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em and epic singing freedom and love, alienation and suffering, justice and existence!"

"자유와 사랑, 소외와 고통, 정의와 존재를 노래한 시"

뮤직컬 영화 '노트르담 드 파리'를 감상하며 기해년 초반을 샹송 54편의 곡과 함께 활짝 열었다. 아름다운 선율의 음악이었다. 영혼까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뮤직컬이나 오페라는 일반 영화 보다는 줄거리나 맥락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아서 선뜻 접근하는 장르는 아니다.

그러나 음미해서 감상하다 보면 색다른 맛이 우러나오는 매력적인 분야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특히 '노트르담 드 파리‘라는 뮤직컬 영화는 시작에서 끝까지 노래 가사 자체가 대사 이기 때문에 음악도 즐기고 영화도 감상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감미로운 선율과 열정적이고 에너지 충만한 댄스, 그리고 아름다우나 애절하고 서정적인 가사로 가득 찬 프랑스 대표적 뮤지컬 작품 '노트르담드 파리'를 감상하면서 깊어 가는 겨울밤을 지새워 봤다. 눈도 내리지 않는 겨울밤을 지새려니 겨울밤으로서의 깊고 그윽한 맛은 없었다.

3년여 전 50여명의 영화 동호인들과 감상당시 줄거리는 세밀하게 파악은 못했던 듯하다. 그러나 가고일gargoyle (환상의 동물) 석상이 내려다보는 무대에서 펼쳐지는 연기자들의 열정적 가창력과 아름다운 음색, 무대를 꽉 채워 주며 춤추던 에너지 충만한 아크로바틱 댄스와 현대무용, 그리고 선이 아름다운 고전무용의 조화와 율동, 화려한 듯 하나 색 바랜 커튼처럼 늘어진 그로테스크한 조명, 치렁치렁한 의상, 기이하게 생긴 곱추이자 절름발이 콰지모도와 팜므파탈의 매력 여인 에스메랄드와의 인연을 이어가기 위해 재감상을 하게 되었다. 영화라는 여정에서 만날 수 있는 삶의 또 다른 인연이 아닐까 생각된다.

뮤지컬은 미국과 영국이 양대 산맥을 이루어 대세라고 하나 프랑스 뮤지컬도 좋다고 하는데 나는 뮤직컬을 많이 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솔직히 잘 모른다가 답일 것 같다. 그러나 프랑스의 샹송 가수와 배우들이 쏟아내는 노래 속에 담긴 음률을 듣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감상하는 감동이 충분한 영화였다.

영화는 같은 영화라도 횟수를 거듭하여 볼수록 새롭게 우러나오는 속 깊은 진한 맛이 있어서 좋다. 사람도 만날수록 그런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좋고 대화를 이어 가고 싶은 마음이 절로 동한다. 또 좀더 세밀한 부분이 눈과 마음에 들어오니 흥미롭다. 반복해서 감상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프랑스의 낭만주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빅토르 위고(Victor Hugo)의 동명 소설을 뮤지컬화 한 것으로 파리의 세느강에 위치한 노트르담 성당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다. 아름다우나 유랑의 여인 짚시 에스메랄다와 신분이 각기 다른 세 남자와의 비극적인 로맨스를 다루고 있는 뮤직컬이다.

대사가 없이 끝까지 아름답고 우아한 선율의 노래와 멋진 춤으로만 이어지는 '송 스루 뮤지컬(Song through musical)'이란다.1998년 파리에서 초연되었고 '송 스루 뮤직컬' 이라는 말도 나에게는 새로웠으나 그때 영화를 설명해 주던 분의 말씀에 의하면 그렇단다.

노트르담 드 파리라는 뮤직컬을 감상하게 될 줄 알았다면 1996 파리 여행시 성당을 좀 더 자세히 살펴봤어야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가이드를 따라 다니며 주마간산격으로 쭉 훑어보고 왔으니 건물 외관만 선할 뿐이다.

세느강은 한강에 비해서는 폭이 많이 좁지만 강변에는 과거의 유서 깊은 건축물과 현대적인 건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고 30여개의 아름다운 다리가 있어 말로만 들어도 낭만이 가득찬 다리라는 느낌이 든다. 유람선을 타고 세느강을 흐르던 당시가 반추된다. 그중 퐁네프의 다리는 1600년경에 지어져 가장 유서 깊고 낭만이 서린 다리란다.

영화속에서 흐르는 54편의 노래중 특히 영화의 중심축이며 많은 감동을 안겨준 '대성당들의 시대 Tems de catedrali' 보헤미안 Bohemian' '아름다워라 Belle' '살어리라 Vivre'를 중심으로 감상평을 이어갈까 한다.

뮤지컬의 오픈닝 곡인 '대성당들의 시대Terms de Catedrali'는 작품을 연결해 가는 화자이자 음유시인인 '그랭구와르'가 작품의 시대 상황과 앞으로 펼쳐질 내용을 암시하며 극의 시작을 알리는 노래로 시작된다. 노래라고 하기 보다는 구수하고 묵직한 톤의 한편의 장엄한 시를 낭송하는 느낌이었다.

가사를 모르더라도 선율과 곡조 그리고 가수의 음색을 통해서도 새로운 광명의 시대가 움트고 희망과 소망이 솟아날 것 같은 동력과 감동이 밀려옴을 금하기 어려웠다. 파괴력이 있는 멋진 서곡이었다. "대성당의 시대가 무너지네, 그들을 성안으로 들게하라"는 그랭구와르의 외침은 과거 암흑기 중세시대 1000년을 종식하고 미래 1000년의 새 역사가 다시 씌여질 것임을 외치는 서곡 같았다.

즉, 신神이 세상의 중심이었던 1000여년 지속 되었던 중세 시대를 지나 대성당의 시대가 끝나고 인본주의와 인간중심의 사고, 또 자유로운 문화와 예술과 학문이 꽃피던 르네상스 시대가 펼쳐지는 1482년경을 시대적 배경과 궤를 같이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작은 인간과 글과 책이 커다란 대성당에 대체되는 혁명의 시대를 노래하는 뮤직컬 같았다. 하나의 변곡점을 넘어가는 새로운 세계의 도래, 혼란스러운 마음과 불안, 역사와 사회의 큰 변화를 외치는 노래가 아닐까도 생각들게 하는 장면이었다.

또한 '그랭구와르' 가 부르는 노래와 영상은 은은하면서도 풍부한 선율에 아름다운 프랑스어 발음이 주는 감미로움이 더해져서 오픈닝 곡을 통해서 뮤직컬에 대하여 충분히 만족할 만한 기대감과 환기를 시켜주는 듯했다.

'보헤미안Bohemian'은 짚시를 뜻하는 또 다른 표현의 말이다. 노트르담 성당 광장에 모여 사는 집시들 중 치명적 매력을 지닌 팜므파탈의 짚시 여인 '에스메랄다'가 부르는 '보헤미안'이라는 노래는 가히 애상적이라 할수 있지 않을까? 정처없이 내일은 어디 있을지도 모르고 하늘을 지붕삼아 사는 사람들이기에 더 애절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집시들이 등장하여 자신들의 홀대에 대한 억눌린 분노를 춤으로 표현한 후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 '에스메랄다'가 등장한다. 그녀는 '보헤미안'이라는 곡을 유혹적인 춤과 함께 애처롭고 감미롭게 부른다. 매혹적이고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나는 집시 그 누구도 내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죠.

나는 집시 나는 기나긴 방랑의 딸, 세상 끝까지 방랑을 하네 나는 집시, 내 손금에 그렇게 쓰여 있지요"라는 가사의 노래를 듣노라니 남유럽 여행시 길거리 곳곳에 아기를 앉고 혹은 엎고 다니던 그들의 남루하고 애상했던 모습이 반추되었다.

에스메랄다의 이 모습을 본 왕의 근위대장 '페뷔스'는 이미 약혼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첫 눈에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남성들의 거역할 수 없는 몹쓸 놈의 DNA의 농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물론 몽땅 그렇다는 애기는 아니다.

한편, 노트르담 성당의 주교인 '프롤로'라는 신부도 그녀가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보고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불타오르는 정염의 욕망과 종교적 신념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그 역시 그녀의 치명적 매력에 넋을 잃었는데 종교인인들 그놈의 DNA를 콕집어 발라낼 수는 없지 않은가?

주교 프롤로는 에스메랄다를 원죄의 씨, 거리의 여자, 마녀라고 부르면서 성당의 종지기인 꼽추 '콰지모도'에게 교화를 명분으로 에스메랄다를 잡아 올 것을 명령한다. 그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죄악이 된다며 잡아 가두려 하는 것이다.

욕망에 불타는 프롤로의 음흉한 마음이 죄는 될수 있으되 에스메랄다의 아름다움이 무슨 죄란 말인가? 주교의 음큼한 마음도 물론 죄는 아닐 것이다. 잡아 두고 프롤로 자신만 홀로 아름다운 여인을 보려는 속셈은 아닐런지 하는 상상을 해봤다.

하층민 신분이며 성당의 종지기인 꼽추, 절름발이, 귀머거리인 '콰지모도'는 이미 오래 전부터 에스메랄다를 혼자서 바라보고 사랑의 욕망이 용솟음 치나 말도 못하고 애태우고 있는 상태였다. 권력의 핵, 근위대장과 주교가 눈부릅뜨고 에스메랄드를 향해 욕망의 기차를 달리고 있는데 감히 종지기가 어찌하랴. 그저 애처롭기만 할뿐이었다.

이 아름다운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를 성당의 종지기 '콰지모도'와 성당의 주교 '프를로', 근위대장 '페뷔스'가 동시에 사랑하게 된 것이다. 참으로 기괴하고도 비극적인 로맨스가 아닐 수 없고 그 흔한 삼각 아니 사각 관계의 로맨스다.

우선 팜므파탈의 치명적인 미모와 매력을 가진 여성, '에스메랄다'는 이 뮤지컬의 꽃이요 주인공이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오갈데 없는 보헤미안, 누구나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아름답고 사랑의 충동을 유발케 하는 여인이다.

이런 매력을 지닌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를 향한 세 남자의 사랑 고백. 그것도 각기 다른 신분의 세 남자가 각자의 신분과 위치에서 가슴 시리도록 각각의 애절한 사랑 고백을 그녀 앞에 바치는 장면은 정말 이 영화의 백미라는 생각이 든다.

매혹적이고 우아하게 춤추고 노래하는 짚시 여인 '에스메랄다'에게 마음을 빼앗긴 '프롤로' 주교는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죄악이라며 종지기 '콰지모도'에게 그녀를 잡아 오라고 명령한다.

'에스메랄다'를 잡기위해 뒤쫓던 곱추'콰지모도'는 근위대장 '페뷔스'에 의해 체포되고 '페뷔스'는 '에스메랄다'를 가로챈다. 이미 애인이 있는 건장한 청년 '페뷔스'도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긴 상태였던 것이다.

한편, 근위대장에게 체포된 '콰지모도'는 바퀴 형틀에 묶여 고통을 호소한다. 물을 달라고 호소하는 그에게 어느 누구도 손을 내밀지 않고 있을 때 '에스메랄다가' 그에게 다가가 이마의 땀을 닦아 주고 마실 것을 건네 준다. 에스메랄다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돈 없고 빽도 없고 권력도 없는 콰지모도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형틀에서 풀려난 '콰지모도'가 앞에 있는 에스메랄다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고 그녀에 대한 연정을 땀을 뻘뻘 흘리며 사력을 다해 애절하면서도 절규하듯이 열정적으로 사랑을 노래하는 장면은 처절한 아름다음 그 자체였다.

콰지모도는 종지기의 하층민의 신분이고 외모 또한 기괴하고 거칠게 생겼어도 그 내면은 맑고 순수하여 진정한 사랑과 희생을 품을수 있는 따스한 가슴을 지닌 사람으로 느끼게 하였다.

이어서 주교 '프롤로'가 나타나 그의 종교적 고뇌와 그녀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고 바로 이어서 근위대장 '페뷔스'도 나타나 자신의 애인 플뢰르에 대한 미안함과 '에스메랄다'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또 세 사람이 함께 그녀에 대한 사랑을 절절히 노래하니 비록 짚시 신분이지만 에스메랄다는 행복한 여인인 듯도 하다. 역시 여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미인이어야 한다는 것인가? 조물주가 그렇게 남성이라는 인간들의 유전자를 제조해놨으니 누구 탓 할일도 아닐 듯 하다.

계속해서 노트르담 드 파리라는 뮤직컬 영화의 클라이 맥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노래 '아름다워라 Belle' 가 에스메랄다 ,콰지모도, 프롤로 그리고 페브스가 동시에 등장한 가운데 무대를 달구며 이어졌다.

종지기 콰지모도가 이마에 땀방울을 흘리며 절규하듯 노래한다. "아름다워! 이 말은 그녀를 위해 만들어진 말, 그녀가 춤을 추면 나는 내 발밑에서 열리는 지옥을 느끼네. 오, 단 한번만이라도 내 손가락이 에스메랄다의 머리카락을 스칠 수 있다면ᆢ" 이라고 절절한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주교 프롤로가 이어서 노래한다. "내안의 쾌락의 정념을 달구어 하늘을 볼수 없게 하려는가? 그대를 향한 욕망이 무슨 죄가 되겠는가? 낙원의 문을 열게 해주오"라며 신神을 배신이라도 할듯, 신의 사랑을 전해야 하는 신부로서의 고뇌와 욕망을 묵직하게 표현한다.

출중한 외모의 근위대장 페뷔스가 외치듯 또 노래한다. "나는 에스메랄다의 그 사랑의 꽃을 따러 가리, 에스메랄다 그대가 춤출 때 무지개 빛 치마 속으로 속세의 경이와 황홀을 보았네" 근위대장은 거리의 질서유지와 시민보호는 팽개치고 에스메랄다에게 혼을 홀리기 시작하는 것같았다.

곱추 종지기 콰지모도의 에스메랄다에 대한 이루기 어려운 '안타까운 사랑sad love'과 주교 프롤로의 힘과 권력에 의한 '집착적 사랑obsessive love' 그리고 애인이 있으면서도 에스메랄다에게 마음을 빼앗긴 근위대장 페뷔스의 '욕망적 사랑desireful love'을 같은 현장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내 두 눈이 그대의 치맛자락 속에 머물렀는데 성모마리아께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저 짚시 여인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을까? 그자는 이 세상에 살아갈 가치가 없네."

위의 가사를 콰지모도, 프롤로, 페뷔스가 합창하는 장면은 가장 인간적 원초적 본능의 휴머니즘을 발양하는 듯 했으며 신중심의 중세에 대한 종언이며 르네상스 시대의 도래를 선언하는 듯했다. 각자 사랑의 감정을 잘 표현한 환상적인 무대였다.

Belle(아름다워라)라는 노래는 느트르담드 파리 상연후 44주 연속 프랑스 음악차트 best1에 랭크된 노래란다.

이 영화의 핵이요 엑기스라고 할 정도로 멋지고 환타스틱한 장면이었다.

이어지는 노래, Vivre(살아가리)'는 '에스메랄다'가 자신에게 닥쳐 올 죽음을 예감한 듯 담담하면서도 애절하게 부르는 노래였다. 한 편의 애절한 시를 감상하는 느낌이 몰려오는 노래였다.

노트르담 성당의 주교 '프롤로'는 연적인 근위대장 '페뷔스'를 칼로 찌르고 에스메랄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다. 그녀를 감옥에 가둔 후에 프롤로는 그녀에게 교수형을 선고한다.

죽음의 문턱에 있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의기와 의리의 사나이 종지기 '콰지모도'는 집시 무리들을 탈옥시키고 그는 에스메랄다를 노트르담 성당 안으로 피신시킨다.

그 후 집시들과 근위대와의 격렬한 전투가 일어나고 에스메랄다는 페뷔스와 맞서는 상황이 되어 결국 붙잡힌 에스메랄다는 페뷔스의 손에 넘어가고 교수형이 집행된다.

이룰 수 없는 슬픈 사랑을 하는 꼽추이자 종지기인 콰지모도, 성직자로서 종교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프롤로 신부, 그리고 사랑하지만 결국은 사회적 체면 앞에서 그녀를 배신하는 근위대장 페뷔스, 그들의 내면적 갈등과 프랑스 특유의 선율이 섞여 삼색(三色)의 사랑을 그리는 명작 뮤지컬이라는 느낌이었다.

짚시 에스메랄다가 부른 '살아가리Vivre'라는 노래의 가사는 자유롭지만 슬픈 짚시들의 정서가 잘 표현된 한 편의 서정시 같았다. 비록 세상은 '에스메랄다'를 악마로 여기고 욕망에 찬 눈으로 바라보지만 그녀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세상에 대한 사랑과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음미 해볼만한 노래였다.

콰지 모도는 망루에 올라 교수형 장면을 내려다 보고 있던 주교 프롤로를 밀어서 떨어져 숨지게한다. 그리고 교수대로 내려온 콰지모도는 그녀의 시신을 끌어안고 절규하며 그녀의 시신위에 쓰러지면서 막을 내린다. 아마도 에스메랄드를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곱추이며 종지기인 콰지모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전체적인 줄거리도 기괴한 로맨스를 다루고 있지만 대사 한마디 없이 춤과 노래로만 내용을 역어 가고 등장 인물들의 가창력과 아름다운 선율, 그리고 화려하나 때에 따라서는 음습하고 고즈넉한 조명들의 장면은 일반 영화에서 감상키 쉽지 않은 영상으로 매우 인상적이었다.

"밤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나는 너무 외로워, 난 죽고 싶지 않아 나는 계속해서 자유롭게 노래부르고 춤추고 웃고 싶어, 그대 사랑 받기 전에 살리라,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두 주리라,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며, 자유롭게! 내 삶을 선택하고 싶어 아무런 비난도 받지 않고 금지된 것도 없이 자유롭게! 섬겨야할 신도 조국도 없이 세례는 빗물로 받으며"라는 가사의 Vivre는 사랑과 자유와 생명을 노래한 에스메랄다의 절규, 아니 짚시들의 '삶의 의지'가 담긴 절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팜므파탈의 치명적 미모를 지닌 에스메랄다라는 짚시 여인을 사이에 두고 각기 신분이 높고 권력이 큰 주교와 근위대장 그리고 거리의 자유로운 영혼의 종지기 콰지모도 간의 사각구도의 사랑을 통해서 그 당시의 권력을 가진자와 힘없는 평민이 대치하는 프랑스 혁명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듯도 하다.

또한 중세의 몰락과 르네상스 시대가 움틈을 노래하고 한편 프랑스 절대왕정의 몰락과 시민사회의 도래를 세련되게 오버랩시킨 프랑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단편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었던 명품 뮤지컬 영화였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즉, 이영화는 1482년 대성당의시대, 신神중심의 중세시대가 막을 내리고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함을 직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대를 뛰어 너머 1789년 프랑스 대혁명과 혁명의 슬로건였던 자유 평등 박애와 사랑을 노래한 대 서사시였다.

자유를 노래하고 사랑을 노래하고 인간이 중심임을 외치며 부당한 권력, 절대왕정에 대응하여 맞서 싸우던 프랑스 시민의 외침이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통해서 음악으로서 들려오는 듯한 멋진 뮤지컬 영화였다. 음악 감상과 영화감상을 동시에 할 수 있어서 일거양득이었다.

약자가 강자로부터 더 이상 소외되거나 박해받지 않는 세상, 궁핍과 고통이 없는 세상, 굴욕과 능욕이 없이 살 수 있는 세상, 존재 그 자체를 당위적으로 인정해줄 수 있는 세상, 그리고 아집과 독선이 없는 세상을 희구하며 노래하고 절규했던 15세기!

그리고 19세기!

또 현재까지 그런 상황이 이어지는 21세기!

도래하는 100년, 1000년! 또 그것만을 계속 노래할 것인가 아니면 그 무엇을 다시 노래할 것인가?

"신神은 과연 오만하고 탐욕스런 자의 편이던가?"

'정의'와 '존재'에 관한 곱추, 콰지모도의 질문이 귓전에 윙윙 맴돎은 왜일까? 노트르담 드 파리의 진한 여운이었다.

"Is God on the side of arrogant and greedy people?" Why is it that Hump,Quasimodo's questions about 'justice' and 'existence' are revolving around my ear long? It was the deep feeling of Notre Dame de Paris.

저작권자 © 세정일보 [세정일보] 세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