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사랑으로부터 태어났고 너희들은 공포로부터 시작되었다." 사랑! Love! 어디까지 또 무엇을 사랑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에로스적 사랑, 즉 육체적 열정적 사랑과 아가폐적 사랑, 즉 이타적 사랑도 있고 유희적 사랑 등은 물론 힌두교에서의 카마, 유교에서의 인, 불교에서의 자비와 그리스도교에서의 사랑 등 다양한 사랑이 있다.

▲ 석호영 세무사

아마도 사랑이란 것은 자기보존과 종족보존이라는 인류 보편적이고도 근원적 감정 내지는 가치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최악의 미움과 용서받지 못할 극악한 원수까지도 포용하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랑 때문에 죽고 살고 쓰러지고 자빠지고 난리 아닌가?. '불완전한 것에 대한 성숙한 포용' 이라고 해야 할까. 이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끝없이 긴 시간 동안 성찰이 필요 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래도 사랑이란 것에 대한 궁극적 정답을 찾기란 용이하지 않을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오늘 겨울인데도 밖에는 비가 출출히 내리고 마침 영화를 좋아하는 지인으로부터 좋은 영화를 한편 소개 받아 감상하게 되었다. 연말의 수많은 크리스마스 카드 내지 연하장보다 가장 뜻 깊은 일이었다.

영화는 캐나다 출신의 드니 빌뇌브 감독이 연출한 '그을린 사랑(Incendies)'이란 제목의 영화였다. 지금까지 많은 영화를 봐왔고 리뷰 내지는 감상후기를 써왔지만 이 영화처럼 가슴을 후비고 길고 깊은 여운이 남는 영화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한동안 머리가 멍한 느낌이었다.

이 영화를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영화의 배경이 된 중동 국가인 레바논 이란 나라에 대해서 기본적인 상식정도의 지식은 필요할 듯 하다. 그래서 레바논에 대해서 막연히 알고 있던차에 레바논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중동은 늘 세계의 화약고로 명명되어 왔고 사실상 현재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레바논은 그중에서도 중동의 화약고로 일컬어질 만큼 국내적으로는 물론 주변국과 또는 미국과도 첨예한 이해관계가 얽힌 나라이며 종교적으로도 17개 종파가 있을 정도로 "종교의 박물관 국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정치적 종교적 갈등의 불씨를 늘 안고 있는 나라이다.

중동 국가중 프랑스 자치령이었던 레바논은 1944년 해방 당시 기독교계가 51% 강세로 대통령은 기독교계에서 총리는 이슬람교계의 수니파가 국회의장은 시아파가 집권하는 3두체제 즉 트로이카 체제이며 언제든 종파의 인구 비례에 따라 정정이 불안한 요인을 안고 있으며 지중해 연안 국가로 북동쪽의 시리아와 남쪽의 이스라엘에 의해 직접 혹은 대리전이 횡행하는 나라이다.

이렇게 정치체제와 이데올로기, 거기에 종교적인 문제로 인한 급격한 내전을 1975년부터 1900년까지 겪어왔으며 1944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기독교의 마론파 이슬람계의 수니파 시아파 헤즈볼라와의 정치 종교적 갈등에 의한 내전 그리고 이스라엘과의 전쟁 시리아와의 전쟁 등 끊이지 않는 내전과 전쟁의 연속이었던 나라이다. 그러니 일반 국민들의 생활이 얼마나 피폐했겠느냐는 불을 보듯 뻔하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정치체제나 이데올로기 혹은 종교는 어느 나라든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개인은 한낮 체제나 이데올로기의 도구 내지는 꼭두각시로 전락해 본인의 정체성에 맞지 않는 삶을 살아갈수 밖에 없는 경우가 인간의 삶일수도 있다. "그을린 사랑"의 주인공 나왈 역시 그런 삶의 환경에서 한 인간으로서 한 여성으로서 어느 어머니로서 파란만장하고 격한 삶에 내 몰리고 맞닿아 부딪히며 저항하고 적응하며 살아가게 된다.

기독교 신자인 나왈은 무슬림인 애인을 두고 있으나 율법인지는 모르겠으나 집안을 욕보인다는 명분하에 오빠들에 의해 애인은 나왈이 보는 앞에서 처참하게 권총 사격으로 살해 당한다.그러나 이미 그녀는 그의 아들을 잉태한 후였고 아이는 태어나 고아원으로 보내졌고 나왈은 도시로 보내져 공부를 하게 되면서 헤어져 각기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영화는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며 회상신으로 처리되는 후레쉬 백 형태의 영화인데 정신없을 정도로 과거와 현재를 들락거린다.

나왈이 죽고 나왈의 유산 집행관에게 나왈의 쌍둥이 잔드와 시몽에게 편지를 남긴다. 쌍둥이의 생부와 형을 찾은 후 자기의 장례식을 치룰 것을 유언한다. 딸 잔느와 아들 시몽은 이미 돌아가신 것으로 아는 아버지와 없는 형을 찾아 나서라니 황당하기만 할 뿐이다. 집행관은 이런 쌍둥이에게 어머니는 그렇게 엉뚱한 말을 남길 사람이 아님을 설득한다.

나왈은 사생아 아들 니하드를 찾아 고아원을 전전하고 때에 따라서는 기독교 신자로 때에 따라서는 무슬림으로 활동 하면서 기독교 민병대에 의해 버스에 탑승한 무슬림들이 무참히 총격으로 학살되는 광경을 보고 기독교 신자임에도 민병대를 저주한다. 끝내는 국민당의 혁명전사가 되어 기독교 지도자를 권총으로 저격하여 사살하기에 이른다.

이로인해 감옥에 끌려가 온갖 고문과 학대는 물론 고문 기술자에 의해 강간을 당하는 지경에 처하게 되며 한 평정도의 감옥에서 결국 강간에 의한 잔느와 시몬을 낳고 석방되어 일상에 놓이게 되며 쌍둥이와 함께 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쌍둥이와 수영장에서 한가히 놀던 중 뒷꿈치에 점이 세개밖힌 사람이 수영장 밖에 있는 것을 수영장안에서 보게된다. 고아원에 맡긴 사생아 아들을 목격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고아원에 맡기면서 문신으로 표식을 해놨던 것이다. 서로 얼굴이 마주쳤을 때는 경악 그 자체였다. 나왈이 수감되어 있을때 온갖 고문과 학대는 물론 자신을 강간했던 바로 그 인물 아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왈은 전혀 내색치 않았고 그 아들 역시 나왈을 몰라보고 지나쳤다. 나왈만 알고 있는 진실의 순간이었다. 그 순간 자신을 강간한 아들을 목도한 어머니로서 심정이 어떠하였을까?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거나 감내하기 어려운 순간이었으리라. 오이디프스가 어머니를 강간하여 어머니는 자살하였고 오이디프스는 자신의 눈을 찔러 세상을 보지 않았듯 그런 심정이었으리라. 그러나 나왈은 너무나 침착하고 의연했다.

그를 확인하고 죽어가면서도 쌍둥이 잔느와 시몽에게 생부와 형을 찾은 후 장례를 치르라고 했던 모양이다. 우여곡절 끝에 잔느는 생부를 찾았고 시몽은 형을 찾았지만 두 쌍둥이는 생부와 형이 어머니의 또 다른 아들이었으니 잔인한 운명 앞에서 오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뿌리를 찾아 나서는 쌍둥이 잔느와 시몽의 발길을 따라 나도 영화속에서 그들의 행로를 함께 동행하는 느낌이였다.

쌍둥이 잔느와 시몽의 생부와 형, 니하드 역시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와 생이별 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의 목마름 속에서 처절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한 분노와 증오의 에너지가 때에 따라서는 살인병기로 때에 따라서는 고문기술자로 급기야 감방의 죄수를 강간하는 인면수심의 인간으로 자랐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마지막 반전은 때에 따라서는 살인병기로 때에 따라서는 고문 기술자로 급기야는 사생아이며 자신을 강간한 아들과 그 아들 사이에서 감방에서 태어난 두 쌍둥이 잔느와 시몽에게 어머니 나왈이 남긴 유언의 편지 내용이다. 과연 선과 악의 구분이 있는 것이며 증오와 사랑의 경계는 어떻게 구분지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일지도 모르는 유언의 편지였다.

자신을 강간한 아들에게는 "나는 네가 고문한 72번 죄수였다. 잔느와 시몽이 네 아들이고 아름답게 잘 자랐으니 함께하라. 나는 너를 평생 찾아 다녔다. 너는 사랑으로 태어났고 그러니 사랑으로 모든 걸 감싸마"라는 유언과 그리고 두 쌍둥이 잔느와 시몽에게는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멋지고 행복하고 가치있는 것이다. 너의 태어남의 시작은 공포였지만 너의 아버지 탄생은 사랑이었다. 그러므로 너희도 사랑으로 태어난 것이다. 이제 분노와 증오의 흐름을 끊어야 한다. 서로 사랑하며 멋지게 함께 살아야 한다"라는 유언의 편지를 남긴다.

않 밝혀도 될 듯한 사실을 굳이 밝힌 이유는 뭘까?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일까? 뿌리는 알고 있어야 된다는 이유에서 일까? 쌍둥이 너희들도 어머니인 자신의 삶과 본인의 아들이며 쌍둥이 잔느와 시몽의 아버지이자 형인 니하드의 삶을 공유했을 때 진정한 자식임을 일깨워 주기라도 한 의도였을까?

하였든 그 점은 내가 결론 내릴 사항은 아닌 건 같다. 그리고 이 심오한 영화에 대해 감상후기를 쓴다는 것도 드니 빌뇌부 감독에게 실례가 될지도 모른다. 그냥 조용히 가슴에 느낌을 간직하는 것이 이 영화에 대한 예의 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난해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왈이라는 여성, 어머니는 인간으로서 남길 수 있는 최대의 거룩한 사랑과 포용, 조화 그리고 함께하는 삶의 가치를 일컬어주는 반전같았다. 나왈은 어느 영웅보다도 더 큰 영웅으로 다가왔다. 그을린 사랑이기는 하나 어느 맑고 지고지순한 사랑인들 이보다 큰 사랑이 있겠는가? 그래서 "약한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로다"라고 햄릿은 외쳤지만 어머니는 강한자 보다 강한가 보다. 정말 큰 감동과 전율 그리고 여운이 남는 영화였다.

그리고 정치제제란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이데올로기는 무엇이며 신의 존재를 믿는 종교란 의미는 무엇일까? 과연 신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일까? 신이 존재한다면 저런 상황을 왜 방치할까? 이렇게 갈라 놓고 찢어 놓는다면 종교라는 것은 필요악은 아닐까?

나왈이라는 한 여성, 어머니의 정체성있는 삶과 포용과 사랑 앞에서는 정치 체제도 이데올로기도 종교도 신도 무력할 수 밖에 없음을 '그을린 사랑'을 통해 말해주는 듯 했다.

서스펜스와 스릴로 박진감 넘치는 영화도 아니고 긴장되게 진행되는 신이나 코믹하게 진행되는 장면도 전혀 없지만 이상 야릇한 음악과 알듯 모를 듯한 장면이 교차하는 가운데 시종일관 지루함 없이 시선을 고정하고 볼 수 있는 충격, 감동과 전율이 넘치는 영화였다. 지금까지 내가 받은 크리스마스 혹은 연말 카드로서는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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