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세공무원 30년 영욕, 고향 영천이 바탕…언젠가 귀향 해야지요”
재무부 10년, 국세청 20년…국세공무원교육원장으로 멋지게 마무리

12년 정치에 올인, 못다한 꿈 그리고 6.13 지방선거 ‘불출마’ 결정
“국세공무원, 전문가로서 전문성은 당연하고 폭넓은 생각 가졌으면”

 

재무부 근무 10년, 국세청 근무 20년 도합 30년 동안 국세공무원이었던 김경원 전 국세공무원교육원장(64).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 2006년 5월 공직생활을 마감한 김 전 국세공무원교육원장이 퇴직하자마자 택한 새로운 도전은 ‘정치’였다. 모든 것을 털어 넣었다. 삶의 후반기는 정치에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 국회의원선거에 여러 차례 도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오는 6.13 선거에서 영천시장직에 도전을 꿈 꾸었으나, 최근 내려놓았다.

“모든 문제는 제 자신에게 있는 거지요. 누구를 탓할 수도 없습니다. 정치라는 것이 의욕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조직도 있어야 하고, 돈도 있어야 하며, 주변인들의 호응도 있어야 하는 등 3박자가 맞아야 합니다. 국회의원에서 시장으로 방향을 튼 것은 나이도 있었고, 나름대로 생각했던 계획들을 시장으로서 실현시켜보고 싶은 꿈이 있었지요. 이번 도전을 접으면서 비싼 댓가를 치렀고, 좋은 경험을 했으며 나름대로 많이 성숙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퇴직 후 로펌에 1년 몸담았다가 2007년 6월 이명박 대통령 후보(MB)경선 기획단장을 맡아 MB가 대통령에 당선되는데 기여했다. 이후 2008년 7월부터 2010년 8월까지 국민연금공단 감사를 2년간 역임하기도 했다.

◇2007년 대통령 선거 캠프 합류 <최태민 보고서> 보고 놀라…“날개 달아 줄테니 정00를 쳐라”
 

김 전 원장은 “2007년 선거캠프에서 활동할 당시 <최태민 보고서>를 갖고 있었다” 했다. 거기엔 차마 이야기할 수 없는 놀라운 사실이 담겨있었다고도 했다. 한 지인이 “‘마음껏 날개를 달아 줄 테니’하면서 조건을 내걸었고, 그것은 ‘정00를 물리쳐라’였다”고 했다. 이러한 이야기를 그는 자서전에 담을 계획이다. 어떤 내용일까. 궁금해서 이내 자서전을 언제 쓸 것이냐고 물었다. 그는 향후 10년은 활동할 수 있으므로 그 이후가 될지 모르겠다고 했다. 최소한 10년은 묻어두겠다는 이야기였다.

그가 국민연금공단 감사로 재직할 당시 프로젝트 파이낸싱(PF)에 대한 문제점을 적발하면서 이사장이 사퇴하는 사건이 있었다. 보통 내부 감사하면 대충 넘어가는 경향이 있는데, 내부 감사를 통해 조직의 장이 사퇴하는 경우는 드문 일이다. 아마 공기관에서 전례가 없었던 일이었다. 또한 그는 출근시간과 퇴근시간을 철저히 지켰다. 그러면서 휴일이면 고향 영천에 내려가 사람들 만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천상 정치인이었던 것.

그는 국회의원에 세 번 도전했다.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으로 출마한 경우도 있었다. 국회의원을 하려는 이유에 대해 “국회의원은 예술에 비유하면 ‘종합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으니까”라고 말했다.

“휴일이면 영천으로 달려가 사람들과 함께 소통했어요. 그때 국민연금공단의 감사로 판공비를 쓰지 않았느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전혀 사적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세무서장 시절, 축전을 받으면 집에 있는 전화로 답전을 보냈습니다. 공과사를 철저히 구분했지요. 재작년쯤인지 이제야 그런 것을 구분한다는 말을 듣고, ‘시대가 언젠데’하며 우린 수십 년 전에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했는데라고 소회하기도 했다”면서 누구보다 청렴하게 살아왔다고도 했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국세공무원으로 30년 동안 알게 모르게 많은 유혹을 받았을 것이고, 어려운 일이 있었으리라. “30년 근무하면서 어려운 일이 없었나요?”

“어려운 일이라. 그리 큰 문제는 없었고, 문제라면 두 번 정도 있었던 것 같아요. 81년경, 북대구세무서 소득세과장으로 재직할 때인데, 아침에 대구지검 특수부에서 직원을 긴급체포해 갔어요. 그런데 얼마 후 바로 풀려났던 일이 기억납니다. 또 국세공무원장 시절 세무사 시험지 인쇄를 하면서 인쇄상 오류가 발생했어요. 담당 사무관이 사표를 냈고, 제가 책임을 지고 물러났어요. 그냥 버텼으면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내가 책임지겠다’며 기자회견도 했습니다. 원장으로서 관리책임도 있으니까요.”

멋져보입니다. 지방청장을 할 때 지역 정치인이나 기타 지인들을 통한 청탁 등이 들어오는 경우는 없었는지?

“물론 없다고는 할 수 없지요. ‘한번 알아보겠습니다’하고 넘어갔지요.”
 

◇서울국세청 조사2국장 시절…유명 다단계판매업자 세무조사

그에게 국세청 재직기간 동안 에피소드나 가장 기억나는 일이 있는지 물었다.

“2004년 서울지방국세청 조사2국장 시절, 유명한 다단계판매업자에 대한 세무조사를 했는데, 정계인사들도 많이 연루되는 등 떠들썩했지만 그 건으로 인해 제가 소환 받거나 참고인조사를 받은 적이 전혀 없습니다. 보통 그 정도가 되면 담당 국장을 한번 부를 만도 한데 말이죠.”

이 다단계판매회사는 소비생활 공유마케팅이라는 기법을 도입해 40여만 명에 4조5000억 원 정도의 피해를 입혀 단군 이래 조 모씨와 함께 희대의 사기꾼으로 불렸고 연예인, 전현직 국회의원, 검사, 장성 등이 연루된 엄청난 규모의 사건이었다.

“2000년대 초였을 겁니다. 제가 국세청 공보관을 할 당시 국회 상임위에서 발언을 한 적이 있는데, 한 의원이 저의 발언에 불만을 갖고 ‘공보관 나부랭이가...’라고 발언을 했습니다. 그러자 당시 야당이었던 한 의원이, ‘대변인 역할을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일개 나부랭이 공보관 말이야’라고 표현할 수 있느냐. 나도 언론인 출신이지만, 사과하라며 자기들끼리 다투더군요.”

그는 다단계판매회사 사건에 이어 국세청 공보관 시절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풀어갔다.

“지난 2000년경 국세청에 대한 국정감사 중 안택수 의원이 대우그룹에 대해 세무조사를 하느냐며 안정남 청장에게 물었는데, 결과적으로 유도질문에 말리게 되어 ‘대우그룹을 세무조사 한다’는 기사가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국세청장은 문제가 있으면 세무조사를 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했지요. 그때 조사국장과 공보담당관 명의로 부인공시를 냈어요. 난리가 났죠. 상임위가 정회되고 졸지에 1시간 가까이 발언대에 서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보통 국장이 나가 발언을 해도 긴장을 하게 되는데~”라면서 이야기를 이었다.

“저는 자신 있었어요. 전체적으로 내용을 파악하고 있으니 답변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는 다시 화제를 바꿔 김대중 대통령 시절 지방청장을 비롯한 전국 세무서장들이 청와대 만찬에 초청돼 갔을 때 국세청장이 좀 과하게 대통령 칭찬 발언을 하기에, ‘아,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자들에게 다루지 말아줄 것을 부탁했다. “가십거리로 기자수첩 등을 통해 기사가 나올 것을 우려하면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1년 후 모 일간지에서 보도를 했다”며 후일담을 전했다.

대뜸 그에게, “국세청이 좀 패쇄적이지 않느냐”라고 물었다.

“재무부 10년, 국세청 20년, 양쪽을 다 경험했는데 국세청이 패쇄적이긴 하지요. 물론 업무자체가 폐쇄적이어서 그렇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요즘 방송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모 지방국세청장에 대해서도 물었다. 같은 지역 지방청장을 지냈다는 이유도 있었다.

“양비론이 있겠지만, 사심 없이 활동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싶지 않습니다. 역사는 그런 식으로 발전해오지 않았나, 긍정적으로 봅니다”라고 말했다.

엉뚱한 질문일지 모르지만, 만약 국세청장이 된다면 어떻게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공보관 시절, ‘언론에 대해서 당당한 국세청이 되어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동안 리더가 솔선수범해야 하는데, 바람직하지 못한 국세청이었기에 존경받는 국세청장은 못되더라도 적어도 도덕적으로 부끄럽지 않는 국세청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는 국세청 후배들에게 “폭을 넓게 가졌으면 좋겠다. 전문가로서 전문성은 당연히 갖춰야하지만 폭넓게 생각하고 다양성을 가졌으면 한다. 역지사지에서 생각해보는 마음도 가졌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김경원 전 원장은 정치를 하다 2014년부터 2015년까지 1년 동안 서초동 강남역 인근에 명인세무그룹이라는 사무소를 개업해 활동을 했지만, 2016년 20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위해 고향으로 다시 내려가게 된다.

“다른 지역에서 전략공천을 받을 수도 있는데, 굳이 영천을 택한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영천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며, 유학도 다녀오고 미국 국세청 파견근무 등 내가 성장해가는 과정에 고향 영천이 있었습니다. 영천에서 초등학교를 나왔고 대부분 대구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방학이면 영천에서 부모님이 하시는 농사일을 도왔지요. 현재는 형님이 부모님의 가업을 이어받았어요. 그리고 처음 대구에 있는 세무서에서 출발했고, 대구지방국세청장을 했어요. 고향 영천은 근거리에 있었습니다.”

◇고향 영천 사랑, ‘1906km 영천 자전거여행’ 책에 담아
 

그는 누구보다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 영천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2014년 말, 서울의 1.5배에 이르는 영천의 구석구석을 1년 동안 자전거 여행을 통해 사진과 이야기를 담은 책 <영천 자전거여행>을 펴냈다. 1년 동안 휴일 등을 이용해 영천 땅 1906km를 달리면서 영천의 자연과 영천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었다. 16개 읍면동 구석을 다니며 사진을 직접 찍고 맛집도 소개하고 사람들의 일상의 이야기를 들었다.

“영천은 내 고향이다. 야트막한 산과 아기자기한 골짜기, 맑은 공기와 기름진 땅! 참 살기 좋은 곳이다. 오래전부터 어르신들은 이구동성으로 ‘영천은 재해가 없는 곳이다’라고 말씀하셨다(중략). 대구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영천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서이고 두 번째 영천 발전의 물꼬를 트고 싶어서였다. 소박한 자전거 여행길에 하나하나 실어 올린 꿈들이 이제는 무겁게 많이 쌓였다. 노인정의 운동기구, 밑지지 않는 농사, 아이들 울음소리, 빚 없는 통장 등등. 소박한 꿈들이 하나씩 풀릴 때마다 내 자전거 여행길을 가볍게 즐거워지겠지, 자전거 탄 유별난 나그네로 만나서 밥도 얻어먹고 술도 얻어먹으며 이제는 멀리서 봐도 반가운 친구가 되었다.”

그는 <영천 자전거여행>을 펴낸 취지를 이렇게 풀어냈다.

그는 요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쓴 죽음에 대한 책을 읽고 있다. 그는 “이제 활동할 수 있는 나이가 10년 정도인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기에 미리미리 준비해 하는 것이 괜찮겠다 싶어서이다”라고 설명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이 ‘20세기 100대 사상가’ 중 한 명으로 선정된바 있다. 그녀는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평생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의 말기 환자 500여 명의 이야기를 담은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은 전 세계 25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됐으며, 70세 되던 해 쓴 자서전 『생의 수레바퀴(The Wheel of Life)』와 ‘인생 수업(Life Lessons)’은 그녀가 살아가는 동안 얻은 인생의 진실들을 담아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 김경원 씨는 결국 죽음이 강한 삶의 의욕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깨우쳤을까.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인간의 기본을 다루는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습니다. 철학은 너무 어렵고 신학을 하기에는... 삶이나 죽음이 신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심리학은 인간을 다루는 학문이기에 성취감도 있을 테고 사람을 알아나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고, 다양한 삶을 살아보고 싶어서입니다. 사람을 좀 더 알고 싶습니다.”

서대문 충정로 세정일보 사무실에서 김경원 전 원장과 대화하는 동안 ‘참 진솔하다. 그리고 청년처럼 여전히 패기가 넘친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슨 일을 하던 ‘김경원 원장님 파이팅!’을 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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