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지방국세청장, 전 세무사회장, 1만사랑회 이사장의 새해 화두는 “감동”

Give 다음 콤마를…Give, and Take. “먼저 주어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석성장학회‧석성1만사랑회 또 이어 ‘석성선행장학(GS)’으로 한 단계 승화
 

그는 납세자들의 권익보호를 위한 전문직업인인 한국세무사회장을 지냈다. 세무사라는 직업은 전문자격사로서 돈을 버는 목적도 있지만 어찌 보면 어려운 납세자들을 돕는 봉사의 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까. 그는 38년간의 국세공무원 생활을 뒤로하고 세무사로 개업한 이후에는 말 그대로 하루를 봉사로 시작해 봉사로 끝낼 정도로 봉사활동에 온 몸을 불살라 왔다. 그의 봉사는 이미 아무나 하는 봉사의 길이 아닌 큰 봉사의 길로 들어섰다. 말이 쉽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갈채를 보낸다.

그는 어린시절 가난에 찌들어 쥐를 잡아먹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가난을 알기에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9급 공무원으로 공직을 시작하여 2급(대전지방국세청장)까지 오르는 입지전적인 인물로 통한다. 퇴직 후 1만2천여 세무사들의 단체인 세무사회장을 연임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설립한 세무법인 석성의 수익 1%를 무조건 불우이웃에 기부한다. 아들과 딸의 결혼식 축의금 전액을 불우이웃에게 기부하기도 했다. 그는 강연으로도 봉사한다. 전국을 누빈다. 그가 설파하는 단어는 ‘근자열 원자래(近者悅 遠者來, 가까운 사람을 기쁘게 하면 멀리 있는 사람까지 찾아온다)다.

기자는 조용근 회장을 이사장이라고 호칭한다. 지방국세청장, 세무사회장을 지냈지만 석성장학회 회장과 증증장애인돕기 1만사랑회 이사장을 맡아 더 멋진 인생을 사는 것에 더 끌리기 때문이다. 그의 이런 봉사, 기부, 나눔 DNA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는 무학자인 선친이 남긴 유산 5000만원을 기반으로 1994년에 석성장학회를 발족했다. 석성은 조 이사장의 아버님과 어머님의 이름 가운데 자에서 딴 것이다.

재단 설립후 20년이 넘는 기간동안 국세공무원의 자녀와 다문화·탈북자 가정의 자녀 등 2000여명의 선행(善行) 중·고·대학생들에게 18억 원 상당의 장학금을 지급해왔다. 또 미얀마에 ‘사랑의 학교’를 지어주는 등 해외교육사업도 활발히 추진해 오고 있으며, 현재 30억 원 상당의 현금과 2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 지난 9월에는 20여년간 국민교육 발전에 기여하고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장학재단을 운영한 공로를 인정받아 교육부장관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예수님, 부처님이 이렇게 자신의 것을 한없이 내놓고 나누고 섬기는 삶을 살았을까. 기자는 종교생활을 하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어렴풋이 조 회장이 솔직히 더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때도 있다.

무술년 새해 아침을 맞아 세정일보는 국민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국세공무원 생활을 38년 가까이 한 후 민간인이 된 후에는 ‘나눔과 섬김의 전도사’로 인생 자체를 확 바꿔버린 조용근 석성1만사랑회 이사장을 만났다. 새해에는 또 어떤 아름다운 봉사를, 그리고 많은 세무인들에게 조 회장의 나눔과 섬김의 DNA를 전파할 수 있을까라는 배움을 얻기 위해서였다.
 

대담: 서주영 대표, 정리: 유일지 기자

▲ 새해 아침이 밝았다. 가장 먼저 독자들에게 좋은 말씀 한 마디 해주십시요.

=개띠 해를 맞이했다. 새해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있다면 ‘감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새해에는 곳곳에서 감동이 만들어져야 한다. 대한민국은 지금 암울한 상황이다. 사회에 불안이 깔려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 5000만 민족이 감동을 만들어야 한다. 감동이란 배려도, 나눔도, 섬김도 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감동이 사라진지 오래된 것 같다. 자기밖에 모르는 삶을 살다보니 그런 것 같다. 문재인 정권이 태어난 것도 감동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오히려 바꿔보자는 욕구에서 이지 않나 생각한다.

무엇보다 감동은 가진 자들이 먼저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나눔이다. 비록 가진 것은 별로 없지만 ‘나부터라도 나누면서 살아야겠다’는 가치관을 갖게 됐다. 나는 흙수저 중의 흙수저로 태어났지만 지금은 가진 것이 많다. 재물이 아닌 세상을 바라보는 식견이 커졌다. 나이가 일흔이 넘어가다보니 어렴풋이 정립되더라. 솔직히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다는 것을 알게 되니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많이 생각하게 됐다.

특히 사랑하는 후배들에게서 감동이 사라진 것 같아 안타깝다. 대부분의 국세공무원들은 현직에 있을 때엔 세금을 거둔다고 열심히 노력하고, (퇴직)나와서는 세금을 가지고 어떻게 수익을 올리고 잘 살 것인지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세상이 우리를 보는 인식의 전환을 일으켜야 한다. ‘세무공무원은 다르더라’라는 롤모델이 필요하다.

세무공무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성경에서도 죄인의 대명사로 나온다. 이걸 불식시키고 싶고, 이를 위해 세무공무원으로서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나눔, 즉 기부라고 생각했다.

또한 세무공무원은 세금이 곳곳에서 공정하게 잘 쓰이는지, 가난한 사람에게 혜택이 가도록 골고루 쓰이는지 알 수 있는 세금의 파수꾼이 돼야 한다.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데 이를 완화시켜주는 완충역할을 하는 것이 세무공무원이라 생각한다.

▲ 새해 첫 해돋이 감상은 했는지요?

=1월 1일은 아내와 함께 교회를 간다. ‘높은 뜻 푸른교회’를 다니고 있다. 다른 교회는 예배당을 지어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지금 다니는 교회는 서울고등학교 강당을 빌려 예배를 드린다.

국립고등학교에서 어떻게 교회 예배를 드릴 수 있냐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매주 일요일 하루를 빌려 쓰면서 학교발전기금을 기부하고 있다. 이렇게 들어간 기부금은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교실을 사용한 뒤에는 교회 측에서 청소도 깨끗이 해준다. 창틀에 쌓인 먼지도 깨끗이 청소하다보니 ‘우리 교실도 써주세요’라는 요청도 들어온다. 청소는 외국인근로자들을 고용하기 때문에 그들의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하는 효과도 생긴다. 뿐만 아니라 학부모들이 좋아하더라.

높은 뜻 푸른교회의 모토가 ‘건물 없는 교회’다. 교회 건물을 짓는 데만 수십억, 수백억씩 들어가는데 그 돈으로 사회구제사업을 펼친다. 집에서 가까워서 다니기 시작했는데 다니다보니 이 모든 것들이 일종의 ‘감동’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새해 첫날은 지난해와 새해를 동시에 보내고 맞는 예배를 12월 31일 자정에 드린다. 그것이 새해 맞이이다.

▲ 국세공무원으로 38년간 명예롭게 공직생활을 했다. 남다른 소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국세공무원 생활 38년 7개월이지만 군 생활을 빼면 35년 7개월간 국세청에서 근무했다. 9급에서 지방청장까지 올라간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고,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라고도 본다. 얼마 전 지진이 일어난 포항세무서도 다녀오고 제천세무서도 다녀와 후배들과 소통의 시간을 가졌다.

제천세무서는 대전지방국세청장 재직 당시 명퇴를 결심하고 가장 마지막으로 순시를 간 곳이다. 박달재 고개를 찾아 만세를 부른 뒤 전화로 ‘명퇴를 신청’한 곳이었기 때문에 더욱 의미 있는 곳이었다.

▲ 대전국세청장을 6개월 만에 퇴직한 이유는?

=국세청 공보관도 하고 서울청 납세지원국장을 2년 동안 하던 와중에 부산청으로 가고 싶었다. 경상도 출신이다 보니 공직을 부산에서 마무리하고 싶었고 당시 청와대에서도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토요일까지 부산청장으로 유력했었는데 월요일에 갑자기 바뀐 것으로 안다.

당시 이용섭 국세청장이 미안한 마음을 가졌는지 대전청장자리에 임명해 주어 대전청장을 6개월 동안 했다.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대전청장으로 부임한 후 정말 열심히 일했었고 업무에만 매진했었다. 그러던 와중에 청주세무서의 젊은 직원 두 명이 본청 감찰에 두 번이나 걸려서 파면된다는 소식이 들렸다.

젊은 후배들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방법이 바로 내가 대신 희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본청 감사관에게 제안하면서 ‘저 녀석들 신분 유지시켜주자. 대신 내가 총대를 멜게. 이용섭 청장께 말씀드려라. 내 목숨과 바꾸자’라고 했다. 그렇게하여 박달재에서 명퇴전화를 하게 된 것이다.

▲ 38년을 공무원으로 지냈다. 뿌리와도 같은 국세공무원 후배들과 세무사 후배들에게도 새해를 맞아 덕담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금년에는 세무공무원의 가치관을 한 단계 더 넓게 보자. 직업은 택스맨이지만 이를 이용해 한 단계 높은 기부라는 섬김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세무공무원이 됐다는 것에 한없이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것도 9급으로 출발한 것에 감사한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은 지방청장했으니까’ 혹은 ‘스펙이 좋으니까’ 이런 말들을 하지만 전혀 아니다. 나는 대학도 못나오고 행정고시 출신도 아닌 흙수저 중의 흙수저였다. 그렇지만 감히 후배들에게 제안하고 싶은 것은 ‘이제는 사고의 틀을 바꾸자’는 것이다. 내 중심에서 이웃 중심으로 가야 한다.

지금에 와서보니 9급부터 쭉 올라오는 과정들이 있었기에 세상이 돌아가는 실상을 알 수 있었고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의 응어리와 이들이 가진 고뇌를 알 수 있었다. 결국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공평한 세상으로 가야한다. 이것을 세무공무원이 해야 한다. 세금만 생각하지 말고 세금을 통해 더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는 안목을 넓혔으면 한다.
 

▲ 나눔과 섬김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이 시대에 나눔과 섬김이 필요한 이유는 있다. 먹고 살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15%라면 나머지 85%는 자신을 영세민이라고 생각한다. 중산층이 사라졌다. 이들의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서는 15%의 사람들이 각성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나눔이다.

우리들은 세금과 관련된 업무를 하며 가진 사람이 스스로 내놓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물리적으로 혹은 강압적으로 빼앗는 것이 아니라 유도장치로서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기부를 많이하고 섬기는 사람을 우대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많은 재벌들이 나누고 싶어도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저 사람은 검은 돈을 많이 먹었나보더라’하는 사회적으로 잘못된 인식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장학재단을 만들었더니 ‘돈 많이 벌었는 모양이다’라는 비아냥이 들려왔다. 나누는 자들이 대우받는 인프라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 키워드가 바로 ‘감동’이다. ‘당신 잘했어’라는 감동이다.

기부를 많이 한 자들이 진정으로 대우받아야 하고 강단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건네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강단에 서는 사람들을 보면 장관, 국회의원 혹은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다. 인천공항 귀빈실에는 국회의원과 장관들이 지나간다. 이들은 일부러 스킨십을 위해서라도 서민들이 걷는 길을 가야 하는데도 말이다. 겪어봐야 불편한 것들을 깨닫고 제도를 고칠 수 있는 법이다. 궁극적으로 ‘진정한 정치는 봉사’라고 생각한다. 국회의원도 무보수로 하고 고생한 만큼 연금을 줘야 한다고 본다.

▲ 혹 지금 말씀하신 부분을 현실화할 수 있는 방안이 있으신지?

=국민운동으로 승화해야 한다. 무조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나부터’ 해보자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역할이라고 본다. 나 역시도 해보니까 ‘나눔과 섬김’이 되더라. 많은 사람들이 안 된다고 할 때 하면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장학재단도 만들었다.

본인이 못하면서 남이 하면 시큰둥하고 손가락질하는 일들이 너무 공공연하다. 새해부터는 그런 마음을 없애보았으면 한다.

▲ 장학재단은 어떻게 세웠나.

=장학재단의 이름이 석성이다. 부모님 성함 가운데 자를 가져와 만들었다. 이분들이 초등학교 문 앞에도 못가본 무학자들이었고, 못 배웠다는 사실 때문에 사회에서 항상 자신감이 부족했다. 그렇다보니 집으로 와서는 어머니에게 화를 많이 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저는 배움이 더욱 절실하다는 것을 느꼈다.

군 생활 중이던 1972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후로부터 12년 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홀로 지내실 적 여생을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은행 대출을 300만원 받게 됐다. 그때는 집 한 채를 4~500만원이면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새 장가를 권유드렸지만 조강지처가 있다는 생각때문이셨을까 잘 안 됐었다. 그리고 84년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보니 집값이 10배로 뛰었다.

집을 팔고나니 5000만원이 돼 있었다. 내가 대출받아 사드린 것이지만 아버지께 받은 것이라 생각하고 재테크를 시작했다. 주식에 넣어두고 10년이 지나 94년도 공직자 재산등록제도가 실시되면서 보니 2억2800만원이었다.

재산등록을 할 때 너무 큰돈이었기 때문에 집사람과 상의를 했었다. 당연히 아이들이 학교다니고 학원도 다닌다고 돈이 필요할 때였기 때문에 점포라도 하나 사서 월세를 받아 학비에 보태자는 대답이 들려올 줄 알았는데, 아내는 두 번 생각도 않고 ‘우리 돈도 아닌데’라고 말하더라. 그래서 밤새 고민한 결과 나온 정답이 바로 장학회였다. 그렇게 석성장학회의 시작이다.

▲ 지금 장학회 기금이 적지 않은데 어떻게 늘리게 되었는지.

처음에도 지금도 장학회 이사장은 집사람이다. 장학회 설립당시 현직이었기 때문에 집사람이 이사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94년도 쯤 금리가 20%까지 갔던 시절에는 은행 이자를 받아 장학금을 주기 시작했다. 이후 국세청에서 퇴직하고 2005년 세무법인 만들면서 매출액의 1%를 무조건 기부하겠다고도 약속했다. 당시 함께 했던 친구들이 지사를 낸다고 할 때에도 매출액의 1%를 기부할 수 있겠냐는 약속에 모두가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그렇게 지사가 현재 10개로 늘어났고 아직도 매출액의 1%를 기부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기부를 해온다. 부산의 한 기업이 5억 원을 기부해 준 것을 비롯해 동작세무서장을 지낸 한 선배로부터 경기도의 한 임야 아홉 필지를 받았다. 이 임야가 현재 장학회의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우리가 기부 받을 당시에는 소위 ‘맹지’여서 매매가 되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공시지가가 엄청 오른 것은 물론 1년 후 2/3가 팔렸다. 그 돈이 8억이다.

정말 기적이었다. 기적은 계속해서 일어라고 있다. 장학재단을 통해 미얀마에 학교 5개를 지어준 일이다. 오는 21일부터 28일까지 미얀마에 6번째 학교를 지어주러 간다. 남들은 해보지도 않고 처음부터 안 된다고 했던 일들이다. 아마도 또 하나의 감동으로 승화될 것으로 본다.

▲ 장학회에 이어 또 다른 감동스토리를 이어가고 있는 ‘석성1만사랑회’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2011년 6월 설립했다. 2년가량 국군방송의 청년들을 위한 청년백서에 참여하면서 청년들의 고민을 많이 들었다. 그때 어떤 청년들이 중증장애인을 돕고 싶은데 마땅한 곳이 없다고 해서 장학재단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주위 사람들과 모여 5000만원의 사재를 털어 사단법인을 만들었다.

1만사랑회는 1만 명이, 한 달에 1만원씩 아껴 모으자는 것이다. 한 달에 1억, 1년이면 12억이 모인다. 그러면 웬만한 생활관이나 중증장애인을 위한 복지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처음에는 중증장애인들의 전동휠체어와 배터리 지급, 또 음성센서기를 달아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한 지원을 시작했다.

2014년 서울시의 도움을 받아 청계광장을 12월 23일부터 25일 성탄절까지 3일간 빌려 서울시내 중증장애인들을 초대했다. 그 추운 날 모두가 모여 서로가 장애인 체험도 하고 모금활동을 펼쳤는데 총 1억 원이 모였다. 그 모금을 어디에 쓸까 고민하다가 94년도에 인연을 맺은 김성자씨가 생각났다. 김성자씨는 키 172cm에 아름다운 모델 지망생이었지만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와 몇 번이고 삶을 포기하려고 했었던 사람이다. 김 씨가 예전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는 땅 200평이 생각났다.

한국해비타트 대표에게 전화했다. 해비타트는 지금껏 집 없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지어줬고 장애인을 위한 집을 지어준 적이 없었다고 했다. 김성자씨와 함께 그 곳에 장애인 쉼터를 만들어주자고 해서 석성 중증장애인 사랑의 쉼터 1호점이 탄생했다.

그리고 얼마 후 용인에 있는 샘물호스피스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자폐증을 가진 아이들을 위한 생활관을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 호스피스에 말기암의 사람들이 많은데 일반인들은 이들을 돕기를 꺼려한다. 그렇지만 자폐증을 가진 친구들은 어떤 일을 하면 그것에 몰두하기 때문에 공동생활관이 있으면 자폐증 아이들이 말기암 환자들의 케어를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자폐증 아이들을 위한 직업이 생기고, 월급도 받을 수 있게 되면서 그들의 부모님들도 기뻐했다. 그렇게 2호점이 생겼다.

그렇게 2호점, 3호점이 생기면서 석성1만사랑회는 이제 사랑의 쉼터와 공동작업장을 지어주는 것을 목표로 운영되고 있다. 그렇지만 장애인 공동체 시설이 들어서면 혐오시설이라고, 집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주민들의 반대가 심하다. 그렇기 때문에 장소를 구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쉬임없이 해 나갈 계획이다.

▲ 젊은 시절의 꿈은 어떤 것이었는지?

=어릴 땐 가난했기에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훌륭한 기업가가 되어보고자 경북사대부고 다닐 적엔 서울대 상과대학을 지망하고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상업부기 선생님이 경북사대부고로 전근을 오셨고, 중학교 졸업식 날 답사를 읽었던 나에게 상업부기를 선택과목으로 하라고 조언해주셨다.

그렇게 서울로 유학을 가려던 차에 서울신문에 게재된 관보를 봤다. 66년 1월 사세직 5급을류 공무원채용시험이 있었고, 시험과목은 국어, 영어, 수학, 상업부기, 일반상식이었다. 그렇게 시험을 쳤고 합격자발표 때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그렇게 1966년 6월 20일, 집 근처로 지원했고 그대로 대구 서부세무서로 발령받아 말단공무원생활을 시작했다.

▲ 앞으로의 꿈은?

=70살이 넘으면 모든 꿈을 내려놔야 한다. 다만 내가 꿈꾸는 세상은 감동이 스며들고 감동이 만들어지는 사회를 만들어보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쓰시려고 보냈기 때문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나에게 국회의원하려고 한다는 말을 하지만 나이가 70살이다. 정치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여의도 근처에서 행사한다고 하면 발길조차 안 준다. 나눔 전도사, 그것이 나의 꿈이다.

덧붙이자면 과거에 내가 무엇을 했는가 보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분들이 내일을 위해 미래를 위해 자신의 것을 나누고 섬기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온 세상이 감동으로 넘쳐났으면 좋겠다.

▲ 존경하는 인물이 있다면?

=성서에 세무공무원 몇 사람이 등장한다. 마태복음을 쓴 마태라는 사람이 세무공무원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세무공무원들은 유대인 사회에서 죄인이었다. 동족으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로마제국에 바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무공무원이라는 것을 밝히기를 꺼렸다. 그러나 마태는 자기 자신을 ‘세금쟁이’라고 당당히 밝혔다.

만약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나라 민족의 세금을 거두어 일본 황제에게 보냈다면 세무공무원의 신분을 감추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세금쟁이 출신이었던 마태는 당당하게 밝혔다. 나도 그런 당당함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누군가는 당신 같은 세무공무원을 처음봤다고 말을 한다. 그렇지만 국세공무원 후배들 중에 나보다 더 위대하게 될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장학재단을 하니, 당신 재산이 수백억 되느냐, 돈을 엄청 모았겠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현직생활 35년 중 본청 생활만 2/3를 했고, 돈이 될 자리 한 곳 거치지 않았다. 현재 살고 있는 집 한 채 외에는 갖고 있는 부동산 하나 없다. 유일하게 가진 것이라곤 석성 하나뿐이다. 현직시절 처음 재산공개 때에도 지방청장들중 가장 재산이 적었다. 쓰고 남는 것이 있다면 모두 기부하고 있다. 아이들도 행복해하기 때문에 마음도 홀가분하다.

▲ 삶의 좌우명은?

=우리는 흔히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라고 한다. 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오는 것이 있다는 것이 세상물정이다. 그러나 기브 다음 콤마를 붙이면 문장이 달라진다. Give, and Take. “먼저 주어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라는 말이다. 우리는 이 진리를 모르고 살아간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콤마의 역할이다. 이것이 바로 감동이다.

▲ 인터뷰 말미에 조 이사장의 오른쪽 상의에 작은 뱃지에 대해 여쭈어봤다. ‘GS’라는 글귀의 뱃지였다. 어떤 의미인지요.

=20여년의 시간 동안 18억 원이라는 장학금을 전달해 왔다. 내가 가난했기 때문에 가난한 학생들을 도왔다. 과거에는 장학금을 받으면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돼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고 했지만 지금 학생들은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왜 우리집만 가난해?’라고 말하고 오히려 장학금이 가정불화를 일으키기도 하는 것을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해부터 가난한 학생이 아닌, 착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주기로 했다. 석성선행장학금이다. 그것을 영어로 Good Student로 붙였다. 그 약자가 GS다. 착한 학생이기 때문에 석성장학금을 받았다는 것을 알려주고 배지를 달고 다니도록 하게 했고, 그렇게 장학금 대상을 초등학생에게 까지 넓혔다. GS 배지를 확산시키는 것이 또 하나의 꿈이다. 전국에 장학재단이 2500개가 있는데, 투명하게 운영하다보니 교육부 김상곤 장관으로부터 얼마 전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 마지막으로 세정일보 독자들에게 새해 덕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너도 할 수 있어’, ‘You can do it!’ 나 역시 너의 자리에 있어보았고, 행정고시도 아닌 말단 9급에서부터 출발했다. 그러니 너 역시 할 수 있다. 나눔과 섬김은 지금부터, 여기서부터, 나부터, 작은 것부터, 실천 가능한 것부터의 5가지 원칙이 있다. 크게 성공해서 나누겠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작지만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단돈 천원부터 지속적으로 해보는 일이 중요하다. 모두 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기원드립니다.


◆ 사진으로 본 조용근 석성1만사랑회 이사장의 '봉사의 길'

▲ 2006년 12월 강신호 전경련 회장과 밥퍼 봉사활동을 하는 조용근 회장의 모습.
▲ 2008년 12월 소망의 집에서 중증장애인들과 함께 노래하는 조용근 회장.
▲ 2011년 11월 세무법인 석성 창립5주년을 맞아 캄보디아에서 밥퍼봉사활동을 하는 조용근 회장. 당시 조회장은 사재 5천만원을 털어 밥퍼센터 건립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 2013년 12월 석성 나눔의 집 1호점 준공식.
▲ 2014년 4월 천안함재단 46용사 유가족들과 밥퍼봉사하는 조용근 회장.
▲ 2017년 5월 석성선행장학금 전달식.
▲ 2017년 6월 석성 나눔의 집 3호점 준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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