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호영 세무사

고향이라 해도 가끔 귀소 본능을 발동하여 가보지 않으면 진정한 고향의 맛과 정취를 못 느낀다. 그러나 비록 자주 못가 드라도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듯이 누구에게나 늘 가슴에 머물고 있는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인 것이다. 오늘은 중학교 때 서무과에서 일 하시던 고향 어른께서 돌아 가셨다기에 조문길 가던 중에 고향 인근을 들렸다.

들렸다기 보다는 드라이브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너무 이른 아침이기에 조문하기가 좀 민망해서 였다. 고인이 지인이기에 문상 아닌 조문이다.

고향 어른이시기도 하지만 내 친구이며 초등, 중등학교 동기의 아버지이시기도 하시다. 학교 일을 돌보셨는데 학창시절 늘 성실 하시고 밝은 표정이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가끔 지나는 길에 뵈면 애정어린 시선을 주시고 웃음띤 모습으로 내 어깨를 두드려 주시며 북돋아 주시던 고마운 분이시기도 하다. 영정을 대하니 여전히 인자하신 그 모습이시다.몇십년 만에 뵙지만 친근하게 와 닿는다.

금년 91세로 세상을 하직 하셨단다. Homo hundred 시대, 즉 백세 시대라고는 하지만 백세까지는 아니 드라도 꽤 장수 하신듯 하다. 이조시대의 왕들의 평균 수명이 39세였다니 배도 더 사신 셈이다.

개인으로선 몇년을 더 살고 덜 사는 것이 중요 할지 모르지만 웅대 무비한 거대한 우주와 자연, 억겁의 세월 앞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하는 철학 아닌 철학을 생각해본다.

그러니 톨스토이는 “늘 죽음을 생각 하는 삶을 살아라, 내일 죽을 것처럼 살고 영원히 살 것 처럼 순간을 살아라”라는 명언과 또 “삶의 이면에는 늘 죽음이 있다”라는 영화 Great beauty,위대한 아름다움의 명 대사가 스친다.

상가를 들르기 전에 시간이 좀 이른 듯 하여 지나는 길에 낮 익은 이름의 이정표가 눈앞에 와 닿는다. 늘 동문간에 만나면 어데서 산다 해도 고향임에도 위치를 잘 몰라 대응하지 못했던 곳들이다. 내심 미안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에 가보지 못한 우리 동네 인근의 몇 곳을 들리면서 갔다. 동성리, 취생리, 대사리, 운곡리 마을 일대 이다. 그곳에 살았던 초딩, 중딩 친구들이 누굴까 떠올리면서 가을 기운을 머금으며 한바퀴 휙 드라이브 하는 맛이 있었다.

늦가을 빛이 눈부시고 곳곳에서 바람에 살랑대는 억새풀이 가을의 정취를 더했다. 정말 아름다운 마을들이다. 특히 대사리는 초딩 때 소풍시에 올랐던 봉화산 자락의 마을이었다.

마을 위에는 아름다운 호수가 그림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바람이 없어 수면은 유리 표면같이 마을 분위기 만큼이나 맑고 잔잔하다. 주변에는 세종대왕의 왕자묘가 있는 등 풍광과 기세가 대단한 마을인 듯하다.

김중환의 택리지에서 말하는 풍수의 좋은 조건인 배산임수背山臨水가 아닌 배산배수背山背水에 임전답臨田沓의 마을이니 일반적으로 애기하는 풍수와는 격이 다른 특이한 마을인 것 같다. 아름다운 연못 뒷편으로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굉음이 요란하다.

연못의 고요함이 고속도로의 굉음과 대비 되어 자연과 현대 문명의 조화라면 조화를 보게 되는 것같다. 그러나 나의 감성은 아름다운 자연이 문명이라는 편리에 점령되어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산을 등지고 또 물까지 등지고 삶을 살았으니 그 내공과 끈기가 대단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마을 앞에는 넓은 논과 밭의 들판이 펼쳐져 있어 풍요와 담대함 그리고 너그러움이 배여 있었다.

마을의 길이 어두워 저수지 길을 잘 못 들어 비좁은 마을길을 유턴 해오던 중 미끄러지듯 다정하게 올라오는 두 대의 차와 마주했다. 검은색의 내 차와 밝은 톤의 두 대의 차와 대비된다. 그러나 차는 검지만 내 마음만은 농촌의 정경만큼이나 착하고 밝다.

앞과 뒤차에는 사람을 꽉 채워 태운 가운데 스쳐 지나갔다. 바로 우리 동네라면 내려서 인사라도 했을 텐데 좁은 길에서 뒷 차와 조우케 되어 간신히 비켜 빠져나왔다. 좁은 길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것도 어쩌면 인연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스쳤다.

과거에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는데 요즘은 자동차 홍수 시대니 스치는 자동차 속에서 눈빛만 스쳐도 인연 이래야 할듯하다. 그놈의 흔한 인연도 시대에 맞게 진화 되는 가 보다.

아마도 목적은 다르지만 나처럼 고향을 방문 하였던지 요즘 김장철이니 김장을 담그기 위하여 휴일을 이용하여 고향 길에 온 가족이 오는 중 아니면 혼사 등 무슨 행사가 있어서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역시 내 감성과 상상력은 추종을 불허한다.

요즘 그렇게 착한 사람이 흔하지 않은데 내 예감이나 상상력이 사실이라면 착하기도 하려니와 열심히 성실히 삶에 대하는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예감대로 김장을 담았으면 엄청 맛도 있을 듯하다.

운곡리는 꾀꼴봉이라는 산을 우리 동네와 공유하고 있고 우리 마을과 산등성이를 두고 연접해 있는 마을로 어린 시절 명절 때 밤서리를 가곤 하던 마을이라 좀 미안하기도 하고 친근감이 와 닿았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더니 밤 나무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으나 옛 친구들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이곳에 가는 동안에는 마주하는 차가없는 것을 보니 운곡리는 혼사도 없고 김장도 안담는 모양이다.

취생리는 대사리 인접 마을인 듯한데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그저 봉화산 근처겠구나 하는 생각만 하고 들리지를 못했다. 비슷한 산세 비슷한 들판으로 구성된 촌락이나 동성리는 바다와 연접해 있는 것으로 기억 된다. 가을 햇살이 너무 찬란하다.

갈산 초딩때 소풍놀이 갔던 봉화산을 뒤로 한채 홍성 의료원에 도착하니 11시쯤 되었다. 염의식이 바로 전에 시작 되어 30여분 기다려야 상주를 볼수 있단다. 막간을 활용하여 이렇게 몇자 감회를 적어 본다. 조문와서 이렇게 기둥에 기대고 앉아 고향과 고인을 그려보며 글을 써보는 것도 처음있는 일이다. 새로운 경험이다.

오전 중이라서 인지 문상 조문객들이 많지 않았고 잠시 후에 몇몇 고을 지인 분이자 초, 중학교 선배님들이 문상에 합류 했다. 함께 찬상을 하며 몇마디 추억을 떠올리는 시간을 가졌다. 나보다 선배 되는 분들로 얼굴은 알겠는데 이름은 모르는 분들이었다.

염의식을 마치고 돌아온 친구에게 정중히 슬픔에 위로와 예를 갖추고 나와 고인에 대한 추억담을 전하니 친구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갑자기 아버지와의 그리운 추억이 뇌리에 스친 모양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고 편안한 곳에서 영면 하시기를 기원드렸다.

차에 있는 시간만 왕복 6시간 동안의 조문 시간과 거리였다. 그러나 고항이지만 미지의 촌락 몇 곳에서 짧은 가을 여정도 챙기고 잠시나마라도 함께 친구의 슬픔을 위로 해줬으니 짪은 거리 짧은 시간이라는 생각밖에 안든다.

조문 길은 슬픈 길이나 낙엽이 떨어져 봄을 향해 달리 듯 또 하나의 부활이 있음을 믿는다. 그러나 고향 길이나 낯설기만 하던 그곳에서 잠깐 스쳐 지나간 아름다운 고향 사람들과 더불어 추억을 반추 하고 또 하나 추억을 잉태했으니 떠남 길인 동시에 새로운 만남의 길이니 감사하다.

삶의 이면에는 늘 죽음이 있고 삶의 현장에는 늘 만남이 있으니 경건하고 좀더 진솔하게 삶에 대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다잡아 본다. 아울러 대의는 늘 옆구리에 끼고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우리는 지내 온 삶의 특정한 장소에 갔을 때 우리 자신에 대한 여정이 역시 그 곳에서 시작된다. 과거의 어느 시점에 섬은 늘 과거에 대한 회상과 미래에 대한 시작이다.

When we go to a certain place in our past life,

a trip to ourselves also begins at that point..At some point in the past, always recall about past and begin for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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