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Freedom is not free.”

“나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운 것도 없다. 나는 자유다. I have nothing to hope for. I have nothing to fear too. I am free.”

그리스인 조르바의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 글이다.

▲ 석호영 세무사

저자 이름처럼 키스라도 해주고 싶을 정도로 자유의지를 극명하게 표현한 글귀가 맘에 쏘옥 든다.

인생을 가장 열정적으로 살았으면서도 영혼과 자유 의지에 충실했던 삶을 살았던 ‘자유스런 영혼의 상징 그리스인 조르바’를 여운이 가시기 전에 다시 한번 맛갈스럽게 음미해 본다.

주어진 일 주어진 순간 주어진 상황 주어진 사람 앞에서 최선을 다했던 그리스인 조르바, 무책임하고 성실치 못하고 무절제하고 방탕한 자유를 만끽한 조르바가 아니라 일이면 일 사업이면 사업에 최선을 다하며 우주의 원리와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육신을 정신에 담으려 했던 그의 자유로운 삶이 찬미스럽다.

미감과 색감 촉감 등 오감을 통해서 들어오는 아름다움을 그대로 고스란히 느끼고 만끽하면서도 삶을 지탱해야 하는 일에는 최고의 열정을 다했던 조르바는 방탕하고 미친 자유인과는 확실히 결이 다르다는 생각을 해본다.

관습과 체면, 주위의 시선이라는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진정한 자유는 요원하다는 생각을 아울러 느끼게 된다.

영혼의 요구와 끌림에 따라 자유롭게 살면서도 절제되고 틀에 박힌 삶보다도 더 생을 열정적으로 사는 삶, 그것이 조르바의 삶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무질서 해 보이고 흐트러져 보이는 삶도 먼 시간이 지나다 보면 자연스러움 자체가 우주의 큰 질서이듯 인위적인 질서와 형식적인 질서보다 더 차원 높은 질서가 되어 자연과 우주의 질서에 가깝게 접근해 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또 그것이 진정한 자유에 내재된 가치가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본연의 일에 소홀하고 책임이 따르지 않는 자유만을 누렸다면 조르바의 삶에 갈채를 보낼 수 없을 것이다.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삶에 충실하면서도 자유라는 생활에 취해 살았기에 그의 삶을 아름답게 보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영혼의 부름과 세포의 꿈틀거림이 있다한들 외면적 체면과 절제와 금욕을 벗어 던지지 못한다면 무슨 자유가 있겠는가?

온몸과 영혼을 칭칭 동여맨 멍에와 쇠사슬을 과감히 풀어 제껴야 한다. 과거의 틀에 박힌 자신에서 벗어나 한꺼풀 허물을 벗어야 한다. 과거속의 관념과 트라우마에서 과감히 박차고 튕겨 나와야 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묘비에 외쳤듯이 조르바가 열정적으로 행동으로 실천적으로 자유를 만끽했듯이.

“나는 자유다”라고 외치고 행동해야 한다.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미래에 닥칠 일도 자문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난 일이다.”

“자유로운 삶을 위해 과거의 나에 속박 당하거나 미래의 나에 얽매이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라고 조르바 그는 외친다.

I do not think about what happened yesterday. I do not even ask about the future. The important thing is what happened at this moment.

It is living a life of being faithful to the present without being bound to the past me or being bound to me of the future for the free life.

이제 70대에 접어든 사람들은 좀 더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 한다. 70대 이상을 살아 본게 언제 부터인가? 중국 청나라 시대의 왕들은 42세, 조선의 왕들은 39세가 평균 수명였다지 않던가? 100세 시대, 정말 징그럽게 오래 사는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누구도 걸어 보지 않고 경험해 보지 않은 초유의 삶, 덤의 인생 아닌가? 언제까지 화폐를 따라 혼신을 쏟는 처절한 경제적 활동에 억매여 살아야 하겠는가? 그러기에는 너무나 처절하고 허무하다.

우리의 청년들이 우리의 아들 딸들이 광야 아닌 광야에서 저렇게 힘들게 방황하는 것은 70인생을 훅 넘긴 할배들이 할배가 아님을 외치며 경제 전선에서 물러나지 않고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양아찌 꼴통짓이 아니고 무엇인가? (※양아찌 꼴통 표현은 작문적 수사적 표현임을 밝힘.)

70대 이상의 노년들이여 장수시대라는 허울에 처절하게 일자리를 틀어쥐고 있지 말고 그런 미망에서 벗어나자. 과감히 똑똑하고 젊은 후대들에게 인계하여 그들의 능력을 맘껏 발휘하여 개척하도록 하자.

가슴에 불타는 열정과 원대한 꿈과 이상을 담고 있으데 방황하는 우리의 젊은 아들, 딸 그들 에너지에 충만된 청년들에게 과감히 양보하고 화석같은 권력과 돈의 대열에서 이탈하여 아름답고 유연한 자유의 대열에 합류하자.

자유의 영혼을 따라 분연히 나서는 조르바가 되자.

우리는 농경시대 민주화 산업화 시대를 건너 첨단 정보화 시대에 이른 오늘 날까지 할만치 하고 살만치 산 70대이기 때문이다. 찬란하고 아름다운 삶도 있었겠지만 파란만장한 삶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 아니던가? 이젠 자유를 대접해 주자.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외쳤듯 무엇을 더 이상 바라는가?

또 그 무엇이 두려운가? 70대 이상의 건강한 할배들이여 부질없는 욕심과 노욕에서 과감히 벗어나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설레게 하는 그 무엇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하염없이 그 곳으로 발길을 옮기자.

할배들이여 이제 다람쥐 쳇바퀴 그만 돌리고.

“자, 나는 지금부터 자유다.”라고 힘차게 외치면서 또 다른 새로운 삶이 있는 찬란한 미지의 광야로 홀연히 뛰쳐나가자. 그 점이 조르바가 외치고 실천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 생각해본다.

그러나 자유의 가장 큰 담보는 화폐라 할진대 미증유의 장수 시대에 그 점을 간과하고 자유의 전선에 뛰어들라는 것은 사실 공염불일수밖에 없다. 화폐가 곧 가치있는 자유를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Arbeit macht unt frei! 일만이 자유를 보장한다”는 강제 수용소이며 대량학살 현장인 폴란드 아우스비츄 수용서 정문의 글귀가 귀가에 맴둔다. 그러면 수용소에서 일만 있으면 자유라는 말인가? 이런 해괴망측한 역설과 궤변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뿔사!

조르바가 외친 진정하고 초인적 자유나 노자나 부처의 무소유적 자유는 요원하다는 생각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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