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ee as the wind!
바람처럼 자유롭게 저 바람처럼 자유롭게,

얼마나 가슴이 후련해지는 말인가. 영화 빠삐온 주제곡이다.

▲ 석호영 세무사

오늘 잠에서 깨어 노래를 들으니 아침이 가벼워짐을 느끼게 된다. 그동안 어느 연말 송년회에 가서 평소 거의 마시지 않던 음주를 좀 과하게 했더니 몸살 감기를 직통으로 걸려 비실비실 중이었다.

감기는 문자 그대로 기를 감소시켜서 인지 의욕을 빼앗고 맥을 못추게 한다. 보름여가 지난 이젠 좀 낳아진 느낌이다. 감기 몸살은 약 복용하면 14일, 안 먹으면 보름이라더니 딱 맞는 말인 것 같다.

떡 본김에 제사 지낸다는 말처럼 감기로 비실거리는 김에 빠삐온 영화 감상을 재탕하였다.

"I accused you of a wasted life"
"나는 너를 시간을 낭비한 죄로 기소한다"

빠삐온 스스로가 자신에게 내린 죄목이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죄란다. 감방에 가게된 직접적인 죄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살인 누명을 쓰고 감방에 갇혔으니 얼마나 억울하고 분통 터졌겠는가? 그 것을 견뎌 내려면 빠삐온 자기 자신에게 어떤 죄목이라도 씌워줘야 했던 모양이다.

엘빈토플러는 그의 유명한 제 3의 물결이라는 저서에서 '시간은 공간을 지배한다'라고 했듯이 어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꼽으라면 시간일지도 모르는데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인식을 않고 살아가는 것 같다.

빠삐온도 시간을 좀 촘촘히 아껴 쓰라는 의미로 자기 죄목을 그렇게 정했으리라 생각된다. 영화가 가끔 나태한 나에게 던져주는 쓸 만한 메시지다. 그런 연유로 영화를 감상하게 되는 것 같다. 슬쩍슬쩍 각성을 해주니 말이다.

영화 빠삐온에서 주인공은 결국 자신은 시간을 낭비한 죄로 기소가 되었고 살인 누명을 쓰고 사형을 언도 받는다. 우리 대한민국에 시간을 낭비한 이런 죄가 있다면 나는 수백 번 기소되어 감옥에 들랑날랑 거렸어야 했을 듯 하다. 아마 지금도 그곳에 있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살기 좋은 대한민국에는 그런 죄가 없어 나 같은 게으른 사람도 주제곡 노래 속 가사와 같이 퍼득이다 주저앉는 나비 신세가 아니라 펄럭이며 조금이나마 날며 살게 되는 것이 아닐까하여 고마운 마음이다.

유년기와 청년기 사이에 감상하였던 저 영화는 많은 감동으로 나의 가치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살면서 비교적 자유라는 것에 대해 늘 대우를 해주며 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래서 저 주제곡은 늘 내 뇌리와 가슴에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사운드 트랙의 진동으로 남아 있다고나 할까. 저 노래를 들으면 나 자신이 하늘을 날고 바다에 둥둥떠 수영을 하는 느낌이 든다.

아마 빠삐온이 수영을 감옥에서 바퀴벌레한테 강습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든다. 바다에서 수영하는 폼이 한마리의 바퀴벌레 같았으니 말이다.

사실은 시간을 낭비한 죄쪽에 더 신경써 주고 대우를 해줬어야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다. 그 당시 영화를 감상할 때는 시간을 낭비해서 기소된다는 내용 보다는 감옥에서 탈출하려는 주인공 빠삐온과 드가의 필사적인 노력에서 자유의 소중함에 꽂혀서 영화를 감상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무튼 좀더 시간을 짜임새 있게 활용하고 사회적 기준과 규범과 틀에 충실 했었더라면 지금쯤 어떠했을까? 좀더 큰 자유를 향유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반성도 해본다. 그러나 자유를 좀 일찍 가불해서 사용했노라고 위로해 주자.

사실 시간을 낭비한 보람으로 그때그때 짜투리 자유는 어느 정도 누리며 살아왔다는데 대해서 자부를 느끼고 자위도 해본다. 자유라는 큰 개념과 인연이 될 수 있었던 장본인이 빠삐온이라 생각하니 역쉬 빠삐온 그 분과는 인연이 남다른 느낌이다.

유년기에는 빠삐온 이었지만 요즘은 자유스런 영혼의 상징 그리스인 조르바가 좀더 자유에의 소중함과 의지에 대해서 더욱 강렬하게 영향을 주고 있음을 부인키 어렵다. 또 진정한 영혼의 자유를 극명하게 깨닫게 해준 영화 속의 친구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도 의문은 빠삐온의 감방 친구 드가는 죽을 고비를 넘겨 감옥을 탈출 했으면서도 왜 빠삐온과 함께 그렇게 목숨을 걸고 추구하던 자유를 향해 저 절벽을 뛰어 내리지 않았을까이다.

빠삐온과 드가는 감옥에서는 탈출했으나 문명 세계와는 동떨어진 섬에 갖히게 되었다. 드가는 그 섬역시 감옥보다는 좀 편한 곳이기는 하나 원주민과 어울리며 그런대로 적응하며 살아가는 것 같았다.

차선의 자유를 선택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다에 뛰어 내리면 상어밥이 되거나 죽을지도 모르니 섬 생활을 택하지 않았나쉽다. 아니면 빠삐온 보다는 자유에의 강렬한 의지가 부족하든지 용기가 없었을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有錢無罪 無錢有罪, 有權無罪 無權有罪’ 빽없고 돈없던 당시의 빠삐온으로서 죄아닌 죄로 감옥에 갖히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감옥은 자신이 묵어야할 곳이 아님을 깨닫고 부단히 탈출을 시도하고 또 계속 실패하여 잡혔으나 끝내는 탈출하여 드가를 뒤로하고 코코넛 자루를 부둥켜안고 천애의 절벽을 과감히 뛰어 내린다.

드가와는 격이 다르고 자유에의 의지에 있어서는 차원이 다름을 느끼게 되었다. 아니 삶에 임하는 가치관이나 방식이 달라서였을 것 같다. 빠삐온이 진취적이고 동적이라면 드가는 보수적이고 소극적이라고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문명세계에 대한 동경도 드가와는 다른 것 같다. 우리의 삶도 이 두 사람처럼 무엇을 어떻게 판단하고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갈릴 때가 많지 않던가?

"나는 이렇게 바다에 떠있노라, 이놈들아 나는 살아 있노라고"외치며 자유를 그리며 절벽을 뛰어내린 빠삐온의 선택과 섬에서의 일상을 선택한 드가를 두고 누가 옮고 좋은 선택을 했느냐를 말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고 생각 된다.

그러나 왓슨 베이 꼭대기에서 코코넛 다발 두개를 두고 떠나는 자와 남는 자의 뜨거운 포옹과 우정은 빠삐온에서 중요한 화두로 두지 않을수 없을 듯하다.

"그는 자유의 몸이 되어 여생을 자유스럽게 잘 살았고 기아나의 혹독하고 잔인한 감옥도 그의 자유를 막지는 못했다"라는 마지막 내레이션이 여운으로 오래 남을 듯하다.

지난 날은 강물처럼 흘러 옛 꿈이 되었습니다.
내 마음 자락에 아직도 남아있는
넓은 들판과 하얀 조약돌이 깔려있던 시냇가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가득찬 그곳

창공을 날고 있는 나비들의 날개 짓을 통해
나는 내가 보고 싶었던 모든 것을 보았습니다.
내 마음을 향해 노래 불렀던 듯한
나비들의 노래 소리가 들립니다.

이봐요 이봐요 나를 바라봐 주세요.
바람처럼 자유롭게 저 바람처럼 자유롭게
당신은 그렇게 되어야 해요.

사랑은 내 인생의 꿈이었어요.
사랑이 내가 알고 있는 최고라고 생각했지요.
이제와 그 사랑의 노래를 부르노라니
속절없이 눈물만 나네요.

노래하는 나비와도 같았던 유년의 한때는
다시는 되돌릴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내 마음 속엔 아직도
속삭이는 한 소리가 있어요.
바라 보세요 그러면 볼 수 있을 거여요.

내가 격었던 온갖 소중한 경험
인생의 모진 고난과 또한 즐거웠던 일들
돌이켜 보니 그다지 큰 후회는 없습니다.

만약 우리 삶을 사랑한다면
나비처럼 날수 있는 기회가 있을 거여요.

그러나 그대
주저 앉아 버린다면
나비의 퍼득임처럼
허무한 몸부림이 되고 말겠지요.

오 내마음 깊은 곳에는 아직도
외치는 한 목소리가 있습니다.
바라보세요 그럼 보일 거에요.

바람처럼 자유롭게 저 바람처럼 자유롭게
당신은 그렇게 되어야 해요.

노래를 듣고 있노라니 빠삐온이 자유를 찾아 상어가 우굴 댄다는 파도 아가리로 뛰어 내렸던 저 절벽에 한번 서서 탁 트인 남태평양을 바라보며 자유의 혼을 흠뻑 마시고 싶어 지는 것은 어떤 연유일까?

거대한 절벽이 호주 시드니 항 입구에 있는 왓슨베이의 Gap park란다. 가보고 싶어진다. 못말리는 자유에의 영혼, 질주본능이다.

'Free as the wind' 말로만 되네여도 가슴이 후련해진다.

자유의 가치와 시간의 가치에 대해서 잠시라도 생각해 보는 순간이었다. 오늘은 어제 죽어간 사람이 그렇게 그리워하던 소중한 시간이다. 이제 몸살 감기도 자유를 찾아 내 몸을 떠나려 하니 나도 서서히 움직어 봐야 되겠다. 빠삐온 처럼 자유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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