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에 찬바람 맞고 있는바나나 한 개를 꺾어와 껍질을 벗겼다후둑후둑 빗방울 떨어지는 모양으로카레가 끓는다바나나를 보면 지나치지 않는 상상에 멎는다한입을 먹으면 작아져 버리는 것과한입을 먹을수록 커져버리는 것휘어진 것과 안 휘어진 것은먹어보기 전엔 진품을 구분하기 어렵다칼을 댄다 부디 당신의 것이 아니길 바라면서…한때 분별없이 가졌다가 불거진 자국카레 바다 속으로 바나나 꽃잎을 던진다냄비 깊숙한 사이에서 무르는 소리 아련하다칼을 들고 야채를 다듬는 순간부터반듯한 네모를 썰기 위해 경건해진다서둘러서 되지 않던 일이 씁쓸하게 스쳐간다남
'유대인 살인 공장' 아우슈비츠(Auschwitz) 수용소.하루 8천여명의 유대인이 기차에 실려 들어 왔다고 한다. 노동력이 부실한 여성과 노인, 장애인과 어린이들은 도착 두 시간 만에 80%가 처참하게 학살되었고 나머지 20%는 노동력으로 활용후 학살되었다고 한다.2013년, 나는 그런 역사의 현장인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동유럽 여행차 들릴 기회가 있었다. 수용소를 입장하기 전(前), 정문 아치형 녹슨 철제 틀에는 "Arbeit macht Frei (일만이 자유를 보장한다)"라고 표현된 표어가 걸려 있었다. 인상적이었다. 그
알을 깨고 나온 누에의 몸털처럼 보드랍게갓 우화한 어린 날개의 깃털처럼 가볍게 대숲을 빠져나온 바람처럼 자유롭게한바탕 울음을 쏟은 구름처럼 홀가분하게 별들의 소리가 선명해지는자정의 몽유자처럼꿈꾸며 노닐자 육신의 틀을 벗은 혼령처럼입자의 틀을 벗은 파동처럼시공의 틀을 벗은 양자처럼 달을 품은 백학의 날개처럼춤추며 노닐자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만사가 부질없습니다. 장자의 ”소요유“도 그걸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떤 목적이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니므로 ‘인생이란 여행’ 자체를 즐기라는 것입니다. 바쁘게 살지 말
골퍼(golfer)가 홀인원 할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될까?네이버 쌤에게 물어봤다. 홀인원 확률은 어떻게 되냐고? 보통 파3 홀에서 프로 골퍼들은 1/3000, 싱글 골퍼들은 1/5000, 보통 골퍼들의 확률은 1/12000 정도라고 대답한다.우선 확률만 봐도 쉽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골프 1라운드 즉, 18홀을 라운딩하면서 홀인원이 가능한 파 3홀은 인 코스 2홀, 아웃 코스 2홀, 그래서 총 4개홀을 맞이하게 된다. 따라서 위 확률을 적용하면 프로 골퍼의 경우 750회를 라운딩해야 홀인원을 기대 해볼 수 있다. 싱글 골
바다 한복판에 오르간이 환하게 떠 있다누구의 익사체일까 새들이 건반에 내려앉을 때마다밀물과 썰물이 반음 차로 울리고 파도가 모래해변으로 나와하얀 혓바닥으로사람 발자국을 지우는 시간 게들이 하늘을 본다북극성 조등(弔燈)에 환하게 불이 켜지고원을 그리며 도는 별들 음표들 시간들 누가 주검을 연주하는 걸까건반 사이에서 새들이 날아올라캄캄한 허공으로 흰 쌀알처럼 흩어지고 있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풍금을 옮겨 가며 수업받던 시절이 엊그제 같습니다. “오르간”은 가장 오래된 악기 중의 하나입니다. ‘사라져간다는 것’은 윤슬처럼 아름
잠실 야구장에서 일행을 태운 리무진은 서기어린 아침 햇살을 듬쁙 머금은채 고속도로로 진입하였다. 도로변, 칠월의 농염한 녹음은 부끄러운 듯 수줍은 듯, 짙은 녹색의 맨살 누드를 보여주지 않았다. 하얗게 골짜기마다 드리워진 안 개, 그 하얀 면사포를 두르고 다소곳이 졸린 듯 앉아있었다. 면사포 안의 녹색 살결이 더욱 궁금했다. 자연은 아직 잠에 취한듯한 아침이었다.리무진이 고속도로 궤도에 정상적으로 올라서니 준비된 김밥, 과일, 물 한병이 대령되어 출출한 배를 달래주었다. 맥주는 No, 아침식사 대용이라 하였다. 아니 이건 또 뭐,
방울을 울리던 당나귀는 병이 들고바람은 나무 잎새를 흔들지 못하고우물 속을 흐르던 달도 구름도지워지고 없다 몇 개의 말들만이 떠돈다사이비는 사이버가 되고배신자는 메신저가 되며사이버가 배신자가 되거나메신저가 사이비가 되기도 한다유령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사탄이 있어 신이 추앙받는 사이시인들이 피운 장미꽃잎 아래몸을 숨긴 사람들 장벽 너머를 보고 있지만날아가는 새들마저 징후를 감추고아무도 벽돌을 들지 않는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아무도 벽돌을 들지 않”으며 “몸을 숨긴 사람들”은 누굴까요. 우울한 지구의 한쪽 귀퉁이 한반도,
사랑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아무리 뜨거워도물 한 그릇 데울 수 없는저 노을 한 점온 세상을 헤아리며 다가가도아무도 붙잡지 않는한 자락 바람그러나 사랑은겨울의 벌판 같은 세상을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화원으로 만들고가난하고 남루한 모든 눈물을 쏘아 올려밤하늘에 맑은 눈빛을 닮은 별들에게혼자 부르는 이름표를 달아준다사랑의 다른 이름은 신기루이지만목마름의 사막을 건너가는낙타를 태어나게 하고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길을두렵지 않게 떠나게 한다다시 사랑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묻는 그대여비록 사랑으로 할 수 있는 일이아무것도 없
Covid-19 前, 3년여간 서울 강남 신사동 사설 영화관에서 나는 영화 감상 모임을 이끌었다. 음향 시설과 스크린이 비교적 잘 구비된 아담한 공간이었다. 30여명이 격월별로 특정한 날에 영화 감상을 했다. 그곳에서는 음악 감상도 하고 오페라나 뮤직컬에 대한 강의 등도 하는 곳이다.감상 후 저녁 식사 시(時), 소주 잔을 맞대며 영화 감상평 등 다양한 소재의 이야기로 수다를 떨곤했다. 제법 재미가 쏠쏠했다. 인간은 '호모 사피언스(Homo sapiens)' 이면서도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 하지 앓던가. 동호인과 같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누구나 대학입시 문제로 심각하고도 심오한 고민을 한번쯤 해보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거의 번뇌(煩惱) 수준일 수도 있다. 장래의 삶을 좌우하는 경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점에 대해 그렇게 심각한 고민을 해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못했다고 표현해야 맞을 수 있을 것도 같다.사립고등학교인 모교는 학교를 한층 경쟁력있고 우수한 학교로 육성하기 위하여 전국 고등학교 입학 시험 전(前)에 장학생 선발 시험을 치뤘다. 각 중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의 학생들을 모
물방울이 날아다닙니다自由롭습니다사랑에 젖은 물 한 방울이그중 하나의 뒤를 따라갑니다둘은 나란히 달리기를 합니다하나가 하나를 안고야 맙니다외로움에 찌든 또 하나가 나타납니다통증으로 무거운 놈 하나도 끼어듭니다물방울들은 그러다가무게에 못 이겨 기울어지기 시작합니다이윽고 활강을 시작합니다自由를 포기한 대신추락의 그윽한 기쁨을 안고물방울들은 만나면 흔히서로를 안습니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물방울들은 만나면 흔히 서로를 안습니다”에 깊이 동감합니다. 젊은 시절에 발표된 이 시를 읽으며 다시 상선약수 같은 무한한 사랑을 저밉니다.
빈손이라야악수가 가능하다 한쪽의 힘이 너무 세거나 약하면진심의 악력이 전해지지 않는다 흉금 없는 사이라야포옹이 가능하다 가슴 속에 억울함 품고 있으면서로 껴안거나 등을 토닥일 때마음의 독 가시가 툭 튀어나오고 만다 잠수함 속 토끼도갱도 속에서 노래하는 카나리아도미세한 떨림을 감지한다 지난밤 당신이 한 일을 알고 있어 억울한 소문과 낯선 두려움이깡마른 주먹 악수를 하며가파른 서로의 등을 어루만진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한동안 “깡마른 주먹 악수를” 나누며 지냈습니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만남도 무척 낯설었습니다. 그러도록
50여년전, 1974년 여름 이맘 때 어느날 밤이었다. 당시 기숙사 생활을 하던 나는 사생회장을 하고 있었다. 기숙사생은 100여명 이었다. 아침 6시에 기상을 하고 10시에 취침을 하는 규칙적인 생활였다. 육군사관학교에 가서도 똑같은 리듬으로 옮겨졌다.그래서인지 어렵다는 한달간의 기초군사훈련 기간, 미국 웨스트 포인트에서는 이 기간을 비스트 트레이닝(beast training)기간이라 한단다. 인간에게 짧은 기간에 임팩트 강한 고통을 부여하여 인간을 개조하는 훈련이다. 그야말로 잠도 제대로 재우지 않고, 매 순간 매 행동 고통이
책장이 댐 같다 한 권의 책에는 얼마나 많은 생각이 교차되었을까 바람이 전하는 말과 사막을 건너는 낙타의 말 무수한 별들의 대화와 어시장에서 활보하는 비린 말들 정치꾼의 말 그 여자의 말 그 남자의 말 책장에 방류되는 책을 잡으면 책 속에 갇혀 있던 말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릴 것 같다 가지런히 꽂힌 댐 앞에서 가장 안락한 마음으로 고뇌하는 나는 오늘도 물을 채우려고 밤새도록 수백 미터 지하에 관정을 판다 오늘따라 소용돌이치는 책장 나의 방류를 막아두기 위해 쌓아 둔 댐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책을 읽으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
기도하는 자세로 줄지어 서서눈 감고 있다가 산사 저녁예불 종소리에일제히 눈을 뜨는 가로등 사이에서 저 홀로눈 캄캄히 감고 있는, 가로등하나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웃고 떠드는 여럿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 있습니다. 묵언 면벽 중인 스님이나 묵상에 든 신부처럼 외로이 함께하는 시인이 있습니다. 폭풍전야의 고요함처럼, 혁명 전의 치밀한 음모처럼, 존재가치를 도모하는 “저 홀로”의 외침을 끌어내어 조용히 일갈하는 시인입니다. 언젠간 최용훈 시인의 “진심”이 모두를 무아(無我)의 길로 이끌 것입니다. 시인의 아내가 투병 중입
연꽃은 석탄기에서 왔다어둠 속에 잠자고 있던 꽃씨를 깨워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한 이는 석가모니였다부처의 뜻을 눈치챈 씨앗이잎눈 틔워 캄캄함을 밀어올릴 때간지러운 줄기가 석탄을 너무 많이 만져연꽃은 세상에 올 때 연꽃탄이 되었다아버지는 연꽃탄을 배달하셨다연꽃의 미로를 걸어가집집마다 꽃불을 전해주셨다명덕상회 사이다병이 얼어 터지는 겨울이 오면바퀴 달린 연못이 통째로 골목에 부려졌다쇠집게에 두 송이, 양손에 네 송이씩연꽃탄을 모시고 구름의 언덕을 오르내리는 아버지언뜻언뜻 연탄으로 보이기도 했다연못 다 비워지는 해거름이면배달 마친 아버지
파란색 커튼이 사면을 에워싸고의사와 간호사의 목소리가 급히 새어 나올 때병실에 도착한 내 귀에 얼굴을 붉히고아버지가 귓속말을 했다― 저 사람, 방금 죽었어 유월 장맛비가 창문을 내리긋고자판기에서 빼 온 커피잔이 출렁거렸다 흰 천을 덮은 병상이 나가고가족 병문안이 일상처럼 이루어지는 동안죽음에 관한 소문들 앞에서칸칸이 잘라 나눠 먹는 수박의 푸른 줄이링거 줄처럼 엉켜있었다 어느 땐 이생의 지문인 양검은 씨를 뱉는다 젖은 그늘의 말들을 미음처럼 마시고손바닥을 펴서 낮잠 자던,유리병 속의 몇 줄기 고구마 순궁금한 듯 고개를 침상으로 틀며
아이가 도화지에 처음 그린 얼굴입이 없어 완벽하다평생 살아내야 새길 수 있는 주름살 같은 선線은다빈치도 그려낼 수 없는 입술을 감춰놓고 있다아이 같은 마음에게만 그려지는 숨겨진 입술이 비칠 때선은 주름의 본성을 드러내고 숨쉬기 시작한다막, 선의 눈이 깜박여 체온을 부풀리고 있다본디 도화지같이 평면이었던 내 얼굴도누군가의 안에서 그려지는 대로 자리잡아 왔을 것이다얼마나 많은 연필이 무뎌진 흔적일까, 내 광대뼈는한 사람의 사랑 고백을 부추겼던, 뺨의 홍조는또 얼마나 많은 불면이 지우개가 문지른 핏빛일까내 소리를 주리틀어 말(言)되게 했
소나기 긋고 지나간 뒤비에 씻긴 회화나무 그림자가조금 더 깨끗해졌습니다 회화나무 밑에 숨어 있던 나뭇잎 그림자 물고기들이움츠렸던 지느러미를 털며하나둘씩 깨어납니다 그림자 물고기 위에물고기 그림자실잠자리 그림자 위에그림자 물고기 지느러미가 날개를 업고날개가 지느러미를 업고 하나가 되는저 회화나무 그늘 속으로나는 별리(別離)의 몸으로 차마 들어설 수 없습니다가엾게도 누군가 몹시 그리워지는 계절이니까요 아직 다 떠나지 못한 사람의 그림자를 업고나는 맨발로소나기 긋고 지나간 회화나무 아래를 서성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가장 설레고 따사로운 숨
빈 벽에서 먼 바다의 섬들을 보았다섬들이 놀고 있다우울했다가 심심했다가 깔깔대다가 눈물 흘리다가사는 게 노는 것이라고 했다집이 되었다가 용이 되었다가 상여가 되었다가구름이 되었다가 바람이 되었다가즐겁게 노는 게 곧 비가 오려나 보다비 오면 떠날 듯한 사람이 그립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빈 마음으로 “섬”을 불러내어 봅니다. 마음을 비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 없이 “비가 오려”는 듯한 나날의 연속입니다. 쌓아왔던 것들이 한순간 벽처럼 무너지는 상황도 수없이 맞닥뜨려 왔지요. ‘인생이란 소풍이다. 무슨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