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복 (전 국세청 근무)

 나는 혼자서 걷기를 좋아한다. 혼자서 걷는 것은 혼자만의 명상을 즐길 수 있고 내 마음 내키는 대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어서 좋다. 이쪽을 가거나 저쪽으로 가거나 빨리 가거나 천천히 가거나 나 자신만의 보폭을 유지하면서 걷는 자유를 한껏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옆에 동반자가 있으면 그런 자유가 훼손되고 같이 걷는 사람과는 꾸준히 말을 해야 하는 부담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점심을 먹은 후 부근 두류공원을 산책할 때도 혼자 걷고, 토요일이 되어 팔공산, 대덕산으로 가는 길에도 언제나 혼자서 걸어간다. 어쩌다 동반자가 있어 함께 걷게 되면 나만의 조용한 사색을 즐길 수 없게 되고 자질구레한 세상사에 대해 모두 답을 해 줘야 한다. 거기에다 이즈음처럼 싸움질만 하는 정치판의 이야기라도 나오게 되면 정말 짜증이 난다. 혼자 걸으면 내 생각대로, 나의 어쭙잖은 품위도 유지할 수 있고, 내 나름의 방식대로 걸을 수 있어서 좋다.

 나의 걷기는 언제나 혼자다. 혼자서 걸어갈 때 나만의 달콤한 고독 같은 것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아내든 연인이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걷는 것이라면 즐겁고 황홀할 수도 있지만 그를 위해 끊임없는 배려를 해야 하는 의무감 같은 것이 따르게 되고, 나만을 위한 생각에서 멀어져 내가 하고 싶은 진정한 걷기는 못 하게 된다. 그것은 걷기의 진수가 훼손된 동반자에 대한 봉사이거나 아니면 의미 없는 소요(逍遙)나 산책(散策)일 뿐이다.

 혼자 걷기는 내 눈 가는 데 발이 따라 주는 것뿐이다. 혼자 걸을 때는 내 생각과 눈과 발은 도시에서 걷거나 차를 타고 다닐 때처럼 교통법규 같은 자질구레한 제약을 받지 않는다.

 사람들이 가끔 옛날을 회상하고, 고독한 사색을 즐기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이 비록 슬픈 추억이라 하더라도 과거의 회상은 언제나 아름다운 것이다. 이런 회상은 혼자 걸을 때만큼 가슴 저리게 떠오르는 경우는 없다. 비록 생각에 잠겨 돌부리에 발이 채고 헛디딘 발로 잠시 넘어지더라도 그것은 혼자 걸을 때 맛볼 수 있는 달콤한 체험이다.

 사색의 철학자 루소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이상한 사건(The 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을 쓴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 그리고 인문학자인 󰡐다비드 르 브르통(Breton, David Le)󰡑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모두 걷기에 별난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걷되 󰡐혼자 걷기󰡑를 하라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 유명한 사람들의 대열에는 낄 수도 없지만 걸을 때만은 언제나 혼자 걷는다. 아내와의 동행을 몇 번 시도했지만 걷기의 필요성은 느끼면서도 나와는 동행해 주지 않으니 자연 혼자 걷기가 된 것이다.

 루소가 시계바늘처럼 정해진 새벽 시간에 혼자 걷기 하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혼자 걷기를 마치 자기의 철학의 한 부분인 양 실천했다. 󰡒누가 내게 마차의 빈자리를 권하거나 길을 가던 사람이 내게 가까이 올 때면 나는 걸으면서 이룩한 큰 재산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만 같아 눈살을 찌푸린다.󰡓고 했다. 스티븐슨은 󰡒걸어서 산책하는 맛을 제대로 즐기려면 혼자여야 한다고 했다. 단체로, 심지어 둘이서 하는 산책은 이름뿐인 산책이 되고 만다. 그것은 산책이 아니라 피크닉에 속한다.󰡓라고 했다.

 나는 지금까지 혼자 걷기를 했으니 무슨 심오한 사색을 즐기는 철학자가 되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내 주위에 친구도 있고 글을 쓰면서 함께 글공부하는 동호회가 있어 더러 어울리기도 하지만 걷기를 할 때만은 언제나 혼자 걷는다. 혼자 걸을 때 내 자신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고, 사람들을 만날 때와는 달리 아름다운 자연을 마음대로 만끽할 수 있다.

 이렇게 걷기가 좋다지만 나이가 많아져 힘에 부치면 먼 거리를 걸을 수도 없거니와 언제까지 이 좋은 걷기를 할 수 있을지 남은 세월을 헤아려 본다. 내가 걷지 못하게 될 때에는 소중한 생명력도 바닥이 보이는 때가 올 것이다. 걷지 못할 때는 설령 살아 있다고 해도 진정한 의미의 삶은 끝나는 것이나 다름없다. 짧은 거리라도 걸을 수 있는 것은 살아 있다는 온전한 증표다.

 사람들은 함께 있을 때는 서로 대화를 하면서 즐겨야 된다지만. 여러 사람이 있을 때는 혼자 사색을 즐기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들이나 물가에서나, 또는 산으로 가게 될 때 혼자서 걷는 다면 그때 혼자 걷기의 진수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발은 나무의 뿌리처럼 한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사람은 꼼짝 않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발로 걸어 다니게 만들어진 것이다. 보다 지혜롭게 잘 움직이게 하기 위해 네 발도 아니고 두 발을 만들어 걷기의 모양도 좋도록 한 것이다. 사람의 발이 네 발이었다면 얼마나 흉해 보였을까. 두 발로 걸어가면서 두 손을 마주 잡고 걸어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람만이 누리는 창조주의 특혜이다. 이런 망상 같은 생각도 혼자 걸어가면서 할 수 있기에 걷기가 얼마나 좋은가를 다시 깨닫게 된다.

 도시에서 보도 위를 걸어갈 때 우리는 무수한 사람들과 마주치며 그들과 어깨를 겨루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걸음걸이도 느리게 할 수 없다.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틀 속에 짜여 진 시간에 맞춰 움직여야 하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걷는 것 자체가 생존과 직결되는 여유 없는 걸음걸이로 한시도 긴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분주한 도시를 벗어나 어깨를 스치는 사람도 없고, 빨간 신호나 파란 신호등이 주는 긴장감도 없는 교외나 산길을 혼자 걸을 때면 문명 세계에 가로놓인 모든 규제에서 벗어나 가장 편안하게 자연을 만나고, 보고 느끼는 자유를 만끽하게 된다. 다리에 힘이 남아 있을 때까지 걸어갈 수 있다면 나는 또 혼자 걸을 것이다.

[김성복 작가 프로필]

△ 전 국세청 근무
△ 문예사조로 신인상 수상,  수필세계에서 작가상 수상
△ 시집  『먼 길』
△ 수필집 『추령별곡』, 『청산별곡. 상 . 하』,  『조용한 사색』 『인생은 아름다웠다』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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