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색 커튼이 사면을 에워싸고의사와 간호사의 목소리가 급히 새어 나올 때병실에 도착한 내 귀에 얼굴을 붉히고아버지가 귓속말을 했다― 저 사람, 방금 죽었어 유월 장맛비가 창문을 내리긋고자판기에서 빼 온 커피잔이 출렁거렸다 흰 천을 덮은 병상이 나가고가족 병문안이 일상처럼 이루어지는 동안죽음에 관한 소문들 앞에서칸칸이 잘라 나눠 먹는 수박의 푸른 줄이링거 줄처럼 엉켜있었다 어느 땐 이생의 지문인 양검은 씨를 뱉는다 젖은 그늘의 말들을 미음처럼 마시고손바닥을 펴서 낮잠 자던,유리병 속의 몇 줄기 고구마 순궁금한 듯 고개를 침상으로 틀며
아이가 도화지에 처음 그린 얼굴입이 없어 완벽하다평생 살아내야 새길 수 있는 주름살 같은 선線은다빈치도 그려낼 수 없는 입술을 감춰놓고 있다아이 같은 마음에게만 그려지는 숨겨진 입술이 비칠 때선은 주름의 본성을 드러내고 숨쉬기 시작한다막, 선의 눈이 깜박여 체온을 부풀리고 있다본디 도화지같이 평면이었던 내 얼굴도누군가의 안에서 그려지는 대로 자리잡아 왔을 것이다얼마나 많은 연필이 무뎌진 흔적일까, 내 광대뼈는한 사람의 사랑 고백을 부추겼던, 뺨의 홍조는또 얼마나 많은 불면이 지우개가 문지른 핏빛일까내 소리를 주리틀어 말(言)되게 했
소나기 긋고 지나간 뒤비에 씻긴 회화나무 그림자가조금 더 깨끗해졌습니다 회화나무 밑에 숨어 있던 나뭇잎 그림자 물고기들이움츠렸던 지느러미를 털며하나둘씩 깨어납니다 그림자 물고기 위에물고기 그림자실잠자리 그림자 위에그림자 물고기 지느러미가 날개를 업고날개가 지느러미를 업고 하나가 되는저 회화나무 그늘 속으로나는 별리(別離)의 몸으로 차마 들어설 수 없습니다가엾게도 누군가 몹시 그리워지는 계절이니까요 아직 다 떠나지 못한 사람의 그림자를 업고나는 맨발로소나기 긋고 지나간 회화나무 아래를 서성입니다 지금 이 순간을가장 설레고 따사로운 숨
빈 벽에서 먼 바다의 섬들을 보았다섬들이 놀고 있다우울했다가 심심했다가 깔깔대다가 눈물 흘리다가사는 게 노는 것이라고 했다집이 되었다가 용이 되었다가 상여가 되었다가구름이 되었다가 바람이 되었다가즐겁게 노는 게 곧 비가 오려나 보다비 오면 떠날 듯한 사람이 그립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빈 마음으로 “섬”을 불러내어 봅니다. 마음을 비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 없이 “비가 오려”는 듯한 나날의 연속입니다. 쌓아왔던 것들이 한순간 벽처럼 무너지는 상황도 수없이 맞닥뜨려 왔지요. ‘인생이란 소풍이다. 무슨 목
진달래라는 처자를 짝사랑하다가그 처자는 다른 사내에게 시집을 갔다네끝내 사랑을 안지 못한 달수 형이이내 사랑 대신에 폐병을 몸에 안고서혼자 산속으로 들어갔다네달수 형이개구리와 뱀을 잡아먹고 살아있다는 소문을얼핏 바람결에 들었지만형이 사랑도 보릿고개도 넘지 못하고 숨질 때산자락 여기저기에 각혈을 한 자리아, 환장하도록, 환장하도록 진달래꽃 붉게지천으로 피게 됐다는 허망하고 허망한만물의 숨통을 간질이는 봄날이었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올해는 유독 “달수 형”의 ‘진달래“가 “환장하도록” 피었습니다. 지고지순한 “짝사랑”의 벼랑
총보다 더 무서운 건봄에 피는 꽃이다 총알보다 더 정확히언 땅을 뚫고 나와 과녁도 없는 마음을정확하게 맞춘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이보다 “무서운” 꽃이 있을까요? 짧은 시어의 촉마다 “정확하게” 꽂힌 시의 꽃, “과녁도 없는 마음”을 맞춘 꽃이라니…. 다 부질없는 삶이라고 여기면서도 엄동설한 견뎌 내고 피워올린 꽃을 보면 다시금 생명에의 외경을 되새기곤 합니다. 선비정신으로 시의 밭을 꿋꿋이 일궈 온 임영석 시인이야말로 “봄꽃”입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와 논어 「자한」편의 ‘삼군 가탈수야 필부 불가탈지야(三軍 可奪帥
제단에 오른 사제가깊숙이 몸을 숙여 제대에 입맞춤을 한다당신의 종, 낮은 자리의 종이오니 등을 낮게 구부리는 순간 물방울사제는 동그랗고 작은 물방울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흐르는 물방울가벼워두둥실 떠오르는물방울날아가는물방울 물방울에서 물방울이작은물방울이 커다란 물방울이 된다 지구처럼 커다란 물방울태양처럼 커다란 물방울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되는물방울이 된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김예강 시인은 물의 시인임이 분명하군요. 최근에 출간한 시집 『가설정원』을 읽어 보면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위의 시를 포함하여 물의 주름, 눈물
삼년여의 긴 코로나 터널을 지나, 그 끝자락에서 중학교 동기 동창들과 오랜만에 만남을 가졌다. 캐나다에서 일시 귀국한 동기 외 여섯명의 여성 동기와의 오찬 자리였다. 청일점인 나, 그리고 위 칠선녀와의 만남이었다, 캐나다에 이민중인 동기가 일시 귀국하여 기획된 만남같았다. 오랜만의 만남이니 모두 반가웠다.모임중 일원인 동기가 운영하는 남한강 메기 매운탕집, 개인적으로도 맛이 좋아서 코로나 상황 전에는 수차례 갔었지만 여전히 맛있었다. 메기와 참게, 민물 새우를 듬뿍 넣고 끓인 매운탕,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가운데 소담하고 먹음직
언젠가 한 번 이 밀밭에 온 적이 있다이 찰진 흙을 밟고 가다풀숲으로 미끄러진 적 있다네 팔이 내 허리를 안은 적 있다종달새의 둥지처럼 아늑한 네 품에서젖빛 하늘에 취한 적 있다내가 처녀인 적이 있다너와 팔베개하고 한잠 자고 나면깃털처럼 가벼워지던 아침이 있다멀리 소풍가자고 꽃시절 다 간다고손잡아 끄는 너를 팔랑팔랑천 년 전에 따라 나와나 아직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집이 있어요. 제아무리 잘 지으려 해도 온전한 집이 되질 않아요, 자꾸만 무너져요. 언젠가 넘어져 봄 직한, 추억
이 깊은 산속에 섬이 어디 있느냐고이 깊은 산속에선 내가 섬이다 거북손 따개비 허리를 휘감는 파도는 없어도달을 보고 별을 보고 바람을 안고홀로 울 줄 아는내가 섬이다 바람에 실려 오는 꽃향기 새소리 낙엽은 파도이고정다운 이 찾아오면 밀물로 맞고보낼 땐 아쉬움의 썰물이 된다 밀물 썰물 기약 없는산중의 섬은기다림을 배우며 그리움을 알고그리움을 모아서 시를 쓴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그렇지요. 섬은 바다에서만 살고 있진 않죠. 마음먹기에 따라 별 달 해도 혼자 견디는 섬처럼 느껴질 때가 많으므로 “홀로 울 줄 아는”사람이야 오
변기가 살아 있다, 이 밤에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변기 저 혼자 클클클 웃는 소리. 부글부글 용암이 솟구치듯 이따금씩내 머릿속을 헤집고 나와불쑥 내지르는 주먹. 휩쓸어 끌어들이는 소용돌이 물살 속에너도 들어오라고클클클 기분 나쁘게 웃는 소리.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만약에 말이지요, 만약에. ‘중심(中心)’도 생명체라면 그는 분명 웃고 있을 것입니다. 내 편이 아니면 빨갱이로 구르다 멈추는 흑백 구슬을 변기의 “소용돌이 물살 속에” 처박아 넣으며 “클클클” 웃어버릴지도 모를 중심! 웃고는 있지만, 결코 웃지 못할 “불쑥 내지르는
햇빛이 시든 해바라기 꽃잎처럼 노래지는 오후스포츠 색에 스마트폰을 넣고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꽃은 채 산책을 나간다이난영-목포의 눈물을 듣는다과거에 뽕짝이라고 경멸했던 노래어느새 옛 가수의 비음(鼻音)과 선술집 작부의 젓가락 장단 같은 트로트가 달콤한 나이가 되었다클래식기타를 치는 고3 수학교사 딸에게 “이 가수의 슬픈 음색이 기가 막히지 않냐?”고 동의를 구했더니“에이, 저런 곡을 어떻게 들어요, 아빠 귀가 늙으셨어요.”하며 타박을 주었던 노래클래식은 수학적 추상의 대위(代位)와 화성때문에 훈련받은 감성만 접근이 가능하다한때는
할무니 애렜을 때도 달이 저라고 컸어요?아먼 시방하고 똑 같었재할무니는 추석에 뭐 했어요?우리 아바님 지달렸재할무니도 아부지 있어요?그라재 아배 없이 난 사람이 있다냐으디서 지다렸어요?동네 앞에 사에이치 비석 있지야 전에는 거그 큰 소낭구가 있었는디 거그서 지달렷재할무니 혼자요?아니 우리 성허고 동상허고 항꾼에 지달리재 아바님은 저녁에 해가 지우러야 오싱께 혼자 지달리면 무서와 그때는 할무니도 똑 너 같이 생겠어야할무니가 나랑 똑같었어요?그라재 할매도 너같이 열 살일 적 있었고 열한 살일 적도 있었니라와~ 최고 이상허네이상헌 거이
불바다 모래땅을 달려오는 낙타 내가 그를 위해 마련한 잔치는형벌로 받은 살점소소초* 가시잎들철철 피를 쏟으며천형의 입질은 시작되고들뜬 비명이 가라앉을 쯤이면낙타는목젖에 박힌 몇 개의 가시 이파리정표를 안고 떠난다 늘 목이 마르고 뿌리가 탄다 * 소소초 : 일명 낙타풀. 사막에서 자라는 선인장의 종류. 낙타가 피를 쏟으면서 먹고 번식시킨다고 함.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시인’이란 멍에가 시를 쓰는 이로 하여금 사막의 낙타를 불러옵니다. 가질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사람이 시인이라면 그런 시인의 행보와 낙타는 참 많이도 닮았다
사각의 아파트사각의 방에서사각의 침대에 누워사각의 벽을 바라보며나는 사각이 된다사각의 내 안에는마음들도 사각으로 개켜 있다갑티슈처럼어딘가로 뽑혀 나갈 자세로순서를 기다린다참 많은 사각의 마음반듯한 사각으로 살리라는사각사각 접어놓은 꿈톡 뽑히는 순간세상의 바닥을 닦으며더러워진다 버틸수록찢어지는 타고난 내구성으로빠르고 부드럽게구겨지는 습성도 익힌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지금 내가 지은 마음은 어떤 모습일까요. 기쁜 마음 화내는 마음 슬픈 마음 즐거운 마음 날카로운 마음, 형형색색으로 마음의 심장을 들락날락하며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당신은 구름을 타고 세상을 얻으셨나요새의 깃털 하나 깔고 앉아 가부좌로 정진하는주름진 사선死線의 이방인무슨 공덕으로 생사의 경계를 노 젓고 계시는지감은 눈으로 미소를 머금은 비탈 없는 침묵오늘은 저승인 듯, 오늘은 이승인 듯깊이를 잴 수 없는 텅 빈 가슴의 껍데기인가요까마귀 한 무리 버스 백미러에 목숨을 던져생을 갈라놓은들 지구는 흔들리지 않고허공의 여객기가 난기류에 흔들리고 있어요어딘가에 전생을 기탁한다는 일저토록 가슴 훈훈한 가부좌로 앉아생사의 까닭을 깁고 있군요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비록 수도승이 아닐지라도 ‘입적(入
돌에도 꽃이 피랴?종일 돌아앉아돌덩이인 자신을 탓한다하지만 햇살이 다가와꼭 껴안아 주자그늘에만 숨던 마음화사하게 풀어놓는다 어디선가 흰나비 하나위로하듯어깨에 사뿐 앉는다 뜬금없이 나비가 떠나가도결코 잊지 않으리라그 오붓한 순간꽃자리 그 향기를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하루하루, 햇살과 그늘을 마주하면서 내가 받아든 희로애락 자리마다 돌이켜보니 사실은 꽃자리였습니다. 옹이 같은 한숨도 향기를 내뿜으며 늘 가까이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순간순간이 이어져 이루어낸 지금이 곧 나의 오늘이겠지요. “숲예술운동가” 시인으로 활동하고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끌림 중 작은 부분만 경험하고 살아 간다면 나머지 수많은 크고 작은 끌림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여행을 떠날 때마다 늘 되뇌어 보는 말이지만 그 끌림이라는 단어도 세월이 깊어짐에 따라 이제는 안개속의 희미한 형체처럼, 모자이크 처리된 사물처럼 뚜렸하게 느낌이 다가 오지 않는다.흔하게 하는 말로 ‘여행은 다리 떨릴 때 가지 말고 가슴 떨릴 때, 설레일 때 가라’는 말도 있듯이 '끌림도 설렘도' 나와는 거리가 점점 멀어져 가는 정서적 언어가 되어 가는 것 같다. 감성이 그 만큼 매말라 가는가 보다. 감성의 예민함
둥글둥글 돌멩이주워 귀에 댄다 돌멩이 속에 갇혀있던 이야기들이간지럽게간지럽게 귓속으로 흘러든다 귀에 댄 돌멩이를강에 던지자남아 있던 이야기 번지는 듯물 나이테 퍼져간다 그, 찰나 개구리 꽥, 소리 지르고풍덩 물속으로 뛴다 에구. 미안! 서슬에 놀란 쇠백로날아가며 허공에 뿌린 소리 물 위에 시 한 편 지나간다 * 강물 위에 쓴 시 : 전남 나주시 남평 드들강 가에 있는 카페 이름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있는 그대로 글로써 그림을 그리면 그것이 바로 시가 아닐까 라고 생각할 때, 김황흠의 시는 시각과 청각이 어우러지면서 고향 내
산까치 걸어간 새벽 눈길숭어가 헤엄치는 샛강 어귀갯벌에 써 논 농게의 부호고비사막 모래 물결에낙관을 찍는 낙타호수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봄비문득 걷고 싶은 은행나무의 발목네 마음이 서성거리는내 삶의 가장자리한 편의 시로 자리 잡은 눈물샘받아들이고스며드는 곳에는물렁한 온기가 있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받아들이고 스며드는 곳”마다 나지막이 숨 쉬는 발자국들이 살고 있었군요. 갖은 흔적의 무게를 감당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그들이 받아주고 받쳐준 삶의 “온기”를 생각해 보게 되네요. CCTV처럼 우리의 행적을 다 알고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