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이 된 가난한 뉴욕의 여류작가가 이제 막 착륙하려는 기내 안에서 감격스럽게 런던시내를 바라보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방문자의 눈빛에 담아내던 그녀의 속내는 결코 말로써 표현해내기 어려운 감정들을 쏟아내고 있어, 그 느낌 하나만으로도 오래도록 그리워하게 되는 영화 체링크로스 84번가.

출판사에서 여행서적 부록으로 끼어놓은 런던 지도를 펼쳐놓고, 대강 위 아래, 좌우로 훑어내린다. 그러니까 히드로 공항은 여기고, 여기서 지하철 피카딜리방향으로 대략 한시간을 가란 말이지. 그럼 지하철 타는 곳을 미리 알아둬야하는거잖아, 오이스터 카드는 미리구입하면 좋은건가...... 휴, 근심이 한보따리 앞서는 이런 여행 초짜도 없다.

그러다 다시 나는 그곳을 바라본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곳에 갈수 있다는것도, 또 그곳 때문에 내가 거기에 간다는 것도, 설레임을 갖는다는것도 잘 알고 있다.

책에 관한한 까탈스럽고 고지식한 고전독서광인 여류작가 헬렌하프는 또 그만큼의 엄격함과 자부심으로 런던의 체링크로스 84번가에서 중고서점 마크스를 운영하는 프랭크를 우연히 알게 되고 인연을 이어간다. 1949년부터 1968년까지 스무해동안.

처음, 책 주문서를 대신해서 보내게 된 편지는 2차세계대전이 끝났을 무렵의 삶이 녹녹치 않았던 런던의 중고서점 주인과 여전히 글을 쓰지만 무명으로 살아가는 뉴욕의 가난한 희곡 작가와의 연결고리로 지속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들은 책에 대한 열정이 있었으며, 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지니고 있다고 보여진다. 얼렁뚱땅 대충 번역한 글들을 혐오스러울만큼 싫어하는 헬렌과, 헬렌의 욕구에 충족시켜주고자 최선을 다해 그녀의 입맛에 맞는 책을 구하러 다니는 프랭크... 또 그런 그와 그의가족을 위해, 고기와 달걀 햄등의 물자를 보내주는 헬렌은 어느 순간부터 정신적 교감자로 소통하며 어려운 시대의 동지로 의지하며 살아간다.

내안에 나도 모르게 자리잡은 런던은 아마도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부터였으리라. 오래된 티비의 화면에서 성우 더빙으로 흘러나오는 헬렌과 프랭크의 목소리란 그들이 읽어 내려가는 편지의 구절구절들은 영상과 더불어 두 도시를 내게 안내해 주었고 동경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때가 아마도 1988년쯤 이었으리라.

헬렌은 엘리자베스2세 즉위식 기념 할인행사로 런던행 티켓을 싸게 구입한다. 이에 프랭크와 마크스서점의 점원들은 그녀의 방문에 한껏 들뜨게 되지만, 그들의 만남은 이루워지지 않는다.

이제 나는 지도를 어지간히도 보고난 후라. 그곳, 체링크로스 84번가가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 눈감고도 외울지경이다. 또한 지금은 마크스 라는 중고서점 대신 흔하디흔한 프랜차이즈 햄버거 매장이 있다는것도 안다.

뜻밖에 치과 치료비용으로 비행기 티켓 값을 지불한 헬렌과 프랭크는 다음을 기약하고 만다.

살면서 나는 ‘다음에’ 라던가 ‘ 언젠가’ 라는 말을 내가 하는것도, 누군가 내게 하는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이루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걸지도 모를 말하는 이의 심정을 나타내는 편한 수법처럼 느껴져서 본능적인 거부감이 이는 것이다.

그러나 바램이 지속되면 기회가 찾아오는 걸까. 헬렌은 런던행 비행기를 타게 된다. 비록 오랜 세월이 흘러가긴 했을지라도.

런던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헬렌은 택시를 타고 운전사에게 또박 또박 말해준다. “에잇 포, 체링크로스 로드 ”

찬찬히 마크스 서점의 여기 저기를 둘러보는 그녀는 감상에 젖는다. 스무해나 지난 그들의 관계속에서 프랭크는 이제 없지만, 그래서 한번도 서로의 얼굴을 본적도 없지만, 마치 그간의 편지를 통해 서점의 모든 부분을 알고 있다는 듯이, 익숙한 듯이 시선을 거둘줄 모른다. 그래서 다행이라 말해야하는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거면 된거다. 프랭크도, 점원들도, 책도 없는 빈 공간을 헬렌이 행복한 듯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체링크로스 84, 번지수만 적혀있는 프랜차이즈 가게 건물로 내가 들어갈지 어떨지는 가봐야 할 일이지만, 분명 나는 헬렌처럼 행복한 시선으로 바라볼수는 있을 것 같다.
아이러니 하게도 오랜 무명작가 헬렌은 프랭크 가족의 도움을 받아 서로 주고 받던 스무해 동안의 편지를 책으로 출판하게 되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한다. 실존하는 그들의 이야기가 그렇게, 활자화되고 영화가 된 것이었다.

런던행 티켓을 만지작거리다, 문득 생각해본다. 삶에서 감추워진 기적같은 날이 누구에게라도 모습을 들어내는 때가 오리라는 것을. 단지 그것을 알아챌수 있느냐는 것은 각 개인의 몫이라는 것도.

[박선미 작가 소개]

△ 국세문우회원

△ 영월세무서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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