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nning time 장장 200여분 동안!!

단 한번도 웃거나 눈을 깜박이지 않고 우수에 찬 눈동자로 시종일관 사람이나 사물을 응시만 하는 닥터 지바고 (배우:오마 샤리프), 그는 무슨 사연이 있을까?

▲ 석호영 세무사

첫눈이 한꺼번에 왕창 쏟아져 내려서인지 좀처럼 눈을 보기 힘든 겨울이 지속된다. 내가 유난하게 눈을 기다리는 연유는 분명 있다.

눈이 내리면 닥터 지바고 Dr.Zivago라는 겨울 영화를 감상하기 위해서다. 기다림의 인내심이 임계점에 다다른 나는 결국 눈이 없는 새벽에 뜬 눈으로 지새며 닥터 지바고를 만나고 말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일 많이 감상한 영화를 꼽는다면 1965년에 첫 상영된 Dr. Zivago와 같은해 출시된 sound of music이란다. 그리고 세번째가 gone with the wind라고 한다. 모두 거작이고 명작들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다.

닥터 지바고는 5~7회씩 반복하여 감상한 사람도 있다한다. 겨우 2번 감상하고 후기를 쓰려하니 그분들이 의식되고 솔직히 공자 앞에서 문자 쓰는 것 같아서 미안한 생각에 인색하고 싶지가 않다. 그러나 영화는 보는 사람들의 관점과 감성에 따라서 십인십색이고 엿장수 맘대로 표현해도 시비걸 사람없고 붓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써도 되니 좋다.

닥터 지바고의 역사적 배경이 되는 소련이나 러시아 하면 순간 뇌리에 스치는 단어들은 무었일까?

세계에서 가장 넓은 땅의 나라, 광활한 시베리아와 그 설원을 달리는 횡단 열차, 알콜 그자체인 보드카, 화려한 겨울 궁전 Winter palace, 크레물린 궁전, 레닌 그라드로 알려진 쌩트 페테르부르크 광장, 황금 100톤으로 지어졌다는 이삭 성당 등이 아닐까 생각된다.

또한 이 지구상에 최초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건설한 레닌이나 공포 정치와 피의 숙청을 단행한 독재자 스탈린, 전쟁과 혁명, 공포와 숙청의 나라로 쉽게 떠오른다.

결국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도 페레스 트로이카(개혁)와 글리스 노스트(개방) 정책을 펼치던 과정에 고르바쵸프에 의해 연방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소련은 1991년 12월 25일 70여년 만에 공산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종언을 구하고 막을 내린 나라로 기억 된다.

민주적 자유와 독립을 위해 총칼과 탱크에 맞서 백색의 눈위에 시뻘겋게 뿌려졌을 엄청난 피와 희생의 댓가로 쟁취한 독립을 러시아인의 57%가 후회한다니 향수에 대한 인간들의 무한대의 욕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특히, 소련하면 연상 되는 것은 세계적인 대문호 톨스토이, 도스트에프스키, 우리에게 '삶'이란 시를 선사한 푸시킨과 닥터지바고의 원작자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등의 소설가들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혁명과 전쟁 그리고 폭정과 독재, 공포와 숙청, 혹독한 추위 등의 절박한 환경이 역설적으로 문학이 찬란하게 꽃필 수 있는 토양과 순기능으로 작용하지는 않했을까하고 나름대로 상상도 해본다.

눈속에서 피어나는 꽃이 생명력이 강하듯 많은 문학 작품을 접한 것은 아니지만 러시아 문학은 정말 매력 덩어리이고 깊이가 있어 좋다. 그러한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 역시 그러리라 생각된다.

닥터 지바고의 원작자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러시아 혁명 이데올로기를 거부한다 하여 불순분자로 낙인찍혀 국외로 추방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당시 수상 후루시쵸프에게 건의하여 추방은 면했다고 한다.

파스테르나크가 노벨 문학상 후보로 선 되기도 하였으나 소련 작가협회로부터 제명을 당하는 등 소련 정부의 압력으로 수상하지 못하여 소련은 대문호가 많으나 노벨 문학상과는 인연이 없는 나라이기도 하다.

아마 파스테르나크는 위로부터의 급격한 혁명이 아니라 전통을 중시하연서 노동자나 시민 개개인의 변화와 개혁을 통해 사회혁명이 이루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즉 위로부터의 일방적 급진적 혁명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혁명 노선을 지향한 듯하다.

닥터 지바고는 1912년 황제 짜르 정권 말기부터 1914년 발발한 1차 세계대전, 1917년 레닌에 의해 주도된 볼세비키 혁명과 내전, 1922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건설 그리고 공포 정치와 숙청의 상징인 스탈린 시대에 걸쳐 전개되는 격동기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이다.

러시아야말로 몽고 지배 400년, 짜르 전제 황제 지배 300년, 적군과 백군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 혁명을 통한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70년 또 19991년 사회주의의 붕괴 등 슬프고도 모진 역사를 지닌 나라라는 생각을 해본다.

주인공 닥터 지바고는 유년시절에 아버지는 행방불명이 되었고 어머니마저 지바고가 8세 되던 해에 사망하여 상주로서 어머니 장례를 치른다. 다행히 당시 러시아의 대지주이며 부호인 그로메코가에 입양이 되어 고아로서 생활하게 된다.

그로메코가에는 고명딸 토냐가 있고 지바고는 토냐와 동생 오빠 사이로 지내게 된다. 지바고의 유년시절은 철권 전제 황제 짜르시대의 끝자락으로 수탈과 폭정의 시대였다.

짜르시대 당시에 문맹률이 90%, 농노가 90%, 세율이 90%였다니 이러한 통계자료 하나만 보더라도 시민들의 삶이 어떠하였겠는가를 알 수 있다. 피폐하고 황량하다는 말은 젊 잖은 표현이고 지옥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바고는 대지주 집안에 입양되어 경제적으로나 학업에 어려움없이 생활하는 것 같았다.

지바고는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거리에서 수많은 학생과 시민 노동자들이 경찰과 기마병들에 의해 쫓기고 무참히 살해 되는 강렬한 장면을 목격하고 의학도가 되어 삶을 지탱하고 사회에 봉사하겠다는 목표로 열심이 학업에 임한다.

그레메코가에서는 지바고의 인물됨을 보고 고명딸 토냐와의 혼사를 이루어 인연을 맺어 주려한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리고 귀족들의 파티가 열리던 어느 만찬 축제장에서 지바고와 토냐는 백년 계약의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한편 여주인공 라라는 교사라는 직책의 엘리뜨이나 홀어머니와 함께 살며 어머니는 당시 변호사 신분인 꼬마로프스키라는 사람과 내연관계로 지낸다. 라라는 미모가 뛰어나고 육감적이며 도전적인 외동딸이다.

호색한인 꼬마로프스키는 팜므파탈의 치명적 미모의 라라에게까지 흑심을 품고 정부의 딸을 결국 겁탈하게 된다. 라라에게는 파샤라는 행동하는 혁명가 남자 친구가 있다. 그도 기병대에 폭행을 당하여 쫒기다가 라라의 집에 도피하고 간단히 치료 후 휴대한 권총을 잘 숨겨 두도록 라라에게 부탁하고 떠나간다.

어머니의 내연남 꼬마로프스키는 어머니와 라라를 수시로 괴롭히고 라라는 이 상황을 면하기 위해 방책을 강구하던 중 꼬마로프스키는 라라를 또 강제로 겁탈한다.

라라는 어느 날 이 상황을 끝장내기라도 할 듯한 기세로 남자 친구 파샤가 맡긴 권총을 옷속에 숨기고 어디론가 허겁지겁 간다. 가는 도중 그녀의 남자 친구 파샤를 만났으나 가고자 하는 곳으로만 곁눈질도 않고 한사코 서두른다.

아뿔사!

라라가 간곳은 축제가 진행되고 있고 지바고와 토냐의 결혼식이 한참 진행되고 있는 곳이었다. 물론 라라 어머니의 내연남 꼬마로프스키도 현장에 있었고 라라는 그를 향해 정조준하여 권총을 발사했다.

순간 결혼식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결혼식에 임하던 닥터 지바고는 권총을 발사한 라라에 대해 강력한 인상을 받게 된다. 지바고와 라라의 숙명적 만남의 시작인 듯 했다. 라라는 뱃장도 두둑한 여성인가 보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드는 세르비아 청년이 발사한 총으로 살해 되게 된다. 이 총성 한발은 1815년 나폴레옹 체제가 붕괴되어 유럽은 100여년 동안 평화를 누리던 상황이었으나 그런 평화체제를 한순간에 송두리째 빼앗아 가게 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은 우리가 잘 알듯이 당시로서는 역사상 최고의 살상이 가능한 기관총을 비롯한 문명적 무기가 총동원된 전쟁이며 그 참혹상은 이루 헤아리기 힘든 상황이었다.

의사인 닥터 지바고는 군의관으로서 러시아의 동부전선에 징집 되어야 했으며 라라는 간호원으로 자원하여 전장에 뛰어들게 된다. 전장에서 두 사람은 시체를 앞에 놓고 우연히 또 조우하게 되고 결혼식장에서의 사건을 나누며 두 사람의 숙명적 애정 전선을 실제 전장보다도 뜨겁게 달궈지게 된다.

라라의 남편 파샤가 전선에 배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기 위해 간호원으로 입대한 라라는 파샤도 좋지만 지바고에게 끌리게 되고 지바고는 토냐를 비롯하여 모스크바에 있는 가족을 사랑하나 어쩔 수 없이 라라에게 빨려들게 된다. 둘은 전장에서 자연스럽게 스폰지에 물이 스미듯 연인으로 깊어지게 된다.

전쟁이 비극적이고 슬픈 것은 자기 의사대로 살아갈 수 없고 자유의지대로 살아갈 수 없음에서 일 듯하다. 어쩔 수 없이 지바고는 가정을 등져야 했고 라라 또한 파샤와 헤어져야만 하는 전장에 내 몰리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전쟁은 러시아나 독일에게 국가 재정의 고갈은 물론 전선의 병사들에게도 염증을 유발했다. 사병들의 염전 사상은 장교들을 행진중 살해하는 사태에까지 야기 되는 등 군기마저 엉망이 되었다.

결국, 사회주의를 싫어하나 전쟁을 멈춰야 했던 독일은 반전주의자이며 사회주의자인 레닌을 러시아의 지도자로 봉인열차를 통해 보내게 된다.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독일의 전략적 선택이었던 것이다.

1917년 4월 모스크바에 도착한 대머리 레닌은 공산 사회주의 혁명에 착수하게 된다. 또 제 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었으나 세상은 그렇게 만만치가 않았다.

황제 짜르 체제와 브르조아지가 이끄는 임시정부의 백군과 노동자 농민의 공산주의의 소비에트 동맹군인 적군과의 내전은 전쟁의 참화는 참화가 아닐 정도로 지독하고도 매일 곳곳에서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벌어졌다.

결국 1917년 10월 러시아는 레닌 주도의 적군인 소비에트당의 볼세비키파의 승리로 세게 최초의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즉 소련을 탄생 시키게 된 것이다. 소련의 탄생은 미,소 냉전의 서곡이었다.

사회주의 정부는 곧바로 무자비하게 반체제 인사와 지식인을 가차없이 숙청하고 사유재산은 물론 소소한 일상에 필요한 살림살이까지도 낱낱이 징발하였다. 당시 최고 지주였던 지바고와 토냐 집안은 지주에다 지식인의 가문으로서 당연히 수탈과 착취 대상 1순위였다.

전쟁이 끝나고 라라와 눈물을 머금고 헤어져 모스크바에 돌아온 지바고는 혁명기에 가족과 자신에게 위해가 점점 다가옴을 직감하고 모스크바를 피해 우랄 산맥의 바르키노라는 외진 곳으로 피난을 결심한다. 마침 지바고의 형은 공산당 간부 였든 바 형의 도움으로 통행증을 발급받아 모스크바를 무사히 벗어나게 된다.

바르키노로 떠나는 기차는 그야말로 아수라장 자체이다. 발 디디기도 곤란할 정도로 만원사태는 말할 필요도 없고 지푸라기를 깔고 취침해야 하고 분뇨처리도 지푸라기에 하고 매일 매일 기차 창밖으로 밀어내 새하얀 설원을 오염시켜야 하는 처참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기적 소리를 품어 대며 눈 덮인 시베리아 설원을 달리는 기차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때에 따라서는 터널을 뚫고 때에 따라서는 광활한 설원을 달리고 때에 따라서는 수북이 철길을 덮은 눈을 양 바퀴로 밀어내는 장면은 정말 멋진 장면이었다.

설원을 달리며 기차가 내품는 요란한 기적 소리, 아마도 그 소리는 수탈당한 지주의 울부짖음이요. 숙청당한 지식인의 한맺힌 울음 소리였을 것이며 그 기차를 타고 피난 내지는 도망가는 승객들의 통탄과 비명소리가 아녔을까 생각해 본다. 체제와 사상과 이별하는 비탄의 소리와도 같았다.

우랄 산맥의 바르키노를 향하던 기차는 잠시 어느 지점에서 기착하게 되고 지바고는 잠시 차에서 내려 주변 산책중 반 혁명군에게 붙잡혀 지휘관 앞으로 끌려가게 된다.

지휘관은 마침 라라의 남편 파샤였는데 스텔네우프라는 가명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닥터 지바고는 풀려나게 되고 전쟁터에서 헤어져 오매불망 그리던 라라가 유리안치에서 살고 있다는 희소식까지 보너스로 접하게 된다.

아내 토냐 등 가족과 함께 은신처 바리키노에 도착한 지바고는 가족과 더불어 그의 재능이며 취미생활인 시작을 하며 행복한 생활을 영위한다. 둘째 자식까지 임신되어 안정된 생활을 하는 듯하나 눈빛은 늘 라라가 머문다는 유리안치에 고정 되어있다.

지바고와 토냐는 모든 물자나 생활필수품이 부족하고 쫓기는 극한의 전쟁 상황하에서도 임신을 하는데 우리나라의 자녀들은 출산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니 미래가 걱정되지 않을수가 없다.

라라가 인근 유리안치에 있는 사실도 모르는 조강지처 토냐는 책도 빌릴겸 시내인 유리안치 도서관에도 다니며 바람을 쏘일 것을 지바고에게 권유한다. 지바고는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말 머리를 유리안치로 급하게 향해 쏜살같이 달려간다.

대 설원의 한 복판에서 또 한번의 운명적 만남!

바로 그 도서관에 라라도 있었으며 두 사람은 전광석화처럼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다. 그립고 보고프던 두 사람이 만났으니 무슨 상상이 필요하랴. 눈덮인 라라의 집은 두 사람이 내뿜는 사랑의 열기로 녹아내리는 듯 했다.

이렇게 지바고는 가족이 있는 바르키노와 라라가 있는 유리안치를 말을 타고 오가며 동가숙 서가식(東家宿 西家食)하며 지내는 것 같았다. 아마 지바고와 라라는 처음으로 만나고 싶을 때 만나며 행복하고 낭만적인 사랑을 구가하는 듯 했다. 러시아혁명으로 조성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바고에게나 라라에게 그러한 사랑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의료진이 부족한 빨치산 부대에 지바고는 의료원으로 징발 되고 말았다. 의사라는 재주가 그를 살아가게도 하지만 가족과 사랑하는 라라와 시시각각 헤어지게 하는 걸림돌 같기도 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빨치산에서 탈출한 지바고는 벙거지를 뒤짚어 쓴채 풍찬노숙을 하며 거지꼴로 눈보라와 삭풍이 몰아치는 설원에서 눈섭과 코에는 고드름이 매달려 있고 온몸이 공꽁 언채로 가족이 있는 바르키노를 향해 사경을 헤매게 된다.

그러나 급기야 고생고생하며 도착한 곳은 가족이 있는 바르키노가 아니라 유리안치 라라의 집이었다. 죽자 사자 설원을 헤매며 도착한 라라의 집에는 라라는 없고 편지 한통만 달랑 있었다. "그대가 도착할 줄 알고 감자를 삶아 놨으니 얼었으면 녹여서 잡수세요"라는 구원의 내용이었다.

얼마 후 도착한 라라는 추위와 죽음의 공포로 심신이 만신창이가 되고 소진된 지바고를 위해 극진한 간호와 사랑으로 보살피며 한동안 두 사람은 안정적 동거생활에 들어가고 지바고는 역시 시작에 몰두하게 된다.

이 곳에서 라라를 통해 지바고가 빨치산 부대 활동중 바리키노에 거주하던 아내 토냐와 가족들은 모스크바에 소환되었고 결국 파리로 추방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게 된다. 가족과는 이제 영원한 이별이 고해진 상황이 된 것이다.

어메, 라라와의 동거 생활도 일장춘몽, 유리안치에서 지바고와 라라는 동거를 하면서 애틋하고 뜨거운 사랑을 지속하고 나누려했으나 문제의 꼬마로프스키란 놈이 여기까지 추적하여 나타난 것이다.

"라라의 남편도 반혁명군으로 몰려 쫓기고 있고 지바고의 가족도 반동분자로 몰려 파리로 추방 되는 등 현재 둘은 타켓이 되어 경찰에서 쫓고 있으니 이곳을 피해야 한다"며 도와주는 척하며 속내는 라라를 데려 가려 획책한다.

꼬마로프스키와 두 사람은 옥신각신 끝에 결국 라라는 안전한 쪽을 선택하여 그들이 가져온 썰매에 실려 그들과 함께 떠나야만 되는 상황이 되었다. 지바고는 다음 썰매에 가겠다고는 하였으나 라라의 뒤를 따라가지는 않는다.

여기서 닥터 지바고라는 영화에서 빼놓거나 놓쳐서는 안되는 슬픈 장면이면서도 잊혀지지 않을 명장면이 등장한다. 지바고는 라라와 영원한 이별일지도 모를 썰매에 실려 떠나는 라라의 모습을 보기 위해 2층으로 뛰어 올라가 성애가 낀 유리창을 몽둥이로 깨부순다.

그리고 그사이로 눈물을 머금은 채 해맑으나 우수에 찬 눈동자로 떠나는 라라를 응시하게 된다. 얼마나 가슴이 시리고 미어졌을까? 퐁당 빠지고 싶을 정도로 깊은 눈동자를 나는 닥터 지바고, 오마샤리프가 지닌 눈을 못가졌을까, 이집트 사람인 오마샤리프를 내가 어떻게 닮겠는가.

닥터 지바고의 우수에 찬 눈동자는 너무나 강렬하게 인상에 오래 남을 듯하다. 사실 이 영화의 특징이기도 한데 감독의 의도이기는 하겠지만 지바고는 런닝 타임 장장 200분 동안 단 한순간도 이를 내 놓고 웃기는 커녕 눈 웃음도 안 짓는다. 그래서 영화 감상 후에는 닥터지바고의 그 모습만 남을 듯하다.

이렇게 지바고와 라라는 또 헤어지게 되고 먼 훗날 각자의 위치에서 새로운 남편과 아내를 또 만나 생활하게 된다. 어느 날 지바고는 전차속에서 거리를 활보하는 라라를 보고 하차하여 그녀를 따라 가다가 심장마비로 객사를 하게 된다. 슬픈 운명이며 그것이 인생이요 삶일 것이라고 담담하게 되뇌여 본다.

닥터 지바고는 격동기의 러시아와 소련에서 살아가면서 정치적으로나 이념적으로 혹은 경제적으로 어느 것 하나 자유의지대로 살아갈 수 있는 상황을 허락하지 않던 물살 쎈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지탱해 가면서도 의연하게 자신의 영혼의 울림과 자유의지를 발현하며 살아가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엄청난 부귀영화를 누리며 마치 짜르 체제하의 공주와도 같이 삶을 풍미했던 지바고의 아내 토냐는 사회주의 혁명하에서 부모와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어쩌면 남편마저도 라라에게 빼앗기고 파리로 추방되어 나라마저 잃는 상황하에서도 의연하게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은 조강지처인 아내로서, 어머니로서의 품위와 기품을 느끼게 해주었다.

어머니의 내연남이며 변호사인 꼬마로프스키로부터 겁탈 등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때에 따라서는 과감히 도전하고 때에 따라서는 현실에 적응하면서 사랑을 일궈 나가고 삶을 지탱해 가는 라라의 모습에서 격동기에 자신의 삶에 충실하게 임하는 한 여인을 보게 되는 것 같았다.

사랑보다도 혁명을 택한 라라의 남편 파샤는 엘리트로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행동하고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한 혁명적 인텔리젠시아 로서의 사명을 다하며 큰 물결에서 낙오되지 않으려 사력을 다하나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혁명가다운 군상을 보게되는 것 같았다.

짜르의 황제 전제체제, 제1차 세계대전 혹은 레닌의 혁명시나 공포와 숙청의 스탈린 철권체제를 막론하고 온갖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역사의 높은 파고와 막다른 골목에서도 유연하게 때에 따라서는 강자와 약자를 이용하며 교묘한 술책과 기회주의적 처신으로 살아남는 꼬마로프스키의 삶을 통해서 살아남는 자의 연민도 느낄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인생은 고매하고 순결한 삶의 지향이 때에 따라서는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더 힘들게도 할수도 있고 손해도 볼 수 있게 한다. 그러나 꼬마로프스키가 살아 남았다하여 고매하게 살아간 사람보다 당신이 인생을 승리했다고 솔직히 손을 들어줄 수 없음도 나의 명징한 입장이다.

사선을 넘나들어야 하는 혁명과 전쟁이라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 또 무엇에 늘 쫓기는 듯 다급한 듯한 긴장과 절박함 속에서, 자신의 자유 의지가 발붙일 곳 없는 극한 상황하에서, 의지할 사람없는 외롭고 고독한 극단적 처지에서 부인도 있는 지바고와 남편도 있던 라라의 사랑이 불륜이고 바람기였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또 고매하고 순수한 사랑이라고만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사랑이라기보다는 운명이고 의지의 방편은 아녔을까?

어느 나라 어느 시대나 정치 체제와 제도를 운영하는 위정자들은 모든 국민에게 "자유와 평등 그리고 달콤한 꿀과 풍부한 빵"을 보장하며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한다고 외친다.

그리고 그들이 최상이라고 신념처럼 믿고 선택한 체제나 이데올로기는 때와 상황에 따라서는 영화속의 주인공, 지바고나 라라, 토냐나 파샤 등처럼 그 속에서 숨 쉬는 인간들의 삶에 생사를 가름하기도 하고 행, 불행을 엇갈리게도 한다.

"위정자는 그들이 선택한 정치체제와 이념이 개개인의 삶에 엄청나고 방대한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생각하여 늘 어떤 방향, 수단으로 어떤 목표를 향해 갈 것인가를 가슴 깊이 명심하여 밤을 지새며 고민하고 또 고민하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라"는 경종을 닥터 지바고는 울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와 파란만장한 삶속에서도 지바고와 라라는 "인생은 끝날지라도 순수한 사랑은 영원함"을 믿으며 생명과 영혼을 외치는 듯 하였다.

꼬마로프스키처럼 시의에 편승하여 기회주의적으로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전통적 지식인인 닥터 지바고처럼 주어진 환경과 물살에 떠밀려 저항없이 엘리트로서 묵묵히 살 것인가 혁명가 파샤처럼 죽음도 불사하고 행동하며 계몽하며 살아가는 인텔리젠시아로 살 것인가.

"To be or not to be that is question"

여운이 짙게 드리워지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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