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식장 물고기는 수족관이 태 자리이고 무덤이다사람 손에 태어나 사람이 되지 못하고 사람의 먹이가 될 뿐 사람도 신이 양식한다지구 안에서 나고 죽는다도시의 휘황한 빛을 좇아 모여 살다 사라진다 신이 집정한 지구는 거대한 공동묘지 육이오 전쟁 피난민인 아버지는 끝내 귀향하지 못하고남녘에서 살다 남녘에서 돌아가셨다 신은 끝내 통일을 집도하지 않았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우주에서 보면 지구는 분명 조물주가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붉은 바이러스가 변이와 변이를 거듭하며 푸른 별을 위협하는 지금, “사람도 신이 양식한다”라는 정의 아
어느 분의 댓글에서 하룻밤을 묻어가시라는 인사를 보았다분명 '하룻밤을 묵다'라고 적을 것을 오타가 난 것이리라어둠 속 갈 곳 없는 하루가 버거워무작정 달려가 어머니 치마폭에 고개를 묻고펑펑 눈이 짓무를 때까지 울어본 사람은,거친 어머니 손이잔등을 쓸쓸 쓰다듬으며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던 밤이 있었던 사람은, 하룻밤을 묵은 것이 아니라하룻밤을 묻은 것이다 우주보다 널따란 치마폭에 묻혀눈 뜨지 말고자작나무줄기 같은 어머니 손을 잡고하룻밤 꿈을 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룻밤을 묵은들, 하룻밤을 묻은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근로재활대 유리문에손때 묻은 쪽지가 붙었다“잠깐 외출 중, 용무 있으신 분 연락주세요.”한 평 공간에평생을 수그린 그가긴 용무를 보러 갔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단순한 외출이 아닙니다.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간 그가 머나먼 하늘나라에서 내려다보는 나들이입니다. “긴 용무”라고 에둘러 표현한 시인의 비유는, 어느 가난한 노동자의 예기치 않은 마지막 길을 담담하게, 수식 없이 이끌어냅니다. 피와 땀과 눈물과 남다른 희생을 담보한 노동의 가치를 가볍게 흘려보내며 안주하고 있진 않는지, 이제부터라도 깊이 되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서재에서 책을 보는데거실에서 아내가 부르는 소리 들린다다짜고짜 방석 위 앉아 보란다 우리 신랑 인생 헛살진 않았구나착하게 산 보람 있네혼자 중얼거리며넙죽넙죽 삼배를 올린다얼떨결에 나는 반배로 받았다 대본도 없고 엑스트라도 없는감독도 아내 주인공도 아내정색의 영화를 찍는데뜨거움이 왈칵, 앞을 덮쳤다 채 1분도 걸리지 않는 영화그 대본 쓰는데 27년이나 걸렸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이 시를 임제선사의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에 비유한다면 너무 비약한다 하겠지요. 하지만 마음 두는 곳마다 주인이 될 수 있다면 그대가
인적이 뜸할 때로 추정됐다. 아파트 재활용품 코너에 누군가 냉장고를 버렸다. 며칠을 방송으로 양심에 호소했으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범인은 반드시 범죄 장소에 나타난다는 검증된 확률도 별 의미가 없었다. 겉은 멀쩡했으므로 외양만으로는 그의 죽음과 유기의 진상을 알 길이 없었다. 전원 플러그를 꽂아 스위치를 켠다. 이미 맥박이 멈추어 잠잠하다. 문을 열자 음식 썩은 냄새가 진동한다. 주인의 정성을 채우던 흔적들이 기울어진 선반 한쪽으로 몰려 있다. 심장이 박동하던 콤프레서실을 열자 영하36도의 혈액을 나르던 황동관은 오래 전 냉기
초성은 같았으나 중성에서 착오가 있었다 ㅗ와 ㅣ의 차이에 객석의 관중은 웃음을 던졌다 피아노를 치는 사회자는모시고 싶지 않은 첼로 연주자 소개에연주자는 벌떡 일어나안으로 들어가려다가 자리에서 심호흡했다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자는ㅗ와 ㅣ의 중성에 귀를 기울이며“모시기 쉽지 않은 초대”라는 말에 현을 켜기 시작했다 피아노는 첼로를 모시고 싶었고첼로는 바이올린을 초대하고 웃었다 피아노와 첼로와 바이올린의 삼중주ㅗ와 ㅣ의 초대가 감정의 벽을 횡단하듯 부드럽게 넘어간다 피아졸라는 움직이는 사람들의 유기체 중사랑, 슬픔, 고통이라고 하지만그중
나는 한 번도 별이 뜨는 걸 본 적 없다별이 지는 걸 보는 건 아주 오래되었지만뜨는 걸 본 적은 한 번도 없다별의 주소도 모르고별의 가족도 모른다이젠 더 이상 별이 지는 것도 못 보겠다별의 나이도 묻지 않기로 했다이미 별의 심장이 되어 나를 점령한 너를바라보는 일만으로도 나는숨이 막힌다그저 별의 그림자만 따라가기로 했다별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별이 된 너의 안부를 묻기로 했다이 밤이 지고 나면 네가 숨 쉬던 자리에별꽃 한 송이 피어나바람마저 붉게 물들이겠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평생을 시와 함께 시처럼 사는 시인
오줌 어르신도 잘 잤고똥 어르신도 잘 잤는데요배회 그 어르신은밤새 오락가락하셨어요 노인요양시설 야간근무자와 주간근무자의인수인계 대화를 귀담아들은어르신, 병상에 누워눈을 똥그랗게 뜨고 바라보신다아흔여섯 살인 당신이마흔한 살이라고 우기는어르신, 굳어가는 혀로떠듬떠듬 말씀하신다 소, 속삭, 거, 려, 도, 다, 알아!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몇 해 전에 귀향하여 어르신들의 육필을 받아쓰는 시인의 세 번째 시집 표제 시입니다. 연작시 “치매 꽃” 네 편을 위시로, 시집 전편에 그리움과 애절함이 잔잔히 흐릅니다. 치매를 꽃으로 보다니
옛날길을 내다나무가 계시면길이 비켜 갔다 지금나무가 있으면둥치를 잘라 버린다 뿌리째 뽑힌 하체 한 분관공서 로비에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이 돌아서 간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인본제일주의와 자본주의의 맹점을 콕 짚어줍니다. 무시무시한 굴착기가 지나간 길이 왜, 어느 순간 보편화된 길이 되고 말았을까요. 자연의 흐름을 거역한 현대문명은 지구별을 점점 더 숨 막히게 합니다. “관공서 로비”에서 “뿌리째 뽑힌” 사람은 거동불편자일 수도 있고, 자기의사에 반한 행정처분에 분개한 민원인일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돌아서 간다”
어느 귀한 댁조신한 아씨기에저만치 고운 임 앞세우고짚어준 발자국 따라장감장감 내딛는 걸음저리 고울까 * 장감장감 : 물기가 있거나 고르지 않은 길을 조심조심 걷는 모습을 나타내는 전라도지방 사투리.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개밥바라기를 보게 되는 날에는 괜스레 먹먹해집니다. 배가 고파 밤새도록 바라기를 핥아 반짝이던 개밥그릇처럼, 가난한 별이 아득히 뜨던 시절 때문이 아닐까요. “조신한 아씨”는 지아비(달)를 그리워하는 샛별이라고 시인은 노래합니다. 그님을 향한 “내딛는 걸음”이 “장감장감” 참으로 곱고 예쁩니다. 샛별, 개밥
구석이 좋을 때가 있다 고단한 하루가모두 물러나고조용히구석에 등을 기대며두 발을 뻗으면 이제 좀 살 것만 같은 별을 기다리는 작은꽃 한 송이 될 것만 같은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진솔하고 담백한 시의 맛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노동의 힘듦이 묻어납니다. 구구절절 피로감을 주는 시보다는 이처럼 쉽게 와 닿는 시가 좋습니다. 이 시를 처음 접했을 때 개인적으로 백석 선생님의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의 “흰 바람벽이 있어”와 내 친구 김사인 시인의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가만
사과가 사라졌다 사과의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했는데 사과가 식구를 데리고 사라졌다 형은 내가 미워 떠난 게 아니다 동생도 내가 싫어서 떠난 게 아니다 우리가 서로 사과하지 않아 떠난 건 더더욱 아니다 불현듯 사과밭을 제대로 알아야 사과를 사랑할 수 있다는 아버지 말씀이 떠오른다 나뭇가지에 쌓인 바람을 뭉텅 자르던 상처 난 아버지 손등이 떠오른다 아마도 담장 밖 바람을 이해하지 못한 게 원인인지도 모르겠다 아직 사과밭에 향기가 진동하는 걸 보면 찢어진 향기 속에 웅덩이는 왜 그리 많은지 우묵한 물음은 왜 그리 촘촘 박혀 햇살을 끌고
소리에도 무게가 있다소리들이 중력에 비례하는 속도로대나무밭에 내려앉을 때쌍골죽은 소리를 먹고 자란다죽순 밑동은 다 자란 대나무크기마디마디 여린 고막을 벼르고달빛의 흐느낌, 햇살의 웃음소리,비와 바람의 노래를 둥근 벽에 새긴다기둥을 밀어 올리는 대나무들이제각기 허공을 향해 키를 가눌 때결코 높이를 탐하지 않는 쌍골죽*오히려 몸을 움츠려 눈을 감고후미진 곳에 머물러 오직 귀를 연다우주에서 달려온 별들의 속삭임을,새벽을 여는 안개의 종소리를 듣는다아침이슬이 적셔오는 둥근 몸통에세상의 모든 울음소리를 새긴다당신의 눈물소리를 받아 적는다 *
살면서똥 밟는 서러움은구린내가 아니다똥 밟는 순간 누구나세상의 똥이 되기 때문이다 살면서똥 밟지 않는 자 없다한 번도 똥 밟지 않은 자는산 자가 아니다그야말로 세상의 진짜 똥이다 살면서똥 밟는 것 두려워마라두려움은 세상 가장 구린 똥꽃 붉게 피우려는 자똥밭길 먼 새벽을 걷는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똥은 대나무이자 강철이고 금입니다. 고위공무원 출신인 시인과는 “똥”으로 인하여 금붙이보다도, 뚝 부러지는 강철보다도 값진, 대나무 같은 기개의 일치감이랄까 그런 연유로 만나 금세 친해졌습니다. 지극히 정치적인, 썩은 내음 진동하는
길을 걷다보면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가 있다 언제부터 자라났는지땅속에 뿌리를 숨기고 있다가 마음을 넘어뜨린다 땅은 제 속에 얼마나 많은 부리들을 숨겨두었는가눈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삶의 보폭은 자꾸 커져만 가는데 별을 바라보다가발밑에 꽃을 밟기도 하고마음속에 심어놓은 암초들을 만나기도 한다 비가 온 후 더 자라난 부리로마음은 먹는 것이 아니라 문을 열고찬찬히 들여다보는 것 넘어져서야 비로소 주변을 볼 수 있듯걸림돌이 없다면 바닥을 볼 수 없다 앞만 보고 가는 사람들 천천히 가라고돌은 길속에 부리를 숨겨 놓은 것이다 뿌리내린 자
'열심히 모은 돈 죽을 때 가지고 갈 거여? 왔을 때처럼 빈손으로 가는 거여' (Are you going to take your hard-earned money with you when you die? When you die, you go empty-handed.)지난 2년여 기간 동안, 코로나19 팬데믹(Corona19 Pandemic)으로 국민들의 많은 일상생활이 무너졌다. 필자 또한 마찬가지다. 필자는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된 지난 2020년 2월부터 '거리두기' 기조에 맞춰, 계제에 '나홀로 드라이브, 나홀로 트레킹 등 나
‘그리고’는 단지 접속사지요그 무게는 가볍지만우리에겐 꽤 오랜 생활의 법칙이랍니다아내는 ‘그리고’로 자라나는 하루를 좋아합니다‘그리고’에 피어나는 미소를 매우 즐깁니다나는 가끔 ‘또는’이란 행동으로 아내를 화나게 하죠직장생활을 핑계로 ‘또는’을 주장합니다새벽 4시경 비틀거리는 ‘또는’이 문을 두드리기도 하지요‘그리고’와 ‘또는’은 어느 지점에서 함께할 수 있나요결혼 30년 정치적 협상 끝에많은 ‘또는’이 ‘그리고’를 수긍했을 때아내의 잔소리는 나비처럼 팔랑 거립니다‘그리고’를 닮아가는 ‘또는’의 얼굴에서환한 오솔길이 날아오릅니다그리
너무 얕아 보여내를 건너다, 그만두 발목을 빠뜨리고 말았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존중과 배려, 양보하는 데에서 민주주의의 꽃은 활기차고 싱그럽게 피어납니다. 아주 작고 연약한 꽃일수록 무릎을 꿇고 고갤 숙여야만 향기로운 품을 내어줍니다. 야트막하다고 얕잡아보다가는 지금까지의 시간과 열정이 한순간 진흙더미에서 허우적대게 됩니다. 힘 좀 있다고 자연과 인생의 순환 고리를 무시한다면 그만한 죄과를 받습니다. 애틋한 추억일수록 알 수 없는 깊이로 흑백사진으로 남듯, 유년시절 “실개울”에 빠진 순한 내 모습이 아련히 그려집니다. 38
가죽샌들을 벗어 흙벽에 황금초원을 그립니다향기보다 높은 창에 화분을 걸고비밀로 가는 비행기를 오려 붙입니다 당신의 겨를을 살피는 밤가슴을 잡는 것과 가슴에 잡히는 것은 달라서나는 당신의 겨드랑이를 파고듭니다 적막은 뿌리 없는 화살나무간절해지지 않으려는 기둥에 거미줄이 쳐있습니다불면의 계곡 너머피부는 어두워 불이 켜지지 않고서서 잠드는 날의 연속입니다 빈자리를 옮겨 다니며 파고드는 비비와 비애보다 가까운 관계는 없습니다 나는 어디로 떠나 온 듯도 하고어렴풋이 위치를 깨달은 듯도 합니다 우기에도 혀를 나누는 연인들옆에 서 있기만 해도
선운사 뒷마당 동백꽃눈물 되어하나, 둘뚝뚝 떨어집니다달빛 되어 잘게 부셔져 내립니다그 꽃잎 하도 서러워잊혀 진 사랑인 줄 알았습니다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줄 알았다면더 이상 아파하지 말 걸 그랬습니다핏자국 선연한 꽃잎자리한때 사랑했던 기억처럼깊어져 갈 때어디서 날아든 꽃잎하나냅다 풍경을 칩니다세상에상처 아닌 꽃이 없습니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사랑은 마음의 벼랑 끝에 높은 절집 하나 짓는 일일까요. 풍경(風磬)소리가 사랑으로 말미암은 상처를 쨍강쨍강 불러냅니다. 지나고 보면 상처 아닌 상처가 없으며 그 상처가 바로 오늘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