아지던 홍시 내음창백하게 야위시던 그 손길이아파차마 먹을 수 없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어렸을 적 할머니께 “홍시”를 따 드리려고 감나무에 올랐을 때, 가지가 “툭!” 부러져 다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필자의 고향에도 감나무가 많아 가을이면 노란 전구를 켜 놓은 것처럼 온 마을이 환했지요. 초등학교
늙은 학인이 poesie이미지가 불씨처럼 살아나기를 기다리며 화요일 오후창가의 바람 소리를 듣고 있었지 늙은 학인이 서재에서 잠깐 잔 꿈속에서 커피포트끓는 물을 차버리는 장면그 감촉이 코드를 꽂은 전기다리미처럼 생생해서 화상을 입는 장면 늙은 학인이 깜짝 놀라 깨어나니 화요일 오후창가의 바람 소리가 흘러가고 있는 현장이었지 커피포트한잔의 커피는 마음의 상처에 굴복하지 않는 힘을 주는 화상연고라는 생각늙은 학인의 karma가 화탕지옥튀김 치킨이 되는 순간이 온다면 꿈을 빨리 깨면 되겠다는 생각 꿈이니까 [박정원의 시에서 시
을씨년스런 이 가을쓸쓸히 서 있는 나무를 본다굵직한 몇 가닥 가지만 매달고바람을 의지해 군입을 풀풀 털어버리는나무의 요량料量동한冬寒을 살아남기 위한실한 슬기다아니 푸르렀던 욕망을 버리는비움이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미리 유서(遺書)를 남긴다면 무어라 쓰게 될까요. “몇 가닥 가지만 매”단 ‘부질없음’이 “나목”을 올려다보게 만듭니다. 벌거벗고 태어나 벌고 벗고 가야만 되는 게 생(生)이란 걸 부정할 목숨, 세상에 단 하나도 없습니다. ‘거기서 거기’라는 이치를 또 다른 별이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푸르른 지구별에 빚을 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