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tnam is the only country in the world to win the war against the US superpower."

▲ 석호영 세무사

베트남 하노이에서는 지난달 2월 27, 28일 양일간 미국과 북한간의 '비핵화'와 '상응조치'를 놓고 밀고 당기는 한판 샅바 싸움을 하였으나 결판 내지 못하고 끝났다.

나는 세계적 시선이 모아졌던 베트남이란 곳을 좀 심도 있게 알아 보기 위해 베트남 관련 영화를 찾던 중 3년여 전에 감상했던 ‘인도차이나 Indochina’라는 영화를 떠올리게 되었다. 다행이 이 영화는 베트남의 역사를 모르고서는 깊은 이해가 안되게끔 제작된 영화로 차제에 베트남이란 나라에 대해서 좀 더 들여다봐야 되겠다는 의욕이 일었다.

우선 베트남하면 선뜻 뇌리를 스치는 것은 월남 전쟁 시 청룡‧백마부대 등 우리 한국군의 파병이 떠오르고, 베트남에 현재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박항서 축구감독과 3년여 전 베트남의 호치민시에 골프 등을 위해 여행 갔을 때 출퇴근 시간에 거리를 꽉 메우며 지나가던 질서 정연하고 역동적인 오토바이 행렬이 눈에 선하다.

또한 국세청 재직 시에 국세 종합상담센터장 직에 있을 때 중국 태국 베트남 등 각국의 공무원들이 우리 제도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센터를 방문시 가장 의욕적으로 질문이 많은 나라가 베트남과 중국의 견습공무원들이었다는 기억이 선하다. 역시 발전하는 나라의 공무원들은 호기심과 의욕이 넘침을 느꼈다. 개인도 마찬가지이리라.

베트남의 역사를 주마간산 격으로나마 공부하다보니 우리나라(단기2333년)보다도 빠른 BC 2916년에 국가가 기원되어 AC 996년까지 중국의 속국처럼 지배를 받아 오다가 대월이라는 월남국가로 독립 후 19C까지 우리나라 조선왕조처럼 대를 이은 왕조체제를 900여년 동안 이루어 왔던 나라였다.

1802년 베트남 정부 수립시 프랑스 선교사의 도움을 받는 등 프랑스와 밀접한 관계였으나 외세를 배격하는 베트남 정책에 프랑스는 1859년 베트남을 침공하게 되었고 1884년에는 베트남에 대해 종주권을 주장하는 청나라와의 전쟁을 통해 프랑스는 ‘청프전쟁’에서 승리를 하게 된다.

유럽 열강의 식민지 팽창주의에 한발 늦게 발을 담근 프랑스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 등의 나라에 대해 프랑스령 식민지인 인도차이나 연방을 구축하기에 이르게 되며 인도차이나라는 말도 그들에 의해 그때부터 연원이 된 듯 하다.

1940년 2차 세계대전 초에는 유리한 전황에 힘입어 일본이 베트남을 침공하여 프랑스와 함께 베트남을 양국 통치하기에 이르렀으며 1941년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 공산당의 게릴라전에 의해 1945년 7월에 일본군이 축출되고 9월에 프랑스가 축출되었으나 1946년 프랑스가 다시금 침공하여 베트남을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베트남 공산당의 끈질긴 저항에 의해 프랑스도 1954년 5월 대패하게 되고 그해 7월 제네바 회의에서 우리나라가 외세에 의해 남북으로 갈렸듯 남북의 베트남으로 갈리게 된다.

그로부터 2년여 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여 우리 한국군의 파월과 함께 전쟁을 치렀으나 1975년 4월 30일 막강하고 우세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게릴라전에 익숙한 북베트남에게 미국이 전쟁에서 패하게 됨으로서 베트남은 중국과 일본과 프랑스 그리고 초강대국인 미국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한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이에 대한 베트남 국민들의 자부심과 긍지는 대단하였다. 베트남의 국부로 칭송받는 호찌민 박물관에 방문했을때 박물관 초입에는 다음과 같은 문귀가 있었다. "베트남은 세계 최강의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유일한 나라다." "Vietnam is the only country in the world to win the war against the US superpower"라는 글을 보는 순간 그들의 자부심이 어떻다는 것을 한꺼번에 확 느낄 수 있었다.

이상에서 베트남의 반만년 역사를 간단하게 정리해 본바 ‘인도차이나’라는 영화의 역사적 배경이 된 시기는 베트남 역사 중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끝자락부터 베트남이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1954년 7월 21까지의 시점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내용은 프랑스 식민지 시대를 배경으로 보면 무난할 듯하다.

인도차이나라는 영화는 프랑스의 잘생기고 멋진 장교 쟝 밥티스트와 베트남의 황녀 까미유와의 사랑과 전쟁, 그리고 자유와 이념, 인간의 심리를 섬세하게 표현한 영화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식민지적 정치 이념과 체제하에서의 피 지배자들의 피폐하고 비인간적이고도 동물보다도 못한 파란 만장한 삶을 그리고 있으며 당시 베트남인의 생활상과 의상 문화 주인공 엘리안느 드리브의 고무나무 농장에서 고무를 채취하는 농부 내지는 노예들의 진귀한 모습도 간간히 보게 된다. 또한 배경으로 등장하는 하롱베이는 정말 절경이었다.

주인공 엘리안느 드리브는 프랑스인이기는 하지만 베트남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들은 일찌기 베트남에 정착하여 고무나무 농장을 경영하는 등 대지주이며 부호이다. 그녀는 사고로 부모를 잃은 베트남 안남지역의 황녀 까미유라는 아이를 양녀 삼아 극진한 사랑과 함께 프랑스식 현대 교육과 최고 상류사회에서 적응 할 수 있는 댄스 등 세련된 교육을 시킨다.

영화에 등장하는 또 다른 주인공 까미유는 그야말로 순수하고 깜찍하며 가녀리고 연약해 보이는 모습이 지금까지 감상했던 어느 영화의 주인공보다도 차별화 되는 여성이었다. 어느 파티 석상에서 양어머니인 엘리안느 드리브와 춤추는 모습 또한 영화 "여인의 향기"중 고급레스토랑에서 알파치노와 어느 어여쁜 여인과 ‘포 우나 차베츠’라는 곡에 맞춰 탱고를 추던 모습과 비견되는 멋진 장면이었다.

어느 영화든 남녀 간의 사랑이 얽히지 않으면 흥미가 떨어지게 되어있다. 이 영화 또한 프랑스 식민 통치 사령부의 잘 나가는 똑똑하고 멋지고 패기 넘치는 장교와 엘리안느 드리브와 뜨거운 관계가 형성된다. 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는 밤에 차를 타고 귀가하는 엘리안느의 차를 앞에서서 가로막고 차안으로 뛰어들자 엘리안느는 기사를 잠시 내리게 하여 빗속에 세워 둔채 둘이서 사랑을 뜨겁게 나누던 장면은 어느 영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엘리안느 입장에서는 전쟁과 식민지 땅에서 여인으로서 대 농장을 경영하려면 사랑이 전제 되지 않은 결혼 일지라도 자신과 자신의 부와 농장을 보호받기 위해서는 유력한 인물과 결혼 내지는 연인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느끼는 듯 했다.그리고 엘리안느는 "나는 흔적을 남기지 않고 여러사람과 연애를 해봤다"는 말을 한다. 또 지역의 경찰국장과도 우정관계를 형성하며 무난히 지내는 듯 했다.

사랑은 삼각관계여야 더욱 재미를 더하던가? 엘리안느가 극진히 사랑하는 수양딸 까미유가 도망가던 죄수에게 프랑스 군인이 쏜 총에 죄수와 함께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이때 근처에 있던 엘리안느의 애인 쟝밥티스트가 혜성같이 달려가서 까미유를 병원에 데려가 피투성이가 된 까미유를 끌어안고 몸 곳곳의 피를 정성껏 닦아 주게 된다.

이 상황에서 눈을 뜬 까미유는 쟝밥티스트를 자기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으로 여기고 연정을 품게 되고 현장에서 뜨거운 포옹을 하게 된다.이 사실을 알게된 엘리안느는 당초 까미유가 베트남의 부호의 아들 탄과 결혼하기로 선약이 되어 탄과 약혼식을 부랴부랴 올리게 된다.

또한 엘리안느는 자신의 양녀와 사랑에 빠진 쟝밥티스트를 부를 바탕으로 그녀가 살아남기 위해 쌓아 놓은 탄탄한 인맥의 요로에 청하여 외지로 좌천을 시키도록 한다. 엘리안느는 역시 쟝밥티스트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듯했다. 아니 까미유를 더 사랑한다고 해야 할 듯하다.

쟝은 엘리안느를 만나 사자후 같은 일장 연설을 쏟아 낸다. "까미유를 나에게서 구해내겠다고 나를 괴롭히고 싶은 것이죠? 당신은 협박의 자유를 견딜 수가 없을 거요. 당신과 다르게 사는 걸 못 참는 거죠? 당신은 다른 사람의 삶을 독점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까? 나와 까미유 당신의 일꾼들을 당신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당신도 지배하고 싶은 거죠. 사람들을 나무처럼 다루고 그들을 사고팔고 피 흘리게 하고 탈진 시키고 당신은 인종차별 주의자여요"라고 일갈한다.

이 순간 엘리안느는 쟝의 뺨을 후려갈긴다. 또 쟝도 밀리지 않고 육중한 손으로 임팩트있게 엘리안느의 뺨에 손바닥을 내리 꽂는다. 결국 쟝은 엘리안느와의 일로 인하여 쟝은 외지인 드래곤 아일랜드로 좌천되게 된다. 하롱베이를 경유하여 좌천 길에 오른 쟝밥티스트의 모습이 하롱베이의 아름다운 모습과 대비되어 더욱 초라해 보였다.

한편 어린 나이에 사랑에 빠진 까미유는 좌천된 쟝을 찾아 떠나게 되며 약혼자 탄도 그녀를 응원하며 까미유를 쿨하게 보내준다. 프랑스 유학을 통해 서구 교육을 받은 탄 역시 자유 평등 주의자이니 흔쾌히 보내 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같은 언어의 자유와 평등일지라도 공산주의에 물든 탄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까미유가 엘리안느에게 배운 자유와 평등의 사상은 좀 색깔이 다르지 않을까를 생각해봤다.

약혼녀 까미유를 멀리 떠나보낸 것을 알게 된 탄의 어머니는 탄에게 혼쭐을 내자 탄은 어머니에게 당당하게 맞선다. "까미유는 자유여요, 그녀는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혼자 당당하게 살아갈 거여요, 그녀는 감정을 숨기고 환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낭만주의자여요, 저도 여길 떠날 거구요"라고 말하자 어머니는 탄에게 "네가 감히 조상을 욕되게 해 여기 무릎 꿇어, 명령이야"라고 소리친다.

그러나 탄 역시 굴하지 않고"복종은 인간을 노예로 만듭니다, 프랑스는 우리에게 자유와 평등을 가르쳐 주었어요, 그것을 위해 싸울 거여요"라고 강하게 반박한다. 관습과 인습에 길들여진 어머니와 새로운 사조의 교육을 받은 모자간의 대화를 통해서 오늘날 우리의 기성세대와 자식 간의 자화상을 보는 듯 한 느낌이었다.

그렇다. 위의 대사에 많은 시사점이 있으며 가슴 울렁이게 하는 큰 울림이 심연에 성큼 다가옴은 어쩔수가 없다. 길들여진다는 것 또 길들인다는 것, 우리는 은연중에 억압이든 속박이든 규율이든 윤리 도덕이든 관습 내지는 인습 등에 의해서 무기력하게 창의성과 개성과 자유가 짓밟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한 구속에 아무런 저항없이 무기력하게 습관화되는 것이야 말로 '천부적 자유의 반납이요 노예적 습성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또 상사라는 이유로 선배라는 이유만으로 나이가 만다는 이유만으로 타습과 인습, 오도된 질서와 예의를 은연중 강요 하고 젊다는 이유만으로 올바른 말도 표현 못하고 자유 의지를 매몰 시킨 채 복종과 순종을 강요받기도 한다. 얼마나 엉터리 같은 경우이며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사고방식인가? 깨인 의식없이 자신도 모르게 당연한 것처럼 때에 따라서는 아무런 저항없이 젖어 살게 된다.

또 자신도 모르게 어린 자식에게나 젊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강요함으로서 그 결과 당사자의 자유가 얼마나 침해되고 인권이 훼손 되는지도 모르고 흘러가게 되는 것은 아닐지, 이 영화의 대사만 놓고 보더라도 까미유는 까미유의 삶이 있고 탄은 탄의 삶이 있지 않겠는가? 젊은이여 비록 건방지다는 말을 들을 지라도 이성적으로 옳다고 생각되는 것에 과감히 표현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기를 권려하고 싶다.

결국 까미유는 사랑하는 쟝 밥티스트를 찾아 약혼자 탄을을 뿌리치고 산을 넘고 들을 건너고 강을 건너 또 일거리를 찾아 야간에 배를 타고 가는 노예들의 배에 얹혀 타고 가던 중 온갖 고초끝에 오메불망 사랑하는 쟝밥티스트와 다시 만나게 되나 또다시 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노예를 선별하고 있던 프랑스의 왕초가 까미유의 지인에게 총을 겨누자 그를 제지 하려다가 떨어트린 그의 권총으로 그의 이마에 정통으로 사격을 하게 되며 그 순간 낭자한 피와 함께 아수라장이 되고 까미유는 쟝과 함께 36계 도주를 하게 된다.순간적으로 발발한 사건이었다.

이 총격 사건으로 까미유의 인생은 엘리안느의 사랑받는 여리고 예쁜 딸이 아니라 파란만장한 삶이 시작되는 서곡의 총성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프랑스 지배하의 경찰에 의해 수배 될 것을 감지한 까미유는 배를 타고 쟝과 함께 도주에 도주만을 계속하였다.

쟝이 좌천되어 하롱베이를 통과 했듯 그 둘은 또 다시 하롱베이 호수에 돛단배에 의지하여 도주하는 그들, 먹을 음식도 떨어지고 물도 없이 햇볕만 쨍쨍 내리 쬐는 선상에서 쟝밥티스트는 물 한방울이라도 탈진해가는 까미유의 입에 넣어주기 위해 혼신을 다하며 결국 자신의 침을 입속에 넣어 주어 타들어가는 까미유의 입을 적셔 주었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어느 산골의 조그마한 선착장에 그곳 주민들에 의해 둘은 구원을 받게 되며 수백 년 동안 아무도 차지 못한 심산유곡에 그들은 은신처를 마련해준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또 떠나게 되며 결국 유랑극단에 소속하여 경극이나 가면극 등을 하며 은신겸 어느 정도 자유롭게 세월을 낙게 된다.

까미유는 유랑 생활 중에 아들을 출산하게 되고 사랑하는 쟝밥티스트와 행복하고 단란한 한때를 보내는 듯 했다. 그러나 경찰에서는 중국의 북경지역 등에서 활동하는 100여개의 유랑극단에 대해 의심을 품고 수배령을 내린 가운데 포위망을 좁혀온다.

프랑스 당국의 군인들이 많은 베트남 여인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도주한 까미유의 행방을 묻는 질문에 제각각 방향이 틀리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모습을 보고 프랑스 식민지배에 협조하는 듯 협조하지 않는 베트남 사람들의 당시 일치된 정서와 학습된 모습을 보는 듯하여 묘함을 느꼈다. 프랑스 식민 사령부에 빌붙어 끄나풀 짓을 하거나 완장차고 날뛰는 베트남 사람들도 없는 듯 했다.

냇가에서 아들에게 세례명을 주며 아들의 행복한 미래를 기도 해주던 쟝 밥티스트에게 총구가 코앞에 당도한다. 쟝과 아들이 잡혀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소리도 못 지르고 까미유는 손으로 입을 막은채 울음을 삼킨다. 결국 유랑극단이 일망타진 되고 까미유도 체포된 가운데 감옥에 들어가게 된다.

어린 아기가 있는 쟝은 24시간 자유를 허락받고 아들을 데리고 엘리안느를 찾아간다. 어머니를 떠난 아기에게 당연히 젖이 필요할 것이고 지나던 모든 여성들이 까미유의 아들인줄 알고 앞 다투어 자신의 젖을 물린다. 까미유는 이미 프랑스 사령관을 사살한 투사가 되었고 잔다크나 유관순과 같은 전설적인 인물로 신격화 되고 있는 느낌이었다.

아들을 안고 한때 뜨겁게 사랑했던 연인이자 장모격인 엘리안느에게 도착한 쟝은 아들을 맡겼다. 하룻밤은 아버지와 잠을 자야 한다는 엘리안느의 요청에 잠을 자던 침대에서 아침에 권총과 함께 어린 아들을 옆에 두고 주검으로 나타났다. 경찰은 자살로 추정했으나 공산주의의 은거지 등 비밀을 많이 아는 쟝을 그들이 암살했을 가능성이 회자 되면서 엘리안느의 배웅으로 장례가 치뤄진다.

한때는 "부드럽고 따뜻한 쟝의 손길이 필요하다. 보호해 달라"던 "엘리안느를 사랑하고 엘리안느의 사랑하는 딸 까미유와 인연이 되어 열렬히 사랑했던 야심차고 잘생긴 프랑스인 장교 쟝 밥티스트, 그는 엘리안느에게 "복종을 거부하고 구석진 곳의 무덤보다는 사회의 일원이고 싶다" 말했으나 이국땅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는 철저한 자유 주의자였고 낭만 주의자였던 듯하다.

한편 베트남 공산당에 의해 프랑스가 축출되어 감옥에 있던 까미유는 석방되었으며 곧바로 양모 엘리안느의 품에 안겼다. 엘리아느는 감옥에서 풀려난 까미유에게 땅도 그대로고 까미유를 간절히 기다렸다는 말과 함께 같이 행복하게 살 것을 말한다.

그러나 까미유는 이미 옛날의 까미유가 아니었다. 그녀는 온갖 사랑과 교육을 시키며 보살펴준 양모인 엘리안느에게 "아뇨 괜찮아요. 전 가야되요, 5년 동안이나 생각했어요, 저에게는 과거는 없어요, 너무 늦었어요, 엄마와 그이를 생각했지만 슬픔만 있을 뿐이여요, 제가 살아온 것들로부터 떠날거여요, 행복과 안락과 지위로부터 떠날거여요, 당신의 인도차이나는 죽었어요"라며 단호한 목소리로 "인도차이나를 떠나라“고 엘리안느에게 말한다.

까미유는 옛날 사랑스럽고 가녀리고 연약해 보이던 여인이 아니라 공산주의로 무장된 투사였으며 베트남 내에서는 영웅으로 부상된 인물이었다. 그 후 까미유는 베트남 문제를 다루는 제네바 회의에 베트남 대표로 참석 하게 된다.

엘리안느는 땅을 모두 팔아 정리하고 양녀 까미유의 아들이며 자신의 옛 연인 쟝의 아들이고 자신의 손자인 그를 잡고 홀연히 프랑스로 돌아가게 된다. 그 후 제네바에서 베트남의 대표로 와있는 까미유를 만나라고 까미유의 아들을 회의장 숙소를 알려주고 보냈으나 손자는 까미유를 만나지 않고 되돌아온다."어머니가 먼저 알아봐 주길 원했으나 그런 상황은 없었다"는 이유였다. 그러면서 할머니인 엘리아느가 자신의 어머니라고 말한다.

결국 까미유는 프랑스인인 엘리안느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베트남에서 프랑스식 자유 평등 등의 교육을 받았으나 프랑스인과 조화롭게 살수 없었으며 어려서부터 프랑스에서 엘리안느와 살면서 프랑스 교육을 받은 밥티스트와 까미유의 아들은 베트남에서 조화롭게 살아갈 수 없는 운명이 아녔을까 생각해본다.

영화는 주인공 엘리안느가 스위스의 아름다운 레만호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쓸쓸하고 허전해 보이기만 하는 뒷모습만 보여주면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뒷모습이 그가 살아온 모습이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엘리안느는 그 순간 과연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녀는 "세상에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남자와 여자, 산과 들, 인도 차이나와 나"라고 말하던 엘리안느는 베트남도 농장도 애인 쟝 밥티스트도 사랑으로 키운 까미유도 그 무엇 하나 소유하지 못하고 프랑스의 패배와 함께 베트남 생활을 접어야 했다. 소유하려고 했던 것들은 그저 그녀를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그가 그토록 자신의 생명처럼 사랑하고 돌보며 신식 교육과 세련된 매너 교육을 시켜 어엿한 상류사회의 일원으로 함께 살기를 갈구했던 까미유 마저 그녀를 저버렸다. 까미유의 파란 만장한 삶보다는 베트남인으로서 프랑스인과 조화를 할 수 없는 베트남인으로서의 애국자이며 거룩하고 고결한 삶이 아녔을까 생각해본다. 아니 그녀의 운명이었으리라.

황녀의 피를 타고난 까미유의 DNA속에 프랑스인과 조화하며 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연약해 보이던 소녀가 프랑스 군 대장의 면전에서 이마에 권총을 사격할 수 있는 용기와 투사 정신이 어디에서 연유했을까? 약혼녀 탄을 뿌리치고 사랑하는 쟝을 찾아 떠날 수 있는 열정은 어디에서 연유 한 것일까? 그녀의 내부에 켜켜히 쌓인 에너지가 부러울 뿐이다.

엘리안느가 까미유에게 교육시킨 자유 평등 박애의 프랑스식 교육은 오히려 그녀 까미유가 프랑스식 식민지 속박과 양모인 엘리안느식 억압에 반기를 들 수 있는 밑천을 부여한 것은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억압받는 자국의 민족을 보면서 그들을 구해야 된다는 이념을 더욱 강하게 한것은 아닐까? 까미유에게 공산주의자든 자유주의자인지에 대해서는 따지고 싶은 마음이 없다.

베트남은 현재 1986년부터 "도이 모이" 라는 개방정책을 통해 권위주의적 공산체제하에서도 연평균 7%대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며 역동적으로 발전 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혼과 가슴에는 미국 등 초강대국과 싸워 이긴 자부와 긍지로 충만되어있다. 베트남이야말로 "진정한 민족 자결주의 국가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감히 해본다.

과거 프랑스 식민통치에 대한 恨을 말하지 않고 있으며 과거 월남 전쟁시의 敵을 논하고 있지도 않으며 국부 호치민의 "남 베트남인에 대해 복수를 하지 말라"는 유언을 어느 정도는 준수하면서 "과거 보다는 미래"를 내다보며 서로 "포용과 용서"로 뚜벅 뚜벅 가는 것처럼 보인다. 공산체제의 국가이면서도 또다른 측면에서는 대단한 민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국가이지만 어쩌면 저런 면들이 사실이라면 고결해 보이고 멋있어 보이는 것은 나만 느끼게 되는 사항일까?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로 표방된 개혁 개방 정책 중 멸망한 소련, 수정주의로 경제부흥을 이루고 있는 중국, 그리고 이제 자폐에서 벗어나 허겁지겁 세계에 눈을 뜨려는 북한 등의 예에서 보듯 공사주의도 국가마다 상이하게 적용 되고 있음을 쉽게 엿보게 되는 대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베트남으로 상징 될 수 있는 까미유라는 가녀리고 어린 여인이 베트남인으로서 정체성을 확보하며 두려움 없이 비밀스럽게 미래를 개척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프랑스가 베트남을 품지 못하고 패배할 수 밖에 없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면서 베트남 식민통치에 대한 프랑스의 잘못과 반성을 영화를 제작하는 지식인을 통해 조금이나마 담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감상후기 말미에 스침은 어쩔 수가 없다.

새롭고도 많은 의미와 여운이 남는 영화를 감상했다는 흐뭇한 느낌이 들었다. 또한 인도차이나란 영화를 통해 베트남에 대해서 좀 더 많은 공부를 할 수 있는 계기였던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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