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상황에서도 견디지 못할 삶은 없다."

▲ 석호영 세무사

정치 상황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이념의 파고 위에서도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도 가정의 사랑은 면면히 흐르고 삶이 부서질 정도의 질곡속에서도 경외스러운 것임을 다시금 느끼게 해주는 영화였다.

세계적인 감독 장예모의 ‘인생’이라는 중국 영화는 한 인간의 삶이 얼마나 처절하고 한편으로는 숭고한 것인가를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하염없이 묵묵히 버티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도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것이 좋은 조건이건 나쁜 조건이건 그저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물결 따라 바람처럼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해 주는 듯 하기도 했다.

주인공 후우꿰이는 지주의 아들로 부호이기는 하지만 마작과 그림자놀이 등에 빠져 결국은 집까지 날리는 파산에 이르러 대궐 같은 집에서 살다가 알거지가 되어 무일푼의 거지로 거리에 쫓겨 나안게 되는 신세가 된다. 급기야 이로 인하여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목숨을 잃게되는 비운을 맞는다. 그야말로 대부호이며 대지주가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는 장면이었다.

노름 빗의 댓가로 집을 차지한 자로부터 당장 끼니도 어려워 돈을 빌리는 상황이 되었으니 망해도 폭삭 망한 것이다. 그러나 집주인이 된 사람은 다행히 돈은 빌려주지 않았지만 소유하고 있던 그림자놀이 도구를 빌려 주어 후우꿰이로 하여금 그림자 공연을 하면서 근근히 가족을 부양하며 생활을 유지해 나간다. 그래도 그런 재주라도 있는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고기를 주는 대신 낚시 도구를 주는 장면에서 감독의 함의가 있음을 느꼈다.

이 영화를 이해하려면 중국역사 속에서의 국공합작과 내전 대약진운동 그리고 문화대혁명 등 중국 현대사를 좀 이해하지 않고서는 근본적으로 영화의 깊은 맛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정치상황과 이념의 소용돌이가 이영화의 밑그림으로 깔려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즉 한 개인이나 가정의 생활과 삶에 정치 체제나 그 당시의 정치 이념과 제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얼마나 직접‧간접으로 영향을 미치는지를 극명하게 말해주는 영화일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어떠한 삶의 스탠스를 견지하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웅변해 주려는 영화인 듯하다.

후우꿰이 집안은 공산당이 들어서기 전에는 지주로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영위 하였으나 공산당이 들어설 무렵 후우꿰이의 도벽에 의하여 집을 잃을 정도로 파산 하여 그린마일이란 영화에서 존 커피가 말한대로 ‘비에 젖은 참새’마냥 보따리 몇 개 정도의 살림을 차려 가지고 쫓겨나듯 거리에 내 팽개쳐져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에 직면하게 된다.

대지주가 한순간에 알거지가 되어 거리의 신세가 된 것이다. 집을 차지한 롱에르에게 사정하여 그가 소유하고 있던 그림자 도구로 공연하며 근근이 연명해가지만 공산당의 세력이 커지면서 그마저 못하게 되고 군에 징집 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러나 한편 도박으로 집을 차지 하게 된 롱에르는 오히려 지주로서 처단을 받게 되는데 여기서 인간의 삶은 새옹지마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어쩌면 후우꿰이의 도벽으로 그 만은 땅과 집을 날렸지만 그로인해 처형을 면해 목숨을 건졌으니 말이다. 후우꿰이도 착한 아내에게 차라리 집을 날린 것이 얼마나 다행이란 듯이 말한다. 정당화 이리라.

우리나라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쯤으로 견줄 수 있는 대약진운동이 중국 대륙을 뒤흔들었다. 농촌은 공동취사제도로 식사를 해결해야 할 정도로 솟이란 솟은 물론 모든 쇠붙이를 공출해야만 했고 인민은 철생산에 총 동원되는 시기였다.

여기서도 후우꿰이 집안은 일대 광풍을 맞게 된다. 시대에 부응하여 살기 위해 또 가정을 지키기 위하여 어린 아들까지 철생산 현장에 동원되어 노동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어느 날 아들을 현장의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공교롭게도 사고를 일으킨 자는 후우꿰이가 놀음판에서 자산을 탕진할 때 서무일을 맡아하던 사람이었으나 그후 그와는 단짝 친구가 되었고 군에서 서로 다른 길을 택했던 춘생이란 친구였다.

어쩌면 이 사고도 이념의 희생물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아들을 대약진운동의 현장에 투입하고 도박장 사서에 불과했던 자가 출세하여 그 현장의 감독 격으로 돌아온 춘생에 의해 희생됨으로써 서로 다른 길을 택한 친구에 의해서 아들이 희생되었으니 또하나의 시대와 이념의 아픔을 격게되는 현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약진운동의 시대가 지나고 중국 대륙에는 문화 대혁명이라는 일대 광풍이 또 한 차례 몰아 닥쳤다. 이 또한 자본주의적 요소를 배격하고 공산주의를 굳건히 하겠다는 운동으로 소위 공산당 앞잡이인 홍위병이 날뛰는 시대였다. 자본주의적 문서를 불태우고 의사나 교수들을 처단하는 그들로 치면 대개혁 혁명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후우꿰이 집안에도 또 이 광풍의 영향에서 자유스럽지 않았다. 열병으로 벙어리가가 된 딸이 당시로서는 주류인 홍위병에게 시집을 가 후우꿰이 가정은 시대 조류의 순풍에 돛을 단 듯 하였으나 광풍 또한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딸이 임신하여 출산에 이르자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산고 끝에 손자를 보게 되었다. 아뿔사 이게 웬 말인가? 베테랑 의사들은 감옥에 모두 잡혀 간 상황에서 아마추어 어린 간호사를 산파로 출산이 치러지다 보니 뒤처리가 미숙했던지 손주는 무사했으나 산모는 하혈과 함께 생을 달리하게 되었다. 후우꿰이 집안에 딸까지 죽는 액운이 연속되는 순간이었다. 이것을 운명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국공 내전 시에는 전쟁터로 끌려가서 갖은 고초를 격어야 했고 도박으로 날려버린 가정파탄의 충격으로 인한 아버지의 죽음 그로부터 이어진 거지같은 삶의 연속, 대약진 운동 시에는 철생산 현장에 동원되었다가 친구에 의한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게 되고 문화 대혁명시에는 딸까지 잃게 되는 비운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후우꿰이는 아름다운 마음씨를 지닌 아내 지아젠과 함께 그러한 온갖 고통과 쓰라림의 삶을 묵묵히 감내해 나갔다. 어쩌면 시대의 흐름에 온몸을 내던져 물이 흐르듯 그 물살에 몸을 맡겨 흘러가듯 모든 삶의 무게를 담담히 감내하였다.

슬플 때는 슬퍼하고 그 파고를 넘어서면서 또 하나의 이어지는 삶을 묵묵히 이어가는 후우꿰이 가정의 삶속에서 이념과 정치상황을 초월하여 가족 구성원에 대한 처절한 사랑과 삶의 경건함과 숭고함까지도 느끼게 하는 영화였다.

마치 홍수의 거센 물살에 떠내려가는 황소처럼 몸을 물살에 자연스럽게 맡겨 살아남는 이치와도 같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그러나 거센 물살에 거슬러 올라가려는 습성이 있는 말은 그 물살에 익사하여 죽는단다.

어려운 환경에서 어떠한 삶의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가를 후우꿰이와 황소는 잘 말해주는 듯하다. 나 역시 다소 말과 같은 쪽의 삶을 추구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그러나 어떠한 삶이 더 정체성 있고 의미 있는 삶인지는 쉽게 결론 내릴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정치와 이념의 물살인 국공내전,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이란 큰 파고에 소용돌이에 얹혀 그 물살과 파고를 거스르지 않고 몸과 마음과 모든 삶을 실어놓고 하염없이 흘러가는 한가정의 파란만장하나 의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 모습에서 삶이 얼마나 가슴 시리게 아름답고 경외스러운 것인가를 느낄수 있었다.

딸이 떠났음에도 꿋꿋이 장인 장모를 모시고 정성스럽게 삶을 이어 가는 절름발이 불구의 홍위병 사위를 통해 정치와 이념을 초월한 휴머니즘의 한 단면을 보게 되어 대견스러웠다. 삶은 그저 묵묵히 하염없이 버티고 견디며 살아가는 것임을 이 ‘인생’이라는 영화는 말해 주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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