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호영 세무사

올바른 소통이 없는 아집과 독선 그리고 가부장적이고 독단적 의사결정이 낳은 인간의 비극을 말한다.

끊임없이 소용돌이 치며 운명을 휘감는 일련의 사건들! 인간들의 비극은 과연 어디에서부터 연유되는 것일까?

음모와 질투로 인한 살인과 자살, 복수와 존재의 고민, 그리고 엇나간 사랑과 질투가 유발하는 죽음, 또한 권력욕으로 인한 연이은 시해와 사살, 결국 희망 기쁨 사랑 질투 분노 두려움 허세 독선 아집 욱하는 성격 등이 죽음의 원자로 작용 할 때가 있으니 인간에게 닥치는 비극의 원인을 단순하게 논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것이 인간의 삶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비극의 원천이 어디에서 기인되는가를 편린이나마 이해하기 위해 비극을 집약적으로 다룬 세계적인 대문호 세익스피어의 작품인 4대 비극 즉 리어왕, 햄릿, 맥베드, 오셀로라는 소설의 영화 속을 산책하여 느껴보고 탐닉해 보기로 하였다.

세익스피어(1564~1616)는 재론할 필요가 없이 영국의 엘리자베드 여왕이 “세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세계적 대문호로서 400여년 동안 그 명성을 유지해 오고 있으며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호칭이 붙을 정도로 아름다운 시적 표현과 수많은 경구를 생산해낸 거장이다.

리어왕의 작품에는 주인공 리어왕과 큰딸 고너릴, 둘째딸 리건 및 리어왕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셋째 딸 코딜리아가 있으며 맏사위 올버린과 둘째사위 콘월, 그리고 충신인 백작 켄트와 글로스터가 있고 글로스터에게는 큰아들 에드가와 서자인 둘째 아들 에드먼드가 등장한다.

리어왕은 어느 날 본인이 이제 나이가 들어 정치적 권력과 통치 수단은 물론 영토와 모든 재산을 세 딸에게 삼등분하여 물려주고 편안한 여생을 즐기기를 결심하고 세 딸을 모아 자기에 대한 사랑의 정도를 시험하기 위해 세 딸에게 차례로 질문을 하여 확인한다.

큰 딸은 “어찌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숨결이나 말로서 표현을 다할 수 있겠냐”며 온갖 애교와 아양을 떨면서 거짓 수사를 늘어놓는다. 둘째 딸 역시 언니와 이하 동문임을 역설하면서 거기에 더하여 세상에서 가장 고결하고 고상한 효심을 가진 딸임을 열변한다.

그러나 리어왕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셋째 딸 코딜리아에게 얼마나 애비를 사랑하느랴고 물으니 그녀는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자식으로서의 당연한 도리로 아버지께서 잘 아시겠지” 내심 생각하고 “아무런 할 말이 없다,Nothing”면서 마음속에 있는 것을 입에 못 올리겠다고 말한다.

입에 발린 말을 못하는 순진하고 착하디 착한 셋째 딸 코딜리아는 리어왕을 극진히 사랑하면서도 효심에 찬 속내를 보이지 않으면서 “언니들이 아버님만 사랑한다면 사랑의 대상인 형부들에게 왜 시집을 갔을까요?”라고 덧붙여 리어왕은 셋째 딸에게 더욱 분노한다. 셋째 딸을 가장 사랑했으니 그 깊이만큼 분노도 큰 듯 했다.

셋째 딸이 가장 자기만을 사랑한다고 답할 줄 알았던 리어 왕은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 거듭 물어 보지만 사랑한다는 표현을 끝끝내 하지 않자 그 자리에서 “너는 내 딸도 아니다. 못 된년”하며 격노하여 셋째 딸에게 주려던 영토와 모든 권력과 재산까지 입이 마르도록 황홀하고 현란한 수사로 거짓 사랑을 외친 야심에 찬 첫째와 둘째 딸에게 몽땅 나눠줘 버린다.

리어왕은 하인 백 명을 거느리고 모든 권력과 영토를 분배해준 큰 딸 고너릴과 둘째 딸 리건 집을 한두달 씩 오가며 사냥이나 다니면서 행복하고 편안한 여생을 보내기로 꿈꾼다. 자기만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은 착하고 순한 진심어린 셋째 딸 코딜리아는 재산이 없어도 좋다는 프랑스 왕자와 함께 프랑스로 추방해 버린다.

“정의는 진실과 진심이 수반되어야 하지만 진실과 진심이 반드시 정의를 가져 오지 않는다”라는 말은 진심어리고 진정성있는 마음씨를 지닌 셋째 딸 코딜리아와 온갖 아양과 거짓 수사로 아버지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영토와 권력을 차지한 큰 딸과 둘째 딸의 사악한 소행에서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러나 아뿔사!

리어왕은 자기를 입이 마르도록 사랑한다고 말한 큰 딸과 둘째딸 집을 오가며 행복하고 여유로운 삶을 추구하려 했던 리어왕에게 그 불행의 시작은 그리 많은 시일이 필요치 않았다. 골프로 말하면 18홀도 안돌았는데 나쁜 인간성과 속내가 드러난 것이다.

큰 딸 집에 머무는 동안 큰 딸은 ‘하인들이 일거리나 만들고 싸움이나 하고 말썽이나 부리니 100명씩이나 필요 하냐’며 우선 50명을 줄일 것을 요구함은 물론 사냥 갔다 돌아 와도 마중도 안 나오고 말 한마디도 리어왕에게 곱게 안하는 등 구박과 박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큰 딸에게 큰 실망과 배신감을 느낀 리어왕은 큰 딸에게 “너는 자궁이 말라 비틀어져 자식도 낳지 못 할거다” “폭풍이 몰아쳐 저년을 산야로 날아가게 하라”는 등 아버지로서는 입에 담지 못할 악담과 욕설을 왕창 퍼부어 대고 둘째 딸 집에서 지내겠다고 떠나 버렸다. 영토와 재산을 다주고도 얼마나 수모를 당했으면 그리 했을까도 생각된다.

둘째 딸 역시 ‘하인이 50명 까지도 필요없다’며 25명으로 줄이라는 설상가상의 요구와 함께 언니 이상으로 리어왕을 박해하니 그럼 차라리 50명을 두라는 큰 딸 고너릴 집으로 다시 가는 게 좋겠다고 판단하여 가게 된다. 그러나 고너릴은 동생이 주장한 25명도 사실은 필요 없고 자기가 거느린 시종들이 수발하면 되지 리어왕에게 하인이 뭘 필요하냐고 한 술 더 뜬다.

결국 욱하는 성격과 독선과 아집, 권위주의적 성격으로 똘똘 뭉쳐진 리어왕은 진실의 보석인 효심 가득한 셋째 딸의 진심과 진정을 외면한채 거짓 수사로 사랑을 말한 큰 딸과 둘째 딸에게 영토와 재산을 나눠주고도 온갖 수모와 박해를 받고 견디지 못하여 폭풍우와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광야에 미친 모습으로 뛰쳐나가 거지와 같은 풍찬 노숙자의 신세가 되고 만다.결국 꿈꾸던 행복과 여유는 고사하고 두 딸로부터 외면당하는 찬밥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이렇게 독선과 아집과 권위주의적 사고는 굴절되고 왜곡된 의사 결정을 하게 되어 리어왕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의 동문회나 장학회 등 조그마한 커뮤니티나 소모임 등에서도 지도자급이라는 자들의 잘못된 의사결정이나 선택으로 구성원을 분열시키는 비극을 초래하는 경우가 있게 되는 바 여기서도 세익스피어의 시공을 초월한 직관력과 통찰력이 돋보이는듯하여 그 위대성을 다시한번 느끼게 된다.

한편 충신 글로스터 백작의 집안은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큰아들 에드가와 둘째 아들 서자인 에드먼드가 있는바 에드먼드는 형의 상속을 차지하기 위하여 아버지에게 형을 집요하고도 용위 주도하게 음모하여 거리로 내 쫒았으며 급기야 아버지까지 리어왕의 큰 딸에게 리어왕 편을 든다고 간교하게 밀고하여 그들이 글로스터 백작의 눈을 빼서 성 밖으로 내쫒아 버린 후 사악한 에드먼드는 큰 딸과 둘째 딸의 사랑을 받으며 양다리를 걸치고 지내게 된다.

프랑스로 추방을 당한 착하고 순한 셋째 딸 코딜리아는 영토와 권력을 모두 물려받은 언니들에게 온갖 구박과 수모를 받고 끝내는 미치광이가 되어 광야로 쫒겨나 폭풍우 속을 헤매고 다닌다는 아버지의 소식을 접하고 그들과 싸우기 위해 군대를 일으킨다.

당연히 권선징악적 차원에서라면 코딜리아가 승리를 해야 되겠지만 순하고 연약한 셋째 딸의 군대가 악랄한 큰 딸과 둘째 딸의 군대를 물리치지 못하고 결국 리어왕과 코딜리아는 포로로 잡히게 된다. 현 시대에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저런 일은 비일 비재하니 어쩌면 그것이 현실인 모양이다. 선과 정의는 악과 불의를 언제나 이기지는 못하는 것이 현실이고 인간의 한계인 듯 하다.

포로가 된 코딜리아는 악한 에드먼드가가 보낸 첩자에 의해 교살이 되고 에드먼드를 사랑하는 큰 딸 고너린은 질투심에 눈이 멀어 급기야 에드먼드와 사랑에 빠진 동생인 둘째 딸 리건을 독살하고 고너린 또한 동생을 죽였다는 죄책감과 스트레스로 자살을 하게 된다.

형의 상속 지분과 아버지의 권려까지 빼앗아 움켜쥔 서자 에드먼드는 형 에드가와 결투 끝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또한 큰 딸과 둘째 딸의 거짓 사랑을 알아채지 못하고 셋째 딸의 진정한 사랑을 늦게서나마 깨닫게 된 리어왕은 셋째 딸의 주검을 껴안고 통곡을 하면서 상심과 슬픔을 못이겨 자살로 생을 내리게 된다.

리어왕을 끝까지 수행하며 셋째 딸의 사랑이 진심이라고 충고하여 추방당했으나 다른 이름으로 리어왕에게 다가와 리어왕을 옆에서 끝까지 지킨 충신 켄트 백작과 서자인 아들 에드먼드의 모함에 의하여 권부에서 쫒겨나고 양 눈까지 잃은 글로스터 백작 또한 참혹한 죽음에 이르게 된다.

리어왕이라는 영화를 감상하고 이같은 줄거리를 해설 하려는 의도만은 아니다. 사실관계만의 나열이라면 지면과 시간의 낭비일 뿐일 것이다. 또 영화를 보든 소설을 보면 될 것이다. 영화를 통해서 아래와 같은 몇가지 느낌과 교훈을 찾아보고자 함이 아마 영화를 보게되는 진정한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위에서와 같이 착하고 순하며 효심 가득한 셋째 딸의 진심어린 사랑을 알아채지 못한 독선과 아집과 허세에 의한 의사결정 행태가 낳은 잘못된 선택이 얼마나 많은 비참한 비극을 초래 하는지 정확한 소통과 판단의 중요성을 극명하게 깨달을 수 있는 영화였다.

또한 요즈음 장수시대이고 몰 인본주의에 입각한 효심의 희박함이 회자되는 때에 “통장은 죽을 때까지 꽉 틀어지고 있어야지 사전에 자식들에게 내놓는 것은 불효자식을 만든다”는 말이 한층 와 닿아 역시 세익스피어는 400여년이 지난 현시대까지도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진리를 설파한 듯하여 그 위대함과 거장임을 재삼 느끼게 된다.

자식의 효도에 기대어 안락하고 행복한 여생을 보내겠다는 알량한 생각을 하는 어른들에게 리어왕처럼 사전에 자식에게 통장과 권력을 모두 내주면 삭풍 몰아치는 광야에 내 몰릴수도 있다는 경종을 울려 주는 듯 하다. 씁쓸하지만 생생하고 따끈 따끈한 교훈이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한편 부모와 자식 간에 입에 발린 표현을 안하는 것은 동서고금 마찬가지 인 듯 하나 그래도 부모 자식 간에도 자식으로서의 당연한 도리 인 사랑을 굳이 말로서 표현 할 필요가 있겠느냐 보다는 마음속에 있는 의사를 정확히 표현함으로서 원활한 소통이 되어야 한다는 점도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코딜리아의 경우 아버지인 리어왕이 제일 사랑하는 막내딸이고 그런 사랑을 확인해 보고 싶어하는 늙은 아버지에게 속마음을 표현 했다면 코딜리아 본인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지 않음은 물론 왕가의 몰락이라는 비극과 충신 등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국가적인 비극 또한 막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도 생각해 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권력을 거머진 힘 있는 자가 아집이나 독선 그리고 권위주의적 경직된 의사결정을 함으로서 잘 못된 선택을 하지 않고 올바로 판단하여 의사결정 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함이 너무나 당연할 것으로 생각된다.

잘못된 선택으로 리어왕은 제일 사랑하는 셋째 딸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고, 충신인 켈트 백작을 추방하는가하면 글로스터 백작까지도 죽음에 이르게 함으로써 가장 사랑하고 진심어린 딸과 충신은 배척하고 결국 자신을 배신하고 사악한 무리들에게 영토와 권력을 나눠주게 되어 리어왕 스스로 비극을 자초하게 되었다는 느낌이다.

잠깐 여기서 글로스터 백작 집안을 생각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특히 첩의 소생인 서자 에드먼드는 서자라는 이유로 상속이라든지 권력의 대열에서 소외될 것을 명분으로 갖은 음모를 꾸며 상속자인 형을 내쫒고 권력을 쥔 아버지마저 축출하여 형과 아버지의 몫을 거머쥐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목구비나 몸과 힘으로도 형보다 못할 바도 없고 아버지가 사랑한 예쁘고 젊은 여인으로부터 태어났으니 자기가 DNA상으로도 형보다 못할 바가 무엇이 있느냐는 자각과 함께 저지른 일이지만 비록 서자라도 당당한 권리가 있다는 사상을 깨우쳐주는 세익스피어의 선각자적인 통찰력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루 하루가 급속도로 변해가는 요즈음, 60여살만 넘어 가면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거지가 얼마나 시대에 뒤떨어지고 낡은 것인가를 모르고 케케묵은 아집과 독선적 사고방식으로 젊은이들에게 아니 그리 젊지도 않은 사람에게 잔소리하고 심지어는 호통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처신하는 ‘꼰대’ 분들에게 400백여년 전의 세익스피어가 훈계하는 듯 큰 소리로 들림은 어떤 연유일까?

역시 세익스피어는 가장 사랑하는 딸의 주검을 껴안아야 되고 사악한 무리들에게 영토와 재산을 물려줘야하고 충신들의 충언을 뿌리치고 교언영색하고 온갖 거짓으로 수사된 간계에 속고, 선을 실현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으나 악의 무리에 결국 패하게 되는 인간세계의 가장 극단적 비극적 상황을 사실적이고도 극적으로 그려 내었다는 느낌이 든다.

“흔히 자기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나쁜 결과로 인하여 불행이나 비극적 상황에 처하게 된 경우에 세상의 바보들은 그 재앙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해와 달과 별 등의 남의 탓으로 돌리는 법이다”라는 경구가 한층 가슴속 깊이 와 닿게 하는 장엄한 영화였다.

또한 리어왕은 죽음 직전에라도 자신의 과오를 깨달았으니 비극적이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라도 끝내 극악한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죽어가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세익스피어는 400여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통하는 인간의 심리와 행태를 정확하고도 세밀하게 묘사해 냄으로써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가치와 사유를 창출한 대단한 거장임을 거듭 느끼게 하는 거작의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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