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별명 ‘일벌레‧독일병정’…“국가와 국세청 위해 밤낮없이 일했다”
국세공무원은 “애국심‧사명감 가지고…억울한 기업인 만들지 않아야”

 

지난 2006년 3월 서울지방국세청장을 끝으로 공직을 마감한 윤종훈 전 서울청장의 지금 이름은 ‘고문님’이다. 그리고 ‘교수님’이다. 오는 3월 말이 그가 야인이 된지 딱 12년째다. 그런데도 세정가에서는 아직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린다. 국세청 재직 시 많은 국세공무원들의 귀감이었고, 재벌대기업들과 외국계기업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그가 야인으로서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세정일보가 ‘근황(近況)’이라는 제목으로 그를 만나봤다.

그는 지금 서울 삼성동에 위치한 ‘법무법인 바른’의 조그만 사무실 한 칸에서 여전히 좋아하는 경제서적과 씨름하고 있다. 그리고 10년 넘게 정리한 자료와 강의노트, 그리고 일생동안 쌓은 경험에 의한 지식과 지혜를 대학(동덕여대)의 어린 제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경북 예천 출생으로, 대구 계성고등학교와 성균관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행정고시 18회로 공직에 입문하여 국세청 조사국 사무관, 심사2과장, 국제조사과장, 중부청 조사3국장, 서울청 조사2국장, 부산지방국세청장 등 요직을 거쳐 서울지방국세청장(1급)까지 역임했다. 그는 무엇보다 국세행정에서의 불모지였던 국제세원관리의 기반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인물 즉 ‘국제조세분야의 선각자’로 평가되어 왔다.

그는 “세무공무원은 단순한 징세공무원을 넘어선 종합경제공무원이다. 스스로 실력을 키워야 하고, 또 청렴으로 무장해야 하고, 돈은 퇴직 후에 벌어야 한다”는 철학과 소명을 가진 청렴한 공무원의 상징으로도 통했다. 지금도 그의 재산은 사무관때 마련한 서울 도봉구 쌍문동에 위치한 조그만 빌라 한 채에서 크게 불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요즘은 강단에서 후진들에게 강의하는 재미에 빠져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떠시냐고 물었다. 퇴직 후 9개월 만에 주위의 권유에 의해 어쩔수 없이 재취업했던 기업은행 감사를 마치고 건국대와 동덕여대 등 두 대학의 강단에서 후진들에게 강의를 해오다 최근들어서는 동덕여대에만 나간다고 했다. 1학기는 경제원론을, 2학기에는 국제경제학을 가르친다고 했다.

◆ 윤종훈 교수의 강의, 수강신청이 힘들 정도로 ‘인기’

학생들의 반응은 어떠시냐고 물었더니 지방국세청장, 교수님의 근엄함보다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졸업하기 전에 교수님 강의한번 듣고 졸업하고 싶다면서 찾아오고, 제 강의 개설 공지가 나가면 컴퓨터 앞에서 대기하다가 신청을 해도 번번이 실패를 하여 친구에게 부탁을 하여 수강신청을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개강 날 꽉 찬 강의실 복도에 십 수 명이 모여 있어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이 같은 얘기를 들었다”면서 멋쩍어했다.

수강생이 한 40~50명 정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90명’이라고 했다. 윤 교수님의 멋쩍은 자랑에 수긍이 갔다. 그래서인지 윤 교수님의 강의는 올해로 9년째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윤 교수는 강의준비에 한 치의 소홀함이 없다고 했다. 국세공무원생활에서 배인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완벽함 때문인지 9년째지만 강의를 위해 준비하는 시간은 처음 강단에 설 때와 똑같은 마음이고, 똑같은 자세라고 말했다.

그는 2010년 늦깎이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건국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였다. 학위 논문은 ‘관계금융의 가치에 대한 연구(중소기업대출을 대상으로)’로, 그는 이 논문으로 건국대학교 이사장상을 수상했다. 국세공무원 출신이나 세무사들의 경우 세무와 관련한 논문이 대부분이지만 그는 “사무관 때부터 경제학 서적 읽기를 좋아했고, 퇴직을 하면 공부를 더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왔다”면서 “국가경제 발전을 위한 경제학적 시야를 넓힐 수 있는 분야의 공부를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 노무현 전 대통령 칭찬에도 서울국세청장 1년 만에 퇴직

윤종훈 교수가 서울국세청장으로 재직할 당시는 노무현 정부 때였다. 당시 국세청(청장 이주성, 차장 전군표)주변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세청에서 최고의 인재는 윤종훈 전 서울청장이다’라고 칭찬했다는 말이 회자되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가 차기 국세청장에 오를 것이라고 전망했었다. 그런데 그는 2006년 3월 관복을 벗었다. 국세청 고위직 인사의 특징인 1급 1년이면 후진을 위한 용퇴라는 ‘불문율’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기자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묻자 그는 “다 지나간 일이다. 당시는 대통령님께 누(累)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만 했었다”면서 화제를 돌렸다.

그는 국세청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무조사관으로도 유명세를 날렸다.

그는 국세청 국제조세국 사무관 시절 우여곡절 끝에 당시 국세청에서는 성공적인 조사실적과 조사사례가 전무하다시피 한 국부유출혐의자에 대한 조사기획과 실지조사 임무를 받았다. 내로라하는 대기업의 외화도피와 관련한 세무조사였다. 그리고 윗분들도 크게 기대를 하지 않던 어려운 조사였다. 그런데 그는 당시로서는 전무후무한 조사실적을 기록했다.

당시 국세청 수뇌부는 윤 사무관의 조사실적에 대해 결재를 하면서 ‘이렇게 과세를 많이 하면 기업으로부터 평생 원망을 들을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윗분은 훗날 그 기업인으로부터 ‘윤 사무관을 칭찬하는 소리를 들었다’면서 윤 사무관을 ‘특이한 사람’이라며 에둘러 칭찬을 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러한 성과는 “국제조사의 특성상 정보의 활용이 남달랐기 때문이었다”고 소회했다. 그는 “국내의 기업체 조사는 어떻게든 자료 확보가 가능하지만 국제조사는 정보와 수사능력으로 실체적 진실을 추적해 나가는 것이라는 철학과 신념으로 24시간 고뇌하여 실적을 올리고, 최종결정단계에서는 역지사지로 생각하여 억울할 수 있는 부분은 과세에서 제외했을 뿐 아니라 특히 조사시작부터 마칠 때까지 기업인의 인격을 존중해준 결과였다”고 설명했다.

◆ IMF 당시 국부지키는 ‘국제조사과 신설’ 장본인

그는 IMF 당시 국부를 지키는 전담조직으로 국세청에 국제조사과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당시 김대중 정부시절 실세로 불렸던 안정남 차장에게 국제거래조사와 국부유출 감시로 국익을 지키는 일의 중요성을 설명했고, 안 전 청장은 그를 신뢰했고, 과원 36명이라는 '거대한(?)' 국제조사과를 출범시킬 수 있도록 도왔다. 당시 간세국 전체인원이 34명이었다는 점에서 한 개과로는 엄청난 숫자였다. 국부유출 방지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했던 안 전 청장의 작품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안 전 청장님은 정말 애국심이 강하신 분”이라고도 했다.

그는 그러면서 국세청 조사국 공무원들의 자세에 대해 새겨들을 만한 교훈적 이야기를 이어갔다.

“국세공무원은 경제학은 물론 경영학에 대해서도 공부를 해야하며, 무엇보다 국가경제의 뿌리인 세원을 보호하면서 업무를 해야한다”고 힘을 주었다. 그는 또 국세청 직원들은 기업인들과 동업자가 되어야 한다고도 했다. “국세공무원은 국가의 재정수요를 뒷받침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로서 기업이 잘되어야 국가의 재정수입을 저항없이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국세공무원은 국가가 대주주이기도 한 기업의 컨설턴트가 되어야 한다는 지론을 펼쳤다.

그는 무엇보다 국세공무원의 가치관은 애국심과 사명감, 자부심을 가져야 하며, 특히 억울한 기업인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세무조사의 원칙은 세금추징 외에는 기업의 위상이 조사전과 조사후가 같아야 한다. 즉 기업이 조사를 받은 후 국세청의 억울한 일 처리로 기업의욕을 잃거나 기업의 명예가 억울하게 추락되는 일이 있으면 성공한 세무조사라고 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윤종훈 전 서울청장은 솔직히 국세청 재직중 별로 인기가 없었다. 그는 업무관계 외에는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도 없었고, 많은 선배들조차 그에게 전화하기가 부담스럽다고 할 정도다. 그만큼 그는 일 밖에 모르는 ‘일벌레’였다. 별명이 ‘독일병정’이라고 할 정도로 일에 파묻혀 살았다. 그리고 그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도 집으로 일거리를 가져가서 외출도 하지 않고 일을 하거나 공부를 했다고 소회했다.

◆ 국세공무원은 애국심과 사명감, 자부심으로 가득차 있어야

“저는 오직 국가와 국민, 국세청을 위해 일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래서 국세공무원들의 가치관도 애국심과 사명감, 그리고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차서 일을 하고도 억울한 기업인을 만들지 않는 것이 국익을 지키는 길이고, 국세공무원이 국민들의 신뢰와 사랑을 받는 길이며, 가족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국세공무원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선배 국세공무원으로서 후배들이 가져야 할 덕목이 있다면 한 말씀해 달라고 했더니 미리 원고를 준비라도 한 듯 그가 들려준 국세공무원의 길이었다.

서울 강남의 한 음식점에서 한 시간 반가량 현직을 떠난지 12년이 지난 그의 과거 이야기를 들으면서 당시 이런 사람이 국세청장이 되었었더라면 아마도 그 이후 줄줄이 구속과 낙마의 흑역사로 대변되어온 국세청장의 수난사, 그리고 국세청의 신뢰도 추락과 국세공무원들의 온갖 수모도 없지 않았을 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는 지금도 젊었다. 국세청 근무시절 줄담배로 유명하였던 그였다. 3년 전부터 금연한 때문인지, 강의실에서 젊은 학생들과 생각을 공유하는 덕분인지, 그는 여전히 젊은 생각, 세금전문가로서의 국가이익, 경제학자로서의 국가발전을 위해 생각하고 또 고민하고 있었다.

사실 그와 마주 앉아있는 동안 기자는 현직 지방국세청장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기도 했다. 그만큼 그는 열정적이었다. 그래서 정치적 세무조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비롯해 현재의 국세행정에 대해 한마디 해달고 했다. 그는 한두 가지 할 말이 있지만 후배들이 잘 하고 있기 때문에 멀리서 응원하는 것이 소임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기자는 못내 궁금해서 다시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관계에 대해 물었다.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드러내 놓고 지지한 것으로 알려졌었는데 어떤 특별한 관계가 있느냐’라고. 하지만 그는 끝내 말을 아꼈다. 그러나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은)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지도자로 보고 지지를 하게 된 분”이라고만 했다. 여운이 남았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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