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증오라는 것과 늘 한 그릇에 담겨있다.”

“세상에는 에덴동산과 같은 완벽한 곳이 없으며 완벽을 추구하려는 순간 더 큰 재앙과 불완전함이 잉태 될 수 있다.”

“인간이 사는 곳에는 완벽한 이상주의나 완전한 도덕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추구하면 더 큰 모순과 비인간성이 노정된다. 늘 새로운 세계를 추구할 따름이다.”

“Love is with hate always in a bowl.

There is no perfect place like the Garden of Eden in the world, and the moment you seek perfection, more disaster and imperfection can be conceived.”

“There is no perfect idealism or perfect moralism in human dwelling, and if we pursue it, we can expose more contradictions and inhumanity, but only pursue a new world.”

▲ 석호영 세무사

금년 5월경에 감상했던 영화, 데미 무어 주연의 ‘주홍글씨’를 앙콜 감상하였다. 요즘 1주에 한 두편의 영화를 감상하니 나로서는 과거에 비해서는 가히 많은 영화들을 마구 섭렵하고 광풍 흡입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어느 시대 어느 국가든 그 시대의 이념과 체제 그리고 정치권력, 종교와 철학에 의하여 그 속에서 살아가는 구성원들은 휩쓸려 살아가거나 아니면 그에 저항하며 나름대로의 개성과 정신 혹은 정체성을 발휘 내지는 숨기면서 살아가게 된다. 특히 그 점이 혼란기 혹은 과도기라면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공포, 또는 박해는 헤아리기 힘들 것이다.

이 영화를 배경으로 하는 16세기는 콜럼부스에 의해 미국은 신대륙이 발견되어 미국을 그리스트교와 함께 새로운 종교로 뿌리 내리면서 청교도 정신에 의한 신국가 혹은 새로운 터를 일구기 위하여 미국 보스턴을 중심으로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청교도에 의한 개종의 강요와 신체제에 대한 토착민 인디언들의 저항 또한 만만치 않았던 시대다. 전쟁과도 같은 싸움은 늘 존재하는 시기였다. 따라서 구성원들의 종교는 말할 필요도 없고 문화나 생활태도 면에서 프로테스탄트가 지향하는 윤리와 율법을 벗어나서는 생존이 어려운 환경이었다.

즉 '율법과 규범이 생존'이었으며 '질서가 곧 생존'그 자체이며 이상이요 도덕이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특히 평화롭게 자기 터전에서 살던 인디언들에게는 모든 것을 순간 잃게 되었으니 얼마나 억울하고 분통 터졌을까 생각해 본다.

그런 마을에 미모에 똑똑하고 개성과 정체성이 뚜렷하며, 소위 당대 여성 운동가이며 자유주의자인 듯한 멋지고 아름다운 여성이 그 마을에 등장한 것이다. 영국에서 건너온 헤리스 프린이란 이 여성은 등장과 동시에 영화의 스크린을 독점 하는 듯 시종일관 종횡무진 했다.

당시 프로테스탄트들은 성경과 엄격한 율법으로 식민지 즉 토착민인 인디언들을 통치하고 있었으며 그들을 개종 시키려는 정책을 지향했다. 만약 규율을 어길 시는 군중 앞에서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교수형에 처단 하는 등 흔히 식민통치나 새로운 질서 수립시에 대부분 통치자들의 수법이 그렇듯 "공포와 분노의 통치"가 성행되던 때였다.

그러나 늘 식민 통치에는 독립 운동이 전개 되고 어떠한 체제속에서는 반체제 인사가 등장하고 무력이든 사상에 의해서건 혁명의 시기에는 저항의 인사가 있듯이 아마도 혜성 같이 영국에서 날아온 헤리스 프린 이라는 여성이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바로 프로테스탄트들에게는 그런 인사였다.

역사는 가끔 명성이 높고 사회적으로 추앙 받던 지도층 무리들이 가장 추잡하게 쓰여지고 반면에 속박 당하고 보잘것없던 당대의 죄인들이 가장 영웅적이고 덕망있는 인물로 그려 낼 때가 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특이한 캐릭터의 헤리스 프린이라는 여성 주인공의 당당하며 거침없이 행동으로 실천하고 언어로 내 밷는 말들이 빛나 보이고 죄인으로 안보이는 이유도 그를 지지하고 공감하는 나의 정서와 사고방식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듬은 어쩔수가 없다.

물론 영화에서는 프린과 딤즈데일이라는 목사와의 지고 지순하고 애뜻한 사랑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일견 차포 하나도 안 떼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 영화를 감상해야 영화의 진 맛이 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나도 그들의 고통스런 사랑을 순수하게 봐주며 감상하였다. 목사라는 신분은 프로테스탄트중에서도 민중의 정신적 지주요 체제의 핵심이고 그리스도인의 중심이요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헤리스 프린은 부잣집 딸이었으나 파산으로 돈만은 늙은 남성과 사랑없는 결혼을 하게 되고 남편 역시 부인을 별로 사랑하지 않는 듯 영화는 묘사된다. 남편을 뒤로하고 미국에 건너온 프린은 마을에 돌아와 율법에 대해서는 그리 탐탁하게 생각지 않는 듯 했다.

또 그러한 율법을 지킬 마음도 없는 듯 하나 신, 구약성서에 대해서는 지식이 풍부함을 은근히 내세운다. “주님과 직접 대화한다며 성경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상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주변 지도층 부인들의 지지도 받으며 외진 바닷가에 땅도 사고 집도 사서 열심히 농사를 지으며 홀로 살아간다.

딤즈데일과 프린은 서로 서서히 연분을 쌓아간다. 열심히 일하던 프린은 어느 날 빨간 새의 이끌림에 숲속 바닷가에서 나신으로 수영하는 딤즈데일을 엿보게 되고 프린의 마차가 늪에 빠져 허우적 될 때 또다시 딤즈데일의 도움 등으로 연정을 교감하는 듯 대화를 나눈다.

딤즈데일로부터 프린의 남편이 난파로 사망했다는 말도 들으며 연분은 깊어간다. 율법에는 남편 사후 부인이 재혼 하려면 7년을 가다려야 한단다. 뜨겁게 타오르는 사랑이라는 불기둥과 불가마가 어찌 7년을 기다릴 수 있을까? 7일은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7년은 무슨 얼어 죽은 말, 프린의 집에 불쑥 뛰어든 딤즈데일 목사는 프린에게 정념의 눈빛을 감추지 못하며 사랑을 고백한다. 프린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딤즈데일의 설교에 감동했다면서 사랑을 받아들이고 순간 멈칫 할 사이도 없이 키스로 불꽃 튀기려 한다.

그러나 최소한의 양심은 발동했든지 잠시 멈춘다. 그러나 이미 물꼬가 터진 규피트의 정념이 오래가랴. 하녀가 있는 본가를 피해 마굿 간인지 외양간인지 차고인지 두 사람은 곡식 위에서 한몸이 되어 영혼과 육신을 용광로 속에서 마구 불태운다.

하룻밤 풋사랑인지 순수한 진한 사랑의 열매인지 프린은 덜컥 임신을 하였고, 가끔 공식 자리에서 구역질까지 한다. 그런 사실은 마을에 알려지게 되어 프린은 혼자 살며 임신한 것은 간음에 의한 것이라 하여 법정에 서게 된다.

끝내 남자의 이름을 침묵한 그녀는 그곳 총독의 부인에 의한 벼갯머리 코치에 의해 교수형이 아닌 scarlet lettet"A:adultery"를 달아 준다. 역시 "남자는 세상을 지배하지만 여자는 남자를 지배한다"는 말을 그대로 실감케 하는 장면이었다. 진리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총독부에서는 프린에게 북치는 소년을 동행케 하여 프린의 동선에는 늘 북치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호객을 하여 간음한 저 여성을 보고 비난을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간음하면 저런 꼴이 됨을 알린다.

프린은 “간음방지 홍보요원”쯤 되는 듯하다. 그녀는 사탄이요 생육이요 동물이라며 군중속에 몰려 내친다. 그러나 정작 프린은 거리에서나 군중 속에서도 내가 무슨 잘못이 있냐고 당당하다. 대궐에 자나 길에 자나 누워 자는 것은 마찬가지고 곳간이 있으나 없으나 하루 세끼 먹는 것은 마찬 가지인데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어데 있겠뇨.

오히려 프로테스탄트 혹은 총독부 지도층이라는 네 놈들이 더 위선적이고 더 잔인하며 더 사악하고 못된 놈들이잖느냐며 더욱 꼿꼿하다. 그런 신념이 있는데 뭐가 당당하지 못하랴. 정체성과 개성이 뚜렷한 프린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딤즈데일 목사라는 놈은 프린에게 목사로서 율법은 안지키고 임신을 턱 시켜 놓고는 버젓이 율법이 어떻고 하며 명설교를 해대며 신분을 보호한다. 내심으로는 율법 보다 지고한 사랑이 상위에 있음을 소리없이 외치는 듯하다.

둘은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틀림없다. 아마 딤즈데일 이란 목사 놈도 좀 의식이 깬 놈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옳다고 생각하는 바와 입으로 짖어 대야하는 가치가 충돌하니 갈등이 얼마나 심하랴, 그 죄책감이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리라 생각된다.

프린은 "자신은 하나님과 직접 교신 한다"는 둥 당시로서는 얼토 당토 않은 개인 계약이나 경험주의적 사상을 드러내는가 하면 "율법이라는 것은 하나의 상상에 불과 하다"는 성서 철학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거침없이 하고 다닌다.

프린의 음흉성을 늘 주목한 프로테스탄트들에게 딱 걸린 것이다. 그래서 당초부터 빌미를 주거나 책을 잡히지 말아야 되는가 보다. 프린이 그런 면에서는 용의주도하지 못했던것 같다. 모든 것을 갖춘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순수함 그 점이 프린 자체인 것인데 어찌하랴.

하여튼 당시의 시대조류요 최고의 가치인 프로테스탄트의 그리스도 율법에 반하여 저항의 기치를 높이 들고 서로 지고한 사랑으로 펄이라는 자녀까지 잉태, 생산하여 프린은 드러난 간음이란 죄로 온갖 고초와 박해를 받는다. 그러면서도 끝내 사랑하는 딤즈데일을 오픈하지 않고 지켜주려는 프린의 의리는 남자들이 한수 배워야 할 듯하다.

한편 난파로 죽은 줄 알았던 프린의 남편 칠리워스는 우여곡절 끝에 보스톤에 당도한다. 부인이 간통으로 임신 되었고 율법에 의해 "A"자까지 가슴에 달고 시민속에서 망신을 당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부인과 간통한 남자에게도 똑같이 부인과 같은 고통을 주겠노라고 비밀스런 복수를 꿈꾼다.

딤즈데일과 간통한 것을 알아낸 그는 어느 숲속에서 말 타고 가던 사람을 딤즈데일로 오인하여 죽이게 되며 이로 인해 인디언이 죽인 것으로 오해한 정부 측은 인디언에 대해 전쟁에 버금가는 무차별 살해를 가한다.

이 광경을 목격한 칠리워스는 자살을 하게 된다. 비밀스럽게 비도덕적 행위를 단죄키 위해 완전범죄를 꾀한다고 하였으나 역으로 엄청난 재앙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즉 완전함의 추구가 본인은 물론 세상에 더 큰 비인간적이고 큰 재앙을 노정시킨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리고 딤즈데일은 프린이 감싸줘 죄가 세상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목사라는 신분과 금단의 사랑 사이에서 양심적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프린과의 비밀스런 사랑을 유지해 가는 바, 처절하기도 하였다.

결국 프린을 포함하여 만은 여성들이 마녀 사냥의 덫에 걸려 교수형에 처해질 무렵 딤즈데일은 교수형대에 분연히 뛰어 올라가 “나는 프린을 사랑한다. 바로 내가 펄의 아버지다”라고 프린과의 관계를 용기있게 고백한다.

딤즈데일 목사에 의해 지도층의 위선과 자신들의 사랑이 정당함을 외치는 순간 군중들의 동의를 받으며 인디언들에 의해 총독부가 일망타진 되고 둘은 살아나 캐롤라이나주에 안식처를 잡고 펄과 행복하게 잘 살았다.

과연 딤즈데일과 프린이 죄인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누가 그들의 순수한 사랑에 돌팔매를 던질 수 있을 것인가? 구성원 통치를 위한 프로테스탄트들의 율법과 윤리 기준이 과연 지고한 가치이며 개인의 사랑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하는 영화였다. 프린이 말했듯 그러한 것은 인간들의 상상의 산물에 불과한 것이 아닐지 생각해 보게 된다.

"당대의 명성가가 당대의 죄인보다 더 추잡하고 더러운 경우가 더 많다"라는 말이 다시금 오버랩 되었던 영화였다. 세상에는 겉치레로 포장하여 더럽고 구린 뒷모습을 덮고 사는 무리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딸 펄은 "아버지는 본인이 10살도 안되어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재혼도 안하고 살다가 돌아가셨다"고 회고하여 주위에서 그 점을 벌을 받아서라고 얘기한다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과연 그럴까? 맞을까? 시대를 앞서간 프린과 딤즈데일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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