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무사 개업 ‘40년’…일흔 나이에도 정의감 펄펄 끓는 '젊은 세무사'

'회사합병의 조세제도연구'로 법학박사…“세무사 정체성 교육하고파”
“세무사의 '사' 자는 선비 사(士)다…품격 있는 세무사의 길 걸어야”

 

세무사제도가 만들어진지 55년의 세월이 흘러 지금은 1만2천명이 넘어가는 세무사들 중 세무사의 정체성 확립에 대해 끊임없는 연구를 하는 한 명의 선비(稅務士)가 있다. 항도 부산에서 ‘세금밥’ 먹는 사람들이라면 ‘아 그 정의파 세무사’라고 단번에 기억해 내는 노태주 세무사 이야기다.

부가가치세제가 시행된 1977년 8월 부산에서 세무사로 개업했다. 그의 나이 만 28살 때다. 40년간 세법강의를 비롯해 각종 특강과 1000여회의 TV 및 라디오 출연, 각종 논문을 발표하고 세무사들을 위한 회직에도 봉사했다. 그야 말로 쉴 새 없이 달려왔다.

그는 국세청 근무 경력이 없는 순수 세무사시험(고시)출신의 세무사다. 그는 왜 '세무사'란 직업을 선택했을까. 모두가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었던 1950년대. 학교도 어렵사리 장학금을 받고 졸업해 고심 끝에 선택한 직장은 한국전력공사였다. 당시 최고 직장이라고 꼽혔던 금융기관보다도 더 많은 연봉과 복지를 받을 수 있는 직장에 입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무사의 길을 선택했다.

현재는 부산진구 부전동에서 세무법인 중추(中樞)의 대표세무사로서 법인을 이끌고 있다. 그가 매주 즐겨 찾는 맛집인 부산롯데호텔(부산 서면)의 중식당 '도림'에서 추천받은 음식을 함께 하며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 시원한 전망이 함께하는 부산롯데호텔 중식당 ‘도림’

노태주 세무사가 즐겨 찾는 맛집은 그의 사무실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부산롯데호텔 43층의 중식당 '도림'이다. 호텔 최고층에 가면 답답했던 가슴이 확 트일 만큼 멋있는 전망이 펼쳐진다. 백양산과 부산시민공원을 바라보며 그가 추천하는 메뉴인 중국식 된장으로 맛을 낸 '삼선건강짜장면'을 먹어봤다.

일반적으로 짜장면에 들어가는 춘장이 아닌 된장으로 맛을 낸 삼선건강짜장이었다. 담백하면서도 고소한 맛의 삼선건강짜장은 그 어느 곳에서도 먹어볼 수 없었던 새로운 맛이었다. 새우와 전복 등 해산물도 듬뿍 들어가 있고, 된장 특유의 냄새도 전혀 나지 않으면서도 된장의 깊은 맛을 그대로 표현해 낸 음식이었다. 더욱이 도림의 주방장이 직접 개발해낸 만큼, 부산을 찾는다면 꼭 와보아야 할 맛집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내년이면 벌써 일흔의 나이가 되지만 그는 실제 나이의 절반밖에 보이지 않는 40대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동안(童顔)'이다. 알고 보니 매일 새벽 호텔에 있는 휘트니스센터에서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할 정도로 몸 관리에 철저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렇게 아침 운동이 끝나면 함께 운동하는 멤버들과 도림을 찾아 식사를 즐긴다. 그의 동안 비결은 부산의 아름다운 경치와 맛있는 음식, 그리고 철저한 자기관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단돈 5000원이 없어 포기했던 학업…그리고 '세무사' 선택까지

김해에서 태어났지만 6·25 전쟁이 시작되면서 초등학교 4학년 때 고향을 떠나 부산으로 이사를 올 수밖에 없었다. 전쟁으로 인해 아버지는 군에 징집됐고 김해비행장이 확장되면서 논밭이 사라져 모든 것을 잃게 된 것. 그렇게 부산으로 왔지만 군에서 제대한 아버지가 병환을 얻어 어렵고 힘든 날들이 이어졌다.

초등학교는 졸업했지만 당시 5만500환, 지금 돈으로는 5050원이 없어 등록금을 내지 못해 중학교도 갈 수 없었다. 그렇게 1년을 책가방 메고 학교가는 친구들의 뒷모습만 바라봤다.

하루하루 시간만 흘려보내던 어린 소년은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등록금을 낼 수 없다면 장학금을 받으면 된다고 생각해 공부에 매진했고, 그렇게 중고등학교를 100% 장학금을 받아 졸업할 수 있었다. 이후 한국전력에 입사해 7년을 근무했지만 그는 만족하지 못했다.

공기업의 낙하산 문제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는 다른 꿈을 꾸기 시작했다. 전문가의 길이었다. 어린나이에 읽힌 회사 생활로 쌓은 내공을 모아 세무사라는 전문자격사 시험에 도전한 것.

상고를 나왔고 회사 실무경험이 있는 만큼 처음에는 회계사시험에 도전하려 했다. 그러나 집안 생계도 책임지고 동생들 공부를 시키기 위해서는 2년간의 수습기간이 필요했던 회계사보다는 수습이 없던 세무사가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세무사시험 준비에 매달렸다. 제대로 된 교제가 없어 세법전으로 공부를 했지만 단 1년 만에 세무사고시에 합격했다.
 

◆ 경남대 법대에서 '회사합병의 조세제도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어릴 적 학교 가는 친구들의 뒷모습만 바라봐야 했던 날들의 기억 때문일까. 공부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만큼 나이 오십에 박사학위까지 취득했다.

노태주 세무사는 일본의 3대 경영신으로 불리는 사람 중 한명인 '마츠시타 고노스케'의 말을 인용하며 "나는 배움이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스승으로 삼았고, 몸이 허약했기 때문에 건강을 챙기게 됐고, 가난했기 때문에 부지런했다. 그래서 나는 성공했다"는 말을 생각했다고 한다.

90년대에 IMF가 터지고 많은 회사들이 인수합병을 했고, 나라의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그의 관심은 자연스레 회사합병에 대해 옮겨져 이에 대한 공부를 깊이 있게 하고자 했다. 그렇게 그는 99년도에 박사학위 논문으로 '회사합병의 조세제도에 관한 연구'를 썼다. 박사학위 과정은 부산 근교에 세법을 전공으로 하는 지도교수가 없어 경남대 대학원에서 법학 전공을 선택했다.

그는 논문을 쓸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가 WTO체제, OECD 가입 등 국제화 대열에 진입하면서 이에 발맞추어 국제적 합병제도에 대한 보완책이 강구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양하고 유동성이 심한 기업구조조정 제도의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입법과 행정의 후속 조치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

그 첫 번째로 기업의 인수합병에 있어서 시세차익을 목적으로 대상기업의 경영진에게 자신이 매입한 주식을 높은 가격으로 매입해 줄 것을 요구해 차익을 실현시키는 방법(green mail), 또는 기업을 인수한 후 이를 분산매각을 통해 차익을 실현시키는 방법(burst-up takeover)에 의해 이루어진 M&A는 개인적 이익이 창출되므로 특별과세 대상으로 법제화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또 앞으로의 합병합계기준은 불충분한 법률상의 합병본질론과 결별하고 경제적 상황에 적응하는 처리·보고의 방법을 선택 적용할 수 있도록 제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합병시 정부의 배려로 조세감면의 혜택을 받는 기업과 혜택을 받지 못하는 기업간의 조세불균형에 있어서 특정산업의 구조개선을 위해 제정된 법률이 조세제도상 불공평 조세문제로 대두되는 만큼 상업간 조세불균형 해소를 위한 세심한 법규가 마련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뿐만 아니라 합병시 합병 후의 법인이 새로이 인·허가나 처분을 받고 있어, 회사합병에 있어서도 이러한 부분에 대한 입법적 조치가 마련되어 기업의 인수합병에 원활을 기하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영국의 경우 그룹공제규정이 도입되면서 그룹회사간 합병하면 그룹간의 예납법인세와 자본이득세가 공제되고 이월결손금의 이동이 가능해 그룹간 원활한 합병을 유도하고 있다. 또한 미국은 비과세 재편성 규정을 7가지 형태로 구분해 회사합병분할 뿐만 아니라 주식매수, 자산매수, 기업분할 등에 의한 조직재편성에 의거 비과세 규정을 두고 있어 기업의 구조조정에 원활화를 기하는 만큼 기업구조조정의 인수합병에 대해 국제경쟁력 강화와 경영합리화 차원에서 세법상 좀 더 세밀한 규정이 마련돼야 할 것을 당부했다.

그는 논문을 통해 회사합병 조세제도의 입법미비로 인한 조세마찰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는 합병에 대한 사전심사제도 등의 입법화와 더불어 법률상의 과감한 개정, 보완, 폐지 등을 통해 조세법률주의에 의거한 선진국가로의 조세제도 확립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 "세무사의 '사'는 일사(事)도 아닌 스승사(師)도 아닌 선비사(士)다"

그의 특이한 이력이 있다면 바로 방송과 라디오출연 1000회라는 것이다. 세무사 중에서는 대한민국 유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세무사 자격을 취득한 1977년 말부터 학원에서 강의를 하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대학 강단과 기업체에서의 세금 강연, 그리고 신문에도 많은 칼럼과 기고를 했다. 지금은 부경대 대학원 석사과정에 이어 경남대 대학원 강단에서 박사과정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경상대, 동서대, 동의대, 부경대, 동명대, 해양대, 경성대 등 부산에 있는 대학의 경우 서보지 않은 강단이 없을 정도다.

40년을 세금 전문가로서 활동하다보니 여러 방송에서 그를 찾았다. 지금은 쉬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불러주는 곳이 있다면 아직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체력이 닿는 데까지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언제든 하겠다는 생각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다. 세무사회에서 국세청 출신 세무사가 아니면서도 지방세무사회장을 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는 부산세무사고시회장 2년, 부산지방세무사회장 2년을 화끈하게 봉사했다고 자부한다.

그는 세무사의 '사'자가 선비 사(士)임을 강조했다. 판사(判事)에는 '일 사'자를, 의사(醫師)에는 '스승 사'자를 사용하지만 세무사(稅務士)에는 '선비 사'자를 사용하는 만큼 세무사란 선비정신을 가진 품격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예로부터 ‘선비 사’자에는 큰 의미가 있는 만큼, 부산지방세무사회 회장 재직시 '품격 있는 세무사회를 만들자'를 캐치프레이즈로 정하고 그렇게 회무를 운영했다.

노태주 세무사는 무엇보다 세무사의 정체성에 대해 강조하는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세무사의 정체성과 관련한 연구를 10년 전부터 지속적으로 해오면서 이제는 철학적 경지에까지 이를 정도다. 나아가 노 세무사의 세무사에 대한 정의감은 1만2천여 세무사들 중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강직하다.

또한 그는 세금과 관련한 이슈가 생기면 신문에 칼럼을 쓰는 일도 자처해왔다. 그러면서 40년간 세금과 세무사에 대한 철학을 주변에 알리고 책을 써내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다. 그가 선비인 세무사로서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노 세무사가 그동안 수많은 납세자를 위한 연구를 해왔다면 지금은 세무사를 상대로 교육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세무사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변화와 혁신을 추구하는 것. 세무사회가 나아갈 방향과 정부당국의 나아갈 방향까지 그의 머릿속은 따끈따끈한 개혁적 생각들이 가득했다.(관련 기고: 세정일보 노태주 세무사의 특별기고)
 

◆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하고 공부하라"

노 세무사는 사실 세무사업은 만 70세까지 할 생각이었지만 '100세 시대'가 된 만큼 75세까지는 해야겠다고 생각을 바꿨다. 이후부터는 후배들이 겪는 어려움을 뒤에서 받쳐주고 그 동안 쌓아온 노하를 전수해 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는 후배들에게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하고 공부할 것을 당부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의 사무실에서 수습기간을 보낸 한 세무사와 인연이 돼 지금도 십 수년째 함께 일하고 있는데,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하라는 조언을 받아들여 열심히 해낸 친구이기에 실력자가 될 수 있었다고 칭찬했다.

그는 세무사 후배뿐만 아니라 모교 후배들을 위해 꾸준히 기부도 하고 있다. 재단법인 구덕장학회 이사장으로 활동하는 그는 내년이면 벌써 '1억 기부'를 달성을 목전에 두고 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천인 셈이다. 그는 어릴 적 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던 아픔을 기억하면서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라고 말했다.

5남매인 그는 자녀 3명과 6명의 조카들 모두에게 능력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첫 대학 등록금을 내줬다고 했다. 아이들은 지금도 만나면 고맙다는 말을 건네는데, 아이들이 모두 장성해 좋은 대학 나오고 잘 커줘서 오히려 자신이 고마운 마음이라고 말했다. 명절에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항상 모여 화목할 수 있는 것은 서로가 느끼는 고마움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선비정신을 갖고 매일 최선을 다하자는 좌우명을 가진 노태주 세무사. '세무사가 천직'이라는 말이 정말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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