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민 (동안양세무서)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육사 선생의 "청포도“ 첫 번째 연이다.

이육사 선생은 이 시에서 조국을 일제에게 빼앗긴 고달픔 속에서도 광복의 그 날을 기다리는 마음을 간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청포도, 마을 전설, 하늘, 푸른 바다, 흰 돛 단 배, 손님, 청포, 은쟁반, 하이얀 모시 수건 ...

시각적으로도 아주 시원하고 푸른 느낌이 든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시골에는 나름대로 그 마을의 전설과 전통이 있다.

내가 태어나서 스무 살 때까지 자란 내 고장도 그런 곳이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는 없었지만 냇가에 나가 물고기 잡기 좋은 시절이다.

마을 앞에는 백두대간의 일부구간인 고남산이 우뚝 솟아 있다.

고남산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일화가 전해져 오는 곳이다.

이성계가 장군으로 활동하던 고려 우왕 때 왜구가 노략질을 일삼으니 소탕하라는 명을 받고 출정하여 남원에 도착한 이성계가 고남산에 올라 승리를 기원하는 제례를 올리고 나서 운봉 황산에서 왜장 아지발도를 활로 쏘아 죽이고 왜구를 물리쳤다고 한다.

지금도 운봉에 황산대첩비가 남아 있다.

마를 앞으로 흘러가는 섬진강의 지류인 요천수가 굽이쳐 흐르는 모습은 아름다운 자연 그 모습 그대로이다.

마을 뒤쪽에는 연꽃을 닮은 산봉우리라 하여 연화봉(蓮花峰)이라고 한다.

연화봉 아래에는 고려 때 지었다는 승련사라는 절이 있고 승련사에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고려말 공민왕 때 금강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절 뒤에 아주 큰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금강사는 아주 큰 절이었고 승려도 많고 신도들도 많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연유에선지 바위가 갈라지면서 그 바위 속에 있던 금새 세 마리가 나와 고남산에 있는 창덕암, 만행산에 있는 귀정사, 청룡사로 날아 간 후 금강사가 망했다는 설이 있다.

바위가 갈라진 이유에 대하여는 승려들이 불도는 닦지 않고 호의호식해서 벌을 받았다는 설도 있고, 동네 사람들과 스님들의 사이가 좋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세월이 흘러 금강사 터에 다시 절을 지었고 지금은 승련사라는 절이 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산 밖에 안 보이는 산골마을 내 고장!

어렸을 때 내 고장 칠월은 냇가에 나가 물고기 잡고 멱 감던 시절이었다.

요천수라는 냇가는 장수군에 있는 영취산과 장안산 사이 지지계곡이라는 곳에서 발원해서 장장 60여 킬로미터를 흘러 전남 곡성군 동산리의 섬진강 까지 이어진다.

요천수라고 이름이 붙여진 것은 이 물가에 여뀌꽃이 많이 피었고, 여뀌꽃이 무리지어 피어 있는 모습이 아름다워 여뀌꽃 요(蓼)자와 내천(川)자를 써서 요천수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요천수는 1급 하천으로써 물에 수많은 어종이 살고 있다.

어렸을 때는 피라미 낚시도 많이 했고, 커다란 해머로 물속의 돌을 두들겨서 물고기를 기절시켜 잡는 방법도 많이 썼다.

밤에는 횃불을 들고 나가 다슬기를 잡기도 했다.

다슬기는 낮에는 물속 모래 속으로 들어가 있다가 밤이 되면 물 속의 돌 위로 올라와 있는 습성이 있어서 밤에 많이 잡을 수 있다.

가끔 홍수가 나면 붉은 황토 물이 흘러가는데 그 때는 민물새우 중 가장 큰 진거미라고 하는 것이 물가로 나와 큰물에 떠내려가므로 소쿠리를 들고 나가 진거미를 뜨는 사람들이 많았다.

산골에서만 볼 수 있는 자연이 준 흥미로운 일이라고 생각이 된다.

큰 물이 지나고 나면 메기 낚시도 잘 되었다.

하루는 대나무에 낚싯줄을 묶어서 만든 엉성한 낚싯대로 메기를 낚고 있었다.

운 좋게도 메기 세 마리를 잡았고, 빠가사리, 퉁가리 등 잡고기는 십 수 마리를 잡았다.

커다란 양은 주전자에 담아서 콧노래 흥얼거리며 가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평소에 행실이 좋지 않다고 평판이 난 청년 둘이 오고 있었다.

이 산골마을에도 저런 막나니 같은 인간이 있다는 것이 창피할 따름이었다.

한 녀석은 감옥에도 갔다 왔다고 하는 놈이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예상했던 대로 그 녀석들은 내게 다가와 주전자를 보자고 한다.

나보다 열 살 정도 많은 자들이어서 어쩔 수 없이 주전자를 보여주니 물고기를 내놓으란다.

안된다고 하니 계속 어르고 협박하고 번갈아 가면서 얘기한다.

나는 그때 낫을 가지고 있었는데 순간적으로 이 낫으로 저 놈들을 찍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초등학생이고 저 자들은 스무 살이 넘은 청년들이었다.

승산이 없을 것 같아 그 생각을 접었다.

한참 옥신각신 하다가 한 녀석이 제안을 한다.

메기를 줄 것인지, 내가 메기를 가질 것인지를 선택하란다.

남의 물건 가지고 도둑놈들이 선심 쓰는 꼴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메기를 내가 갖기로 했다.

한편으로는 그나마 다 뺏기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마음을 추스르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께 얘기를 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불같은 성격의 아버지가 어떤 행동을 하실지 걱정이 되어 아무 말 않고 그냥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판단은 잘 한 것 같다.

물고기 몇 마리 때문에 어른들끼리 큰 싸움이 날 수도 있었는데 잘 참았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씩 고향에 갈 때면 그 때 그 생각이 나곤 한다.

지금 그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쩌면 물고기 몇 마리 때문에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도 해보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행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듯이 벌써 강산이 4번도 더 변했으니 냇가도 옛날 그 물이 아니다.

상류에 댐이 생기면서 수량도 많이 줄어들었고 어종도 줄었고 냇가를 찾는 사람들도 줄었다.

그런데도 고향에 가면 마음은 항상 어릴 때 그 모습을 보고 있다.

내 고장 칠월은 물고기 때문에 즐거웠던 시절이었고, 또한 물고기 때문에 마음에 상처 받은 계절이기도 하다.

또 다시 칠월이 와서 내 고장을 생각해 보게 되는 시간이다.

지나간 시간은 모두 다 아름다웠노라고 한 말을 되새겨 보며 잠시 마음속의 시간을 어린 시절로, 그 자연 속으로 돌려 보고 있다.
 

[장석민 작가 프로필]

△ 현재 동안양세무서 근무

△ 2016년 국세가족문예전 금상 수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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