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우 (중부지방국세청)
 

내 나이 42, 불혹(不惑)의 나이를 넘어섰다.
현재 한국 사회의 평균나이가 84,5세라고 하니 딱 절반을 지난 셈이다.
그럼 인생의 깊이도 절반 정도 채워진 것일까.
잘 모르겠다.
미혹됨이 없이 살아가야 할 나이이나 아직까지 사적 욕심에 멀어져 있는지는 정말 잘 모르겠다.

더욱이 나의 신체도 최근 많은 격변의 시기를 거치고 있다.
운동을 좋아해 그로 인해 잦은 부상으로 간단한 시술, 수술도 경험해보았지만, 최근의 내 몸 상태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나이가 들면서 찾아오는, 그 흔한 척추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불과 1년도 채 안된 올해 초 몇날 며칠을 누워만 있어도 보았고 한 자세를 유지 못해 밤새도록 뒤척이면서 뜬 눈으로 지샌 적이 있다. 많은 병원을 돌아다니면서 의사 선생님들의 진단을 들어보고 내 몸 상태를 파악하기에 이르렀다.
나를 둘러싼 껍데기인 몸이 아프니 정신마저 약해지려 하고 있다. 그러는 동안 살아온 날들과 앞으로 살아갈 시간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좋은 계기가 된 것이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씨가 얘기하는 격하게 외로움을 느껴봐야 소중한 것을 깨닫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몸이 아파봐야 건강이 중요한 것을 깨닫듯이 이것저것 수많은 경험을 겪어봐야 무엇이 옳고 그른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을 오래사신 분들의 지혜가 필요한 것이고.
최근 언론 매체를 통해 너무나도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한국 사회가 급속도로 빨리 늙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정보기술의 발달로 시시각각 다양한 정보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손쉽게 전달된다. 그러다 보니 예전에도 다양하게 있었을 수도 있는 문제들이 실시간으로 부각되는 일들이 많이 생기는 것이다.
급변하는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잘살아 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보지 않을 수 없다. 진지한 고민을 하기도 전에 자극적인 영상, 언어로 현혹시키기도 하고 순간적인 감정에 휘둘리기도 한다. 본인이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이슈화된 내용을 다른 사람의 생각을 자기 것인 냥 전달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다.

‘나의 온전한 생각은 있기는 한 것인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를 시시때때로 고민해야 한다. 나의 생각도 확립되어 있지 않은데 어찌 상대방과 건강하게 얘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가까운 친구사이 에서도 필요하고 상하관계에 있는 구성원 간에도 필요할 것이다. 특히 대민 업무를 많이 하는 부서라면 상대방을 이해하는 노력을 더욱 기울여야 할 것이다. 내 자신이 상대방에게 진심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를 설득하기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쾌한 감정만 갖고 끝날 수도 있다.
이는 회사 내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석구석에서도 필요하다. 지금 우리나라가 너무 살기 좋아서일까. 개개인의 주관과 개성이 강하고 다양한 이해관계로 여기저기 마찰이 많이 발생한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 놓을 수 있는 유대가 많이 사라짐을 느끼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잡음이 더 건전하고 성숙한 사회를 이끌 밑거름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기도 하고 상대의 감정을 읽으려 하면서 공감을 보여야 한다. 진심으로 상대에게 다가간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한 사람이 인생을 통틀어 꾸준히 잘 살아가는 것은 무척 힘들고 어렵다. 그가 살아온 행적을 평가하는 것도 보는 시각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가 많다. 누구나 功過가 있을 수 있는데 한쪽 면만을 보고 다른 쪽 면을 간과하거나 그의 업적이나 인격을 과소평가 또는 매도하는 경우를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대체로 타인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 관대하고 누군가를 칭찬하는 데 인색하다. 그러다 보니 예전에 비해 본받아야 할 위인이 많이 보이지 않는 이유일 수도 있다.
지금 더욱 그렇다.
개인의 문제인가 사회적으로 구조적인 문제인가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고민해 봐야 한다. 당장 우리 주위를 둘러보자. 우리가 속한 사회 분위기가 책임을 지는 사람은 손해를 보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한 사람의 인격 및 가치는 본인의 경험, 사고에 따라 깊이를 달리한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무조건 미성숙 되었다고 볼 수 없으며 반대로 나이가 많아 젊은이보다 언제나 현명한 결정을 한다고 볼 수도 없다.

우리 헌법에 따르면 국회의원 피선거권 연령은 25세, 대통령은 40세 이상으로 제한되어 있다. 즉, 나이 40이면 웬만해선 한 나라를 이끌 사고력을 가진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한 나라가 아니라도 본인 인생의 책임을 질 나이가 보통 그 정도로 봐야하지 않을까.
그리고 나이가 만 19, 20세면 성인이라고 한다. 직장을 갖고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시기인 것이다. 먹고 살기 바쁜데 그 이상 생각해 볼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겠지만 성인이 된 이후부터 우리는 많은 굴곡을 경험하고 아픔을 하나씩 쌓아갈 때 나무의 나이테가 늘 듯이 고민의 꺼리도 다양해지고 깊어간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생의 본질은 무엇인지 항상 고민하고 후회도 하고 반성도 수없이 한다.
삶에 대해서 좀 쉽게 도식화해보면 ‘권한과 책임’에 따라 행동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개인이 그렇고 사회가 그러하다. 사회의 한 구성원은 다른 구성원에 영향을 받고 그는 또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소위 회계나 재무에서 얘기하는 ‘효용과 위험’ 또는 ‘수익과 비용’으로 바꿔 말할 수도 있다. 본인이 맡은 일에 위험을 감수하고 책임을 질 수 있는 범위에서 권한도 행사하고 그에 따른 효용을 가져야 한다. 본인이 책임은 지기 싫어하면서 더 많은 혜택을 누리거나 권리만 주장해선 안될 것이다. 다른 사람이 정당하게 벌어들인 것에 대해, 노력의 대가로 성취한 부분에 대해선 부러워할 수는 있어도 비난해선 안될 것이다.

사회는 점점 지능화되어 가고 있다. 조직이 거대해지면서 우리 개개인은 그에 대한 부속품이나 소모품으로 전락하는 경향이 많다. 창의적인 사고를 가진 소수의 개인이 사회를 주도해 나갈 수는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가 속한 조직의 분위기에 그냥 묻혀가고 조직이 정해준 방향에 어쩔 수 없이 따라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조직이 거대해질수록 유기적이고 자동화하는 것이 확실히 효율적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한 개인이 맡은 역할은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나 기계로 쉽게 대체될 수도 있다는 방증이 될 수도 있다. IT의 기술 발달이 그런 분위기를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인간과 동물이 다른 점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다. 사고력의 차이, 인간이 바라본 우리 ‘두뇌’에 있다. 인간다운 모습을 유지하고 살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질적으로는 과거에 비해 아주 편리해졌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는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진리는 단순하다. 단지 해석이 다양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진리에 좀 더 빨리 다가가기 위해 앞선 현인들의 지식과 인생의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 고전도 읽고 인생의 지침서 등을 학습한다. 웃어른들의 경험이 함축된 말씀도 되새겨 듣고 가슴 깊이 새기는 것이다.

보통 영감(靈感)을 주는 이야기를 보면 평온한 시기를 겪었을 때보다 암흑기를 배경으로 영웅을 그리는 경우가 많다. 사회가 전쟁, 질병 등 열악한 환경에 처하게 되면 영웅을 기다리게 되고 위대한 사람이 출현할 가능성도 매우 높아진다.

노벨문학수상 작품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이고 다른 하나는 주제사라마구의 ‘눈먼자들의 도시’이다. 이야기 배경에서 약간의 시차는 있지만 공간적인 배경은 이베리아 반도 근처로 유사하며 두 작품 모두 전염병을 소재로 삼고 있다. 페스트라는 질병은 쥐를 통해 인간에게 전염되고 폐렴 증세가 심한 경우 사망에 이르게 된다. ‘오랑’이라는 중소 도시를 폐쇄하는 극단적인 처방을 하게 되고 그 곳에 갇힌 사람들은 별도의 사회를 이루게 된다. 외부에서 구원물자가 제공되지만 죽음과의 사투를 벌여야 하는 것은 오랑 시민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현실성은 좀 떨어지지만 어느 순간에 실명을 하는 물질이 발생해 여기 저기 전염되기 시작하고 도시 전체가 눈이 먼 자들로 가득하게 된다. 결국 도시가 거대한 감옥인 셈이다.
전염이라는 무서운 소재를 다루고 있고 사회의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는 그 폐쇄된 도시에선 구성원은 절망감에 빠지게 되고 인간의 이성, 도덕성이 무시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절도 폭행 등으로 인해 그동안 유지됐던 질서가 점차적으로 하나 둘씩 무너진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은 동물에 가까운 본능만 남게 된다.
그러한 절망적인 환경에서 결국 영웅이 등장한다. ‘페스트’에서는 주인공 의사가,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안과의사의 아내가 헌신적인 노력의 주인공이다. 안과의사는 전염병이 발병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도 눈이 멀게 되지만 그의 아내와 함께 어려움을 슬기롭게 헤쳐 나간다. 그들 주인공들은 질병을 이겨내기 위해 지속적인 모험을 하고 아픈 자들을 돌보고 질서를 유지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한 한두 명이 결국 피폐해진 사회를 정상화시키는데 성공을 거두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상황은 달리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극단적인 상황을 설정하지 않더라도, 굳이 먼 곳에서 찾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에는 소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을 더러 접할 수 있다. 사회의 좋은 면보다 어두운 면이 부각될수록, 즐겁거나 행복할 때보다 힘들수록 우리는 ‘영웅’을 기다리고 본받아야 할 ‘어른’을 찾는다.
나보다 뛰어난 누군가가 나타나서 사회분위기를 바꾸고 질서를 잡고 리더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앞으로의 사회는 거대 조직이 유기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개인이 그러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을 것이다.
영웅을 찾아 나서는 것보다 본인 스스로 ‘어른’ 역할을 하려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후손에 물려줄 가치가 아닌가 생각한다.
 

[작가 프로필] 김태우 작가

△ 현재 중부지방국세청 근무

△ 2016년 국세가족문예전 단편소설 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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