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학년 상급생도 낙엽 줍는 활동에 참여하여 하급생에게 솔선 수범합시다."
Senior 6th grade students should also participate in the declining activity and set an example for the lower class.

"호영아, 너는 2등도 안된다. 오직 1등만이 있을뿐이다,"
You do not even have a second place, only the first.

고향!

▲ 석호영 세무사

들판에는 한가로히 풀을 뜯던 얼룩배기 황소가 지친 듯 피곤한 듯 하품을 하고 파아란 하늘에는 간간히 비행기가 길고 하얀 꼬리를 남기며 지나가고 아침에 눈을 떠 마루에 걸터앉으면 동녁에서는 정열의 에너지를 듬뿍 머금은 태양이 나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던 곳!

넓은 벌을 휘도는 실개천이 모여 와룡천이 굽이굽이 서해로 질주하고 꾀꼴봉 뒷산을 중심으로 연이은 산줄기는 병풍처럼 마을을 에워싼 한 폭의 동양화같이 아름다운 곳.

그런 아련한 정경이 가슴 깊숙히 듬뿍 담겨있는 곳이기에 지금도 가끔 고향을 찾게 되고 자주 머릿속 으로 그려 보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고향은 늘 어머니 품과도 같이 포근하였고 외롭고 고독할 때는 다정한 동반자가 되고 지침이 올 때는 한번 더 몸과 마음을 옹골차게 추스르게 하는 디딤돌 같은 곳이 고향이 아녔을까 생각해 본다.

국민학교 3학년 때까지는 어린 마음에 나보다 키가 크거나 부잣집 자식인 듯 하거나 몸집이 나보다 큰 학생에게 다소 주눅이 들었고 부럽기도 하였다. 4학년이 되면서 학업에서 다소 성적이 붙기 시작하면서 학업 경쟁에서 우월한 결과가 나오고 각종 운동이나 놀이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학교생활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5학년 때부터는 학업 성적도 더욱 우수했고 학급 반장도 하고 학생회 활동을 하게 되면서 국민학생으로서의 사회성을 키워나가는 도약기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또 반장이 되니 자연 총학생회 회의에도 참여 할 수 있게 되었고 발언도 할 수 있게 되어 나의 생각과 정체성이 서서히 드러나는 계기가 된 듯 하다.

5학년 어느 늦 가을날이었던 것 같다.

각 학년 각급 반장이 참석하는 총학생회에서 운동장 청소가 회의 안건이 되어 토의하였던 바 나는 그 자리에서 "6학년 상급 학생들도 하급생에게 모범이 되어 솔선수범해서 낙엽을 함께 줍자"라고 의기있게 주장하였다.

당시 동료나 선배 학생들이 의아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다. 또 서슬 퍼런 6학년 선배들의 눈초리가 나를 쏘아 보는 것 같았다. 이름은 밝히기 곤란하나 그 선배의 모습이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그러나 순간 당시 학생 주임으로서 회의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김광섭 선생님께서는 대견하다는 듯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심을 섬광처럼 내 눈에 들어왔다.

선생님의 그런 무언의 지지와 응원에 내가 그래도 상급생 면전에서 용감하게 발언을 잘했구나 하고 내심 나 스스로 자부심을 느꼈다. 6학년이 되어 3반에 배정되어 자리에 앉으니 총학생회의 석상에서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시던 김광섭 선생님께서 담임이 되셨고 웬지 내 마음이 편했다.

반이 배정된 첫날 담임선생님께서 교단에 서시더니 나를 향해 말씀하시기를 "호영아 그 자리가 작년에 갈산중학교 수석 합격한 유ㅇㅇ 학생의 자리야" 라고 사실인지 암시인지는 모르지만 반 동료들이 있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말씀하셨다. 사실이었다. 나는 그 순간 중학교 입학을 수석으로 해야 된다는 말씀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6학년 때에는 학교 대표 육상선수로 활약하여 인근 학교에서 가을 체육대회가 개최되면 400미터 계주시 동료선수와 함께 우승기를 휩쓸어 왔고 도민체전시에는 초등부 군대표 씨름 선수로 출전하기도 하였다.

씨름 선수로의 발탁은 나도 나를 모르게 스스로도 놀랄 내속에 숨어있던 재주였던 것 같다. 씨름에 대해서 배운 적도 없는데 상대를 쓰러 뜨렸다. 다행히 초등부는 당시 도내에서 5팀밖에 출전을 하지 않아 홍성군 팀이 우승하는 역사를 기록할 수 있는 행운도 따랐다.

초등학교를 마무리하는 시점인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6학년 어느 날 나에게 한통의 카드가 날라왔다. 난생 처음 받는 크리스마스 카드였으니 과연 어떤 내용일까 어린 가슴은 콩닥 콩닥했다.

"호영아 너는 2등도 안된다 오직 1등만이 있을 뿐이다." 김광섭 담임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카드였고 내용 이었다. 짧지만 내가 그 후 평생 받은 크리스마스 카드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준 카드였고 나에 대한 인생의 이정표 내지는 출사표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러한 연유로인지 내가 노력을 하였든 다른 동료학생이 노력을 덜하였든 나는 갈산중학교를 수석합격하게 되었고 중학교 3년 동안 졸업성적을 포함하여 수석을 거의 놓치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행운이기도 하였다.

당시에 입학성적과 학업성적 덕으로 중학교 내내 충무장학금, 김일창 동창회장 장학금, 4.19장학금 등 장학금을 몽땅 나에게 수여되어 호주머니는 늘 궁색하지 않았다.

국민학교 시절!

총학생회 회의석상에서 의기있게 발언했던 추억과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크리스마스 카드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 온 인생여정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줘왔던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6학년 때에는 총학생회장, 총주번장, 전체급장 등 3권을 장악하고 학생회활동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런 초등, 중등학생 시절을 지금 생각해 보면 학생으로서는 학업이나 학생회 활동, 육상 등 스포츠면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면서 자신있게 생활한 화양연화의 유년시절이 아녔던가 생각해본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사람과 세상을 아름답게 볼 수있는 정서와 마음을 키웠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사춘기, 유년시절이었기에 더욱 가슴속 깊이 각인되었던 듯 하다.

학생회의에서의 발언에 선생님으로부터의 지지가 그후 사물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옳은 일이라면 주눅들지 않고 의기있고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은 나의 정체성이 되었으며 은사님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늘 가슴 한 켠에 품고 다녔지 않나 생각해본다.

그러한 기백이 있었던 것은 비약일지는 모르지만 김좌진 장군 등 호국열사들을 유난히 많이 배출한 우리 고향땅에서 묻어난 태생적 DNA가 나에게도 스며있지 안을까도 생각해본다.

60갑자 인생의 한바퀴를 돌아온 현 시점에서 전체적으로 보면 마디마디 위험하고 중요하고도 운명을 가르는 의사결정시에 그렇게 비굴한 쪽에 발을 담갔거나 비굴하게 처신 하지는 않았구나하고 자부도 해본다. 늘 은인자중하면서도 표현해야 할 때와 장소에서는 머뭇거리지 않았던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인생이라는 것은 아무리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해도 천재성을 발휘하며 성공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치열하고도 파란 만장한 삶에 분연히 맞서고 도전해가지 안으면 성공된 삶이 보장되지 않는다 한다.

중학교를 수석 졸업 후 신동석 교감선생님께서 예산고등학교 특수 장학생 시험에 응시할 것을 추천하여 3년동안 특수 장학생으로 학비면제를 받으며 기숙사 생활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고등학교시에는 고교 백승탁 교장선생님의 추천으로 국비학교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으니 나는 초, 중, 고, 대학교를 부모님의 경제적 도움 전혀 없이 장학생으로 학업을 마쳤으니 경제적으로 형편이 넉넉치 않았던 부모님께도 그런 면에서는 어느 정도는 효도를 하지 않았을까도 자위해 본다.

특히 고등학교때의 전국 고전 자유 교양대회는 나에게 잊기 어려운 경험이었다. 논어, 소학, 불법전, 당시, 한시, 구운몽, 채별감별곡, 사씨남정기, 숙영낭자전 등의 고전을 읽고 도대회, 전국대회를 치루는 것이었다. 막연히 읽는다기 보다 전편을 암기해야 문제를 풀수있는 대회였다. 다행히 공부한 보람이 있어 전국대회에서 금상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다른 동료학생들은 대입준비 등 일반 학과 과목에 야간학습까지 하며 열심인데 학교대표로 고전경시대회 선수로 차출한 담임선생님이 원망스러웠지만 당시에 읽은 고전은 내 삶의 마디마디에서 자양분이 되었다.

국세청 업무는 내가 소속 직원들과 더불어 리더십을 발휘하며 좋은 성과를 도출하며 근무하기에 적성에 맞는 것 같았다. 세무서장 후보자 과정을 수석으로 이수한 후 고향 근처의 서산세무서 초대 서장을 마치고 울산세무서장 시절에는 기관장으로서 업무집행을 탁월하게 잘 했다는 국세청의 평가로 당시 청와대 인맥과는 아무 연고도 없는 나를 국세청장께서 청와대 민정 비서실 근무를 추천 해주었다.

1년 2개월여의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실 행정관으로서의 근무는 나에게 또 다른 경험이었다. 국가권력의 최고 컨트롤 타워에서 정책이 어떻게 디자인 되고 집행되는 가를 깊고 폭 넓게 경험할 수 있는 기간이었다.

내가 담당했던 업무는 정부 7개 담당부처의 공무원 3급 이상 부터 장관과 그 산하 공기업의 임원급과 공기업 사장의 임용, 승진, 전보, 발령 등의 인사시 인사검증과 공직 기강업무를 관장하였고 민정에서 다루는 민정시찰 후 정보보고, 제도 개선, 정책 평가 등 제반 업무들이었다.

권력 기관으로서 힘을 빼려고 노력하며 능력있고 청렴한 공직사회 분위기를 조성키 위해 장관급 임용시 청문회 제도를 동료들과 성안한 것과 수많은 인재들을 검증하면서 사람을 함부로 쉽게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인간에 대한 경외로움 등은 인상에 남는 업적과 교훈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청와대 근무 후 국세청에 복귀하여 부이사관 승진, 또 고위공무원단 승진 후 명예퇴직 후에는 두산그룹 산하 삼화왕관 주식회사에서 부회장, 대표이사 사장으로 3년간 대기업을 경영해 볼 수 있는 경험도 해볼 수 있었다.

또한 현대글로비스 주식회사 사외이사겸 감사위원장의 경험은 대기업의 경영시스템을 이해 할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요즘은 "세무법인 오늘"을 운영하는 자유 직업인으로서 세속적 사회적 기준보다는 내면의 기준에 충실하면서 지내려고 노력하나 쉽지는 않은 것 같다.

이렇게 학창시절과 사회인으로서 지나온 길들을 잠시 반추 해볼 때 나름대로 주어진 일에는 치열하고 열정적으로 임했던 것으로 생각이 되나 결과적으로 보면 나의 의도와 생각대로 모든 여정이 이뤄진 것만은 아닌 듯 하다.

그러나 큰 줄기로 보면 매사에 나의 뜻과 정체성을 실어 소신있게 그리고 비굴하지 않게 표현할 때 표현했고 행동할 때 행동하면서 도전과 열정의 나의 길(my way)을 걸어 왔다고 어느 정도는 자부해 보고 싶다.

어려서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운명아 내가 간다 길을 비켜라"라는 말은 나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었고 나름대로는 인생을 개척하는 삶을 살기 위한 일정부분의 노력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내가 감명깊게 감상한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작가는 "삶에서 가장 큰 인생의 감독은 우연"이라고 설파하는데 나도 이점에 대해서 자신있게 부인하기는 쉽지 않다는 생각도 해본다. 동의 하는 쪽이다.

어느 순간은 거역 할 수 없는 운명처럼 어느 순간은 우연한 계기로 때에 따라서는 나의 의도로 인생 여정은 소용돌이도 치고 탄탄대로를 순탄하게 달리기도 하고 높은 파도를 파고들어 힘든 항해를 해야 했고, 어느 순간에는 순풍에 돛을 달고 낭만을 구가 하면서 순항할 수도 있었던듯 하다. 결국 운명과 우연과 의도는 사돈에 팔촌 보다 가깝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국민학교와 지금의 이 순간까지 내 삶의 마디마디에 걸쳐있는 편린들을 늘어 놨지만 그래도 국민학교시절 부터 현재까지 나를 관통할 수 있는 언어를 고르라면 6학년 당시 김광섭 담임선생님의 크리스마스 카드의 말씀과 전체 학생회에서 상급생을 향해 당당히 발언 했던 순간일 것이다.

순수한 감성이 충만했던 어린 시절의 그런 경험은 현재까지의 내 삶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끼쳐왔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듯 하다. 그런 의미에서 내 삶에 자양분이 되었던 인성교육은 국민학교에서 90%이상은 이뤄진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세상과 사람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정서와 마음을 키워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나짐 히크메트의 시를 첨언하며 펜을 내려 놓으려한다.

진정한 여행 / 나짐 히크메트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이다

무엇을 해야 할 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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