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세공무원‧세무사 ‘전혀 엉뚱한 우연의 길’이었다…그러나 ‘필연’이었다”
대학겸임교수, 자기계발서 작가, 서울회장 이어 세무사회 윤리위원장 당선
 

엉뚱한 길로 들어섰다고 생각했다. 국세청에서 근무하다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해 사직서를 내던지고 나왔다. 세무사 자격증을 취득하게 되면서 35년을 세무사로 살아온 지금은 그때의 그 길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생의 절반을 세무사로 살아오면서 돈 버는 일 뿐 아니라 세무사라는 사회적 사명감을 심어주는 한국세무사회 내에서도 다양한 직책을 맡아 회의 발전과 회원의 권익 수호를 위해 봉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세무사고시회 부회장과 회장, 서울지방세무사회 부회장과 회장을 연거푸 거쳐 지금은 세무사회 윤리위원장이다.

그는 또 대학겸임교수, 자기계발서 작가, 성균관대학교 경영일반대학원에서 석사, 박사를 마쳤다. 현재 세원세무법인 공동대표다. 한국청년회의소 연수원 교수 겸 교수부장, 한우리 독서운동본부 이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김상철 세무사(회계학 박사)의 이야기다.

◆ 김상철 세무사의 맛집, 역삼동 ‘가시리 추어탕’

김상철 세무사가 자주 찾는 맛집은 서울의 부촌으로 불리는 역삼동에 위치한 서민들의 맛집 ‘가시리추어탕’이었다. 그의 사무실인 세원세무법인 인근에 위치한 덕분에 수수한 보양식이 필요할 때면 쉽게 찾아올 수 있다고 했다.

역삼동의 수많은 음식점 중 이 맛집이 유독 김 세무사의 발길을 붙잡을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단돈 만원으로 먹을 수 있는 가시리추어탕은 다른 비싼 추어탕집보다도 얼큰하고 걸쭉한 깊은 맛이 일품이었다. 특히 추어탕은 보양식으로도 먹는 음식인 만큼 그의 사무실 근처로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면 항상 이곳을 찾아 함께 식사를 즐긴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날 식당에는 그의 지인도 추어탕의 맛에 반해 찾아와 점심식사를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유가증권 시가정보의 유용성 크기에 관한 연구 -비금융업을 중심으로-’

시골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그는 배움에 대한 욕심이 있어 대학 진학을 꿈꿨지만 여러 사정으로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이후 전문자격사(세무사)가 되었지만 공부가 더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면서 박사학위에 도전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성균관대에서 ‘유가증권 시가정보의 유용성 크기에 관한 연구 -비금융업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박사논문을 썼다. 논문을 쓸 당시 사회는 1997년 외환위기로 인해 우리나라 기업회계기준에 대한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고, 유가증권 회계처리가 원가법에서 시가법으로 바뀌면서 시가로 평가했을 때 정보의 유용성이 얼마나 클 것인지 분석해보고자 했다.

그는 연구결과 유가증권시가정보에 대한 유용성은 모든 분석에서 유용한 것으로 1%수준에서 유의하게 검증됐다고 밝혔다. 즉 시가정보가 정보이용자들에게 보다 유용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

그는 논문에서 유가증권의 경우에는 유가증권평가손익이 실현된 손익인 유가증권처분손익과 유용성수준이 비슷하게 나타나므로 유가증권평가손익을 유가증권처분손익과 같이 당기의 손익항목으로 처리하고, 투자유가증권평가손익은 실현된 손익과는 유용성에 차이가 있으므로 회계정보 왜곡을 방지하기 위해 투자유가증권평가손익을 자본조정항목으로 처리토록 한 기업회계기준의 규정이 타당하다는 논리에 실증적 근거를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그가 박사학위에 도전한 때는 97년도 7월이었다. 40대 후반에 시작한 공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IMF가 터지면서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다. 세무사업을 하면서 꾸준히 모은 돈으로 주식투자를 했던 탓에 수억 원의 돈이 휴지조각으로 변해 더욱 힘든 시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새 사전을 펼쳐가며 공부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2001년 8월, 4년 만에 학위를 취득했다.

◆ ‘우여곡절’ 끝에 국세공무원, 그리고 세무사

그는 고등학교 졸업 직후 공무원이었던 집안 어르신의 권유로 공무원 시험을 보고 74년 9급 행정직에 합격해 문교부(현 교육부) 서울대본부에서 면접을 봤다. 공부하기 좋은 환경이라 생각했지만 군대가 문제였다.

군 입대를 앞두게 되면서 서울대 본부의 임용은 보류됐고, 74년 말부터 77년 9월까지 군 생활을 보내게 됐다. 전역 후 77년 10월경 국세청으로부터 임용장이 날라 왔다. 어떤 영문인지를 몰라 국세청 인사과에 찾아가 임용에 관한 내용을 문의 한 바, 문교부로 기 발령되었던 임용이 국세청으로 이첩되어 발부된 임용장임을 알게 되었다.

서울대 본부에서 근무하면서 못다 한 학업을 계속해야 하겠다는 꿈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허탈해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인사과 직원이 국세청에서도 근무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곳이며 더구나 국세청은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싶어 하는 선망의 직장이라 하면서 잘 판단하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서울에서 근무할 수 있는 지를 묻자 서울지역은 한 달 전 인사발령이 모두 끝났기 때문에 어렵고, 서울에서 가까운 수도권 발령은 가능 할 수도 있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후 77년 11월 초경 국세청으로부터 이천세무서에서 근무하라는 발령장을 받고 국세인으로 사회 첫 출발을 하게 됐다.

국세청에 입사해서도 사실 공부를 더 하고 싶은 마음에 3개월만 하고 그만둘 생각이었다. 그러나 국세청 생활은 즐거웠다. 젊은 또래의 동료도 많이 만나 함께 일하다보니 시간이 점점 흘렀고 주변에서도 들어가기 힘든 곳을 왜 나오려고 하느냐고 만류했기 때문에 공부를 계속할 것인지, 국세공무원을 계속할 것인지 내면에서 갈등이 적지 않았다.

그렇게 5년 가까이 국세청에서 근무하고 결국 81년에 퇴직해 회계사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김종화 세무사(전 세무사회 부회장)와 함께 공부하면서 회계사 시험이 아닌 세무사 시험을 보게 됐고, 김종화 세무사의 도움(서브노트)을 많이 받아 퇴직한 이듬해 바로 세무사 자격을 취득할 수 있었다. 그때의 인연으로 김종화, 연제관 세무사와 합동으로 방산세무서 앞에서 세무사업을 시작해 지금도 같이 일하면서 찰떡궁합을 자랑하고 있다.

◆ 봉사활동 “누군가는 해야 할일…배우게 된다”

그는 세무사업뿐만 아니라 봉사활동도 활발히 펼치고 있다. 한국청년회의소(JC) 연수원장, 서울지구청년회의소 회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는 한국청년회의소 연수원 교수부장으로 활동 중이다. 또 한우리독서운동본부 이사, 인테리어25시봉사단 부회장도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그는 봉사활동을 통해 세상을 보는 관점을 달리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자신에게만 충실하고 남 앞에 나서는 성격도 아니었지만 봉사활동을 하면서 세상이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는 즉 이웃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독거노인을 찾아 돕고 벽지를 바르는 등 생활지원 봉사활동에도 매달 참여했다. 현재는 세무사회 봉사에 힘쓰고 있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탓에 후원에만 힘쓰는 중이다. 각종 봉사활동을 통해 유니세프대표자 공로상, 서울시장 공로상, I0C위원장 공로상, 국세청장 공로상, 한국세무사회 공로상 등 각종 수상의 영광도 안았다.

그는 “누군가는 해야 할 일들을 했지만 주변이 변화되는 것을 보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설명했다. 또한 사회봉사활동에 이어 세무사회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봉사의 뜻을 계속 이어가는 중이다.

그는 97년도부터 회직활동을 시작했다.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세무사고시회 부회장으로 활동을 시작해 본회 연수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이후 2004년 서울세무사회 부회장 후보로 나서면서 처음으로 선거활동을 하게 됐다.

그는 그 후 서울회 부회장 4년을 마치고 2008년 서울회 회장에 출마했다. 그 선거에서 처음의 예상과는 달리 선거중반 이후에는 여론이 좋아 당선을 낙관했지만 투표당일 소견발표를 하면서 상대후보의 공약에 대한 문제점을 이야기 한 것이 네거티브로 비춰지고, 소견발표와 투표 진행 중에 발송된 상대후보의 문자와, 총회 전 긴 연휴관계로 선거사무소를 일찍 닫는 등 여러 사건들이 겹쳐 결국 23표 차이로 당선되지 못했던 아쉬운 기억을 갖고 있다고 했다.

당시 선거에 대해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세상이 자기 자신의 의도대로만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됐고, 또 하나는 자신을 다독일 수 있는 기회도 됐다”고 소회했다.

◆ 세무사,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

그에게 세무사란 ‘전혀 엉뚱한 길’이었다고 한다. 군대를 다녀온 후 의도하지 않았던 길로 가게 되면서 지금의 삶이 우연의 연속인지 필연이었는지 생각해 볼 때도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세무사란 ‘그 자신이고 존재 자체’라는 것을 느낀다고 설명했다. 결국 세무사라는 직업을 통해 주변사람에게 도움과 변화를 주기도 했지만 도움을 받기도 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알게 됐다는 것이다. 또한 어려운 사람을 경제적으로 돕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만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직업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특히 “세무사 업은 국가의 존재를 위한 살림에 필요한 재정을 충족시켜야 할 역할과 국민의 재산권을 보호해야 하는 상충관계를 조화시켜야 하는 고도의 전문기술이 요구되는 직업”이라면서 “사회와 국민생활을 안정화시키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단순 생계수단의 차원을 넘어 공적인 사명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또한 그에게 자신의 아들이자 후배인 세무사에게 전할 이야기를 묻자 “후배가 잘 돼야 가정이 잘 되고, 우리 세무사회와 사회도 마찬가지”라며 “아들이 세무사이지만 아들뿐만 아니라 모든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후배들을 향해 “조세 전문가로서 전문성을 향상시키는 것을 최우선적으로 해야 하지만,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문성 못지않게 늘 인간관계도 중요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는 결국 정직과 성실이 기본이 돼야 하며, 정성을 담아 하는 일들은 자신을 성장시키게 된다는 점도 덧붙였다.

또 좋은 사람만을 찾지 말고 스스로가 좋은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이 나의 존재를 찾을 수 있도록 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김 세무사가 2013년 그동안의 사회활동과 세무사업무를 하면서 다양한 고객과 중년을 만난 경험을 진솔하게 풀어낸 책 ‘불혹’(위로받고 싶은 마흔, 벼랑 끝에 꿈을 세워라)에도 그가 젊은 이(세무사)들에게 전하는 내용들이 가득하다.

저작권자 © 세정일보 [세정일보] 세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