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은 경 (익산세무서)
 

 구불거리는 시골외길.

투명한 하늘, 누런 들판, 점점이 찍힌 가을꽃들, 주황색 열매들

풍경화같은 그 길에 들면 따뜻한 햇살 향기가 나고 차창을 내려 그 향기를 들이마시면 항상 어깨 바로 아래 매달려 가쁘게 쿵덕거리던 심장이 위장아래 허리께쯤 내려간 듯이 갑자기 긴 한숨이 나며 나는 참으로 편안해진다.
 

 그 길을 따라 띄엄띄엄 서 있는 조립식 건물들은 모두 주렁주렁 곶감을 말린다. 가을 날 떫은 감들은 그 길에서 모두 달달해져간다. 나무에서 따낸 감들은 단내를 풍기며 분칠한 곶감이 되어 단맛을 더해가고 높은 가지에 달린 감들은 얇은 피부 속 찰진 살들을 햇빛에 뒤척여 투명한 즙으로 만들어가며 햇살을 화살처럼 사방에 쏘아대고 있다. 한입 물어 쪽 빨아들이면 단번에 입 속 가득 들어찰 듯한 높은 가지 끝 맑은 홍시에 손을 뻗어보지만 닿지가 않는다. 결국엔 그것들을 먹어치울 새들을 부러워하며 올 겨울엔 시린 서리처럼 분이 난 곶감을 원 없이 먹어줘야지 다짐하며 산길로 들어선다.
 

 더운 여름날, 터널처럼 햇빛을 가려주던 푸르고 빽빽하던 그 작은 손바닥들, 이젠 모두 다 가느다란 손목을 풀고 길 위로 내려앉았다. 내가 오기를 기다려 일제히 이제 막 떨어져 내린 듯 고요히 그러나 더없이 소중한 손님을 맞듯이 낙엽들 조심스레 길을 내어준다. 차에서 내려 산길에 들어서면 “와...와....” 어떤 말로 이 길을 얘기할까. 완만한 산길에 겹겹이 놓인 담요처럼 길등을 덮은 낙엽들. 촘촘히 폭신하게 바스락거릴 듯 가볍게, 딱딱한 바위를 품어 달래 듯, 숱한 발길에 밟힌 돌등을 어루만지듯, 섬세한 안주인의 손길로 뿌려놓은 것 같은 낙엽들... 돌마저 나처럼 고요히 숨쉬는 듯.

내 이 길을 어찌 걸을까..이 고운 길을 어찌 밟을까. 이 고요를 감히 어찌 깨뜨릴까..
 

 ‘미안해’하며 한 발 낙엽위로 올리니 든든히 발바닥을 받쳐주며 ‘괜찮아’한다. 처음 태어날 때부터 같은 가지에 있었으나 손끝 한 번 서로 닿아보지 못한 그리운 잎들과 지금 같이 있다며. ‘고마워’ 날 허락해줘서 하며 다시 발걸음 디디니 ‘행복해’ 속삭인다. 그 동안 내려다만 보던 따뜻한 흙 위에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부서져 하나로 부서질 수 있음에. 낙엽의 소리에 귀기울이며 걷다보면 초입부터 코끝에 스미던 떱떠름하고 구수한 도토리 내음 품은 안개가 나뭇가지 사이로 빠져 산위로 오르며 길을 터준다.
 

 ‘화암사’

정갈한 푯말. 그 푯말 옆엔 산꼭대기에서부터 줄곧 돌돌거리며 쉴 새 없이 구르던 계곡물방울들이 툭 툭 떨어져 쉬어가는 웅덩이가 있다. 잠시 머물다보면 새로 도착한 물방울들이 휴식을 끝낸 물방울들을 밀어 보낸다. 그 조그만 휴식처엔 먼저 도착한 낙엽들, 작은 물고기들, 다슬기들 같은 계곡의 주인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다리도 안 아픈 엄살쟁이 아이들은 낙엽을 주워들고 바위를 들추고 멈춰서 놀려고만 한다.
 

 그 아이들을 다독여 산을 오르는 부모들도 잠깐 들러 웅덩이에 얼굴을 비춰보고 손을 씻어본다. 나즈막한 산에 없는 게 없다. 좁은 계곡위에 통나무다리.. 얼마나 많은 사연들을 목격했을까? 숱한 웃음과 한숨과 사랑과 이별, 싸움과 화해, 온갖 꽃들과 향기와 바람과 비와 눈. 고요한 산 속에 놓여있지만 누워서 세상의 모든 생명을 보고 모든 감정을 느껴보았을 듯 다리표면은 매끈한 백일홍 줄기처럼 만지면 흘러내릴 것 같다.
 

 이끼 낀 바위들을 밟으며 계곡을 따라 걸으면 제법 높이를 갖춘 폭포도 만난다. 이 산의 가장 가파른 곳 철 계단을 오르기 직전의 선물이다. 너른 바위도 몇 개 있는 곳에서 또 쉬어간다. 만들어 준 이의 노고에 감사하며 계단을 오르면 오르는 이의 팍팍함을 잊게 하는 예쁜 점토 꽃잎들. 바람에 날리는 듯 물결을 그리며 점점이 꽃들이 철조망에 벽화처럼 붙어있다. 전문가의 솜씨도 아닌 듯한데 정성스럽게 그려 색칠하고 구워내고 공들여 전시해두었다. 그 계단을 오르면 힘들다기보다는 대접받는 듯한 기분에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어진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서고 나면 이젠 바위에 매어놓은 밧줄을 잡고 올라야한다. 작은 산에 있는 여러 가지 것 중의 하나. 평상시엔 아이들 장난 같지만 비나 눈이 와서 미끄러울 땐 꼭 필요한 보호장비다. 밧줄코스까지 통과하고 나니 화암사가 바로 보이는 작은 평지에 군데군데 놓인 나무둥치들. 잠시 앉아서 화암사와 얘기를 나누어 보라는 듯...
 

  바닥에 빼곡한 노란 은행잎들. 화암사를 마주하고 수백년을 살아온 커다란 은행나무가 마련해 둔 선물이다. 그 선물을 받으며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본다. 햇살이 따스하게 고찰을 비춘다. 잘 늙은 절을 따뜻하게 데우며 휘어진 기둥들을 어루만져준다. 오랜 세월 버텨준 노고에 감사하듯이. 단청에 칠은 사라진지 옛날인듯 보이지만 작고 단단하고 맑은 노승을 보고 느끼는 아름다움이 그곳에도 있다.
 

그곳에서 고요히 질문을 해본다.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려면 어찌 해야 하는지, 시간이 더 지나 더 어른이 되면 나도 흔들리지 않아 지는가’ 살며시 바람 한 줄기 불어온다. 풍경소리도 섞여서 불어온다. ‘지금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고요히 눈을 감는다. 소리가 나를 감싸고 소리가 나를 쓰다듬는다. 그리고 속삭인다. ‘이렇게 매일 바람 부는데 어찌 네가 .., 깊은 산중에 나도 맨날 이 작은 바람에 흔들리는데 넌들..’ 흔들림에 대한 위로처럼 바람과 풍경이 나만이 듣는 노래를 불러준다. 그 자리에 앉아 들어보면 풍경이 만들어주는 투명한 노래는 그 나이 들고 작은 절과 또 흔들리느라 지친 나를 위한 짧고도 깊은 기도 같기도 하다.
 

 지금 이 기도가 끝나면 좁고 낡은 나무다리를 가볍게 건너 따뜻한 햇살 가득한 저 화암사의 품으로 들어가 포옥 안기리라.
 

[이은경 작가 프로필]

△ 현재 익산세무서 근무

△ 국세가족문예전 은상 수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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