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의 국세청 공직생활…화려했지만 꽃길 아닌 험난한 여정이었다”

-재직시 보람된 일들-

▶국부유출의 최종보루인 국제조사 정예요원 양성
▶지능적 부가가치세 부당환급 횡령범 검찰 공조로 금지금거래자료상 발본 척결

▶부동산안정대책의 최후 보루인 종합부동산세 자진신고율 98.2% 역사적인 성과
▶핵심인재양성 등 중장기 5개년 교육양성프로그램 개발
▶현장 실무중심의 소득세사무처리 규정 신설

“세무사회장은 기재부-국세청 높은 담 허물 수 있는 파워맨이어야”
“세무사라는 공익의 당위성 의견 공론화 할 수 있는 역량 갖춰야“

세금은 국가를 움직이는 힘입니다. 그러나 그 세금은 정의로워야 하고, 공평해야하고 또 당당해야 합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공평한 세제, 공정한 세정, 균공애민(均貢愛民)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 지고지순한 가치를 위해 평생 살아온 분들은 누가 뭐래도 ‘세금밥’먹는 세금전문가들일 것입니다. 기획재정부 세제실맨, 국세공무원, 그리고 세무사로 살아가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 길을 각자의 위치에서 한평생 앞만 보고 쉼없이 달려온 당신, 국가를 위해 납세자를 위해 한 시대를 풍미하고 있지만 진정 행복했습니까? 평생을 몸바쳐온 여정에서 기쁨보다 슬픔이, 즐거움보다 안타까운 일들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한번 쯤 반추해보고 가족과 지인, 옛 동료들과 함께 피식 웃어보는 여유로움과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 보자는 취지에서, 그리고 제2의 인생 후반기 은퇴이후에도 아들 손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인생의 추억과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는 ‘대화록’을 만들어 보고자 합니다.

‘공평한 세상을 꿈꾸는 세정일보’기자들이 세무법인, 회계법인, 법무법인 등 각 분야에서 세금과 함께 평생을 일구어 온 명망이 높은 조세전문가들을 만나 ‘[레전드&談]’이라는 제목으로 어제와 오늘의 일상과 에피소드 등을 소담스럽게 담아내어 후배들에게 전하고 또 기록으로 남겨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기획을 해 보았습니다.

세금전문 정론지 세정일보는 당신의 값진 삶을 소중하고 의미 있게 다루어 영구적인 기록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아가 ‘대화록’을 저희 매체에 보도하는 한편 네이버, 다음, 구글 등 포털사이트에도 올릴 계획입니다. ‘레전드’분들이 원하시면 책으로도 발간하여 오래도록 간직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편집자 주
 

◆ 7급에서 고위공무원단까지 35년…리스펙트(Respect)한 ‘레전드’

김상현 ‘탑코리아세무법인 회장’ 대표세무사는 국세공무원 35년, 세무사경력 9년차의 ‘리스펙트한 레전드’로 세정가에서 닮고 싶어하는 인물이다.

매사에 조급함이 없이 유연한 성품은 공직에 있을 때나 세무사로 일하면서도 한결같다. “되돌아보면 내 삶의 여정이 꽃길은 아닌 것 같다. 국세공무원 35년을 반추해보면 기억에서 살아 숨 쉬는 굵직한 일들이 많았다. 퇴직하면 건강 챙기며 편안하게 사는 게 작은 소망이었는데, 재직시 따놓은 ‘세무사자격증’이 문제였다”며 환하게 웃는다. 그 자격증을 장롱 밑에 마냥 처박아 둘 수 없었다는 사연이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일이 뭐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 회장은 이같이 말하면서 “지금껏 살아온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었다. 계획대로라면 유유자적한 삶을 즐기고 있을 텐데, 세무사자격증 때문에 목표가 빗나가게 됐다”며 담담하게 말했다.

◆ 35년의 국세공무원 생활 기억에 오래 머무는 일들

공직생활에서 승진은 고달픔의 일상에서 재충전의 기회를 부여한다. 일을 잘한다는 인정을 윗사람으로부터 받아 승진하는 기쁨을 어찌 잊겠는가.

1976년 7급 공채시험에 합격, 첫 부임지 부산동래세무서를 거쳐 동부산세무서로 자리를 옮겼을 때였다. 당시 고재일 국세청장은 복식기장의무화 촉진정책으로 국세청주관 부기시험 2급과 법인조사요원시험에 합격하면 특별한 제한여건이 없다면 승진에서 우선혜택을 부여하였다.

상업고등학교 출신이 아니라서 힘든 주산자격증을 따고 부기시험 2급에 도전하여 쉽게 합격했다. 그 덕택으로 6급(주사)으로 승진과 동시에 울산세무서 소득세계 차석자리에서 소득세조사 등 실무경력을 쌓아가기 시작하였고, 밀양세무서 소득세계장으로 보임된 후 1982년 2월 중부지방국세청 평택세무서 소득세계장으로 발령받아 서울로 진입하는 교두보를 마련했다.

마침내 그는 도봉세무서 법인세계 차석으로 발령 나면서 서울진입에 성공한다. 동경했던 본청근무의 길도 83년도에 열렸다. 본청의 첫 부임지는 소득세과 소득2계로서 법령·예규업무를 담당하였는데, 국세청교육원장을 두 번이나 지낸 적이 있는 임지순 사무관이 소득1계장이었고 서울지방국세청장을 지낸 조중형씨가 직세국장이었다.

그 당시 중요한 업무프로세스 성과를 든다면 본청 차원에서 전임자들께서 오랫동안 준비만 하고 미루어 왔던 △소득세사무처리규정 신설과 동시에 소득세법상 업무추진에 필요한 제반 서식들을 1권의 책으로 편집하여 당시 복사기가 형편없던 시절의 일선실무자들에게 실제 업무 집행과정에서 많은 업무편의를 제공하였고 △소득세 기본통칙도 새롭게 개정하고 △그간 발생한 최신예규 질의 회신집 등을 발간 제공함으로써 세무주사의 신분으로 1년의 짧은 기간에 열정적으로 노력한 결과였다.

특히 소득세 사무처리 규정 신설과 120여 종류의 신고서식집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공병우식 타자기로 타자수(여직원)의 도움없이 직접 워딩을 하면서 이루어낸 결실들이라 매우 애로가 많았지만 주위에서 칭찬도 많았기 때문에 보람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 민원봉사실 근무 자처했다가 코피 터진 애피소드

본청 소득세과 1년 근무 후 약속대로 반포세무서 소득세과 조사1계 차석으로 전보됐다. 당시 국세청에서는 처음으로 전국세공무원을 대상으로 세목별 주무요원자격시험을 실시하였는데 소득세와 법인세주무요원자격시험에 응시하여 모두 합격하였으며 소득세주무요원시험에서 전국 응시자들 중 1등을 차지했다. 그 결과 동대문세무서 소득세계장으로 발령됐다.

이때가 1986년 초. 전 국세공무원이 납세자에게 친절봉사하자는 캠페인 바람이 거세게 불 무렵이다. 가슴에는 ‘스마일 배지’를 의무적으로 달고 다녀야 했다. 본청과 지방청 감찰반에서 수시로 ‘스마일 배지’ 부착여부 감찰을 위해 일선세무서를 들락거렸다. 구내식당이 없던 보광동에 소재한 동대문세무서는 불리했다. 점심때면 배지를 떼어 놓고 밥을 먹으려 다녔기 때문에 여간 불리한 입장이 아니었다. 감찰반은 불시에 나타나 단속하는 바람에 단속에 걸려드는 사람이 의외로 많았다. 직원들 중 한번이라도 지적을 받아도 소속 계장은 인사고가에 반영되어 특히 승진을 애타게 바라는 직원들에게는 불리한 작용을 했다.

지금생각하면 웃기는 애피소드가 아닐 수 없다. 점심시간 외식 때도 배지를 달고 다니면 그만인 것을 굳이 떼어놓고 다니려는 지배적인 분위기는 뭔지 아리송하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이러니 하지만 당시 공무원세계에서 국세공무원만 스마일배지를 달고 다녀 국세공무원 티를 바깥까지 노출시킨다는 것이 다소 찜찜한 기분의 한 단면이 아니었나 생각된다고 술회한다.

일반 직원으로 시작했지만 관리자인 사무관 승진시험을 준비해야 했던 나에게는 이런 사소한 문제도 신경이 쓰였다. 1987년 여름 본청 국제조세3과에 근무하면서 총무처 주관 5급 일반공개경쟁승진시험에 도전하여 1차시험에 합격하였으나 최종 합격자 발표에서는 낙방했다. 칠전팔기 재도전을 위한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비부과 부서에 근무하면 퇴근시간 후에 공부할 시간을 다소나마 챙길 수 있겠지 하고 잔머리를 굴렸다. 그래서 국장에게 자택에서 가까운 일선세무서 민원실로 보내달라고 요청한 결과 다행히 강서세무서 민원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민원실 대표전화번호가 678-2100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민원실 모든 전화가 실장자리로 집중적으로 연결되는 시스템이었다. 이 전화번호는 영등포세무서 관할 전화국의 678-****으로 영등포세무서 납세자들의 문의전화와 세무사시험 서울지구 원서접수 창구 안내번호로 주소와 위치안내 문의전화, 강서구청 및 양천구청 관내 납세자들의 민원전화 등등 하루 통화량이 너무 많아 잠시도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전화와 씨름하다보면 정신이 혼미할 정도였다. 어떤 날은 통화량이 너무 많아 코피를 흘리기도 했다. 여우를 피하면 범을 만난다는 속담처럼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틈틈이 공부할 욕심으로 민원실을 택했다가 되레 업무량 과부하로 인해 몸살을 앓기도 했다.

결국 사무관 일반공개경쟁승진시험에 낙방했고, 3년을 기다렸다가 1990년 5급 일반승진시험에 합격했다. 사무관 승진 후 첫 부임지는 남부산세무서 총무과장 자리였다.

7급 첫 부임지도 부산동래, 사무관 첫 부임지도 부산, 부산과의 인연이 우연치가 않다는 기자의 물음에 ‘그렇다’며 동래→동부산→울산→밀양→남부산 등 부산지방국세청과의 인연이 모두 8년이면 보통 인연은 아니라며 국세공무원 초년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 부산이라고 전했다.

◆ 사무관 승진 이후 거침없는 행보

이처럼 부산은 김 회장에게는 의미 있는 곳이었다. 국세청 부이사관 직에까지 오르도록 밑거름이 된 곳이기도 하다. 사무관 첫 부임지 남부산 총무과장 때는 출강을 많이 다녀 나름대로 지역유지들을 알게 되어 외연관계 확대는 물론 부산대학교 경영대학원을 다녀 석사학위도 받았다.

이어 그는 1990년 9월 24일부터 1998년까지 본청 국제조세3과→소득세과→북인천 법인세과장→서인천 부가세과장, 동작 소득세과장→본청 소득세과 2계장 등 국세공무원으로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그는 1999년 1월 14일 마침내 국세공무원 최고의 꽃길인 서기관으로 승진, 고공단 반열에 오를 기회를 잡는다.

IMF 외환금융위기를 거쳐 외환자유화에 따라 국제거래의 사각지대였던 당시 상황으로서는 역외탈세가 기승을 부릴 무렵이었다. 서기관 승진과 함께 본청 조사국 국제조사과 1계장에 오른다. 공무원 생활 ‘공적1호’로 꼽는 국제조세 정예조사요원 300명 양성 프로젝트를 직접 디자인하고 강사섭외 및 교육진행을 주도해 왔다.

본청 및 지방청별로 조세범칙전문요원, 국제조세전문요원, 소송전문요원 등 각종 전문요원자격자 중에서 경력, 학력, 인성, 성별로 균형있게 선발하고 행정고시출신사무관 5명이상을 포함하여 국세청 최고의 교육과정으로 운영했다. 교육 종료 후에는 국부유출전담인 국제거래조사분야에 우선 배치하는 사명감과 집념, 끈기를 겸비한 우수국세조사요원을 은밀하게 엄선하여 관리해 왔던 것.

국제조사요원들은 짜여 진 교육프로그램에 의해 8주간의 교육을 받았다. 국세청이 역외탈세에 대비한 첨단 교육을 처음으로 시작한 것이다. 교육 커리큘럼은 국정원 정보대학 교수4분의 정보학과 정보채증기법 등, 경찰공무원 수사실무 교수, 서울중앙지검 외사부 검사, 한국은행 외환관련 간부, 외환거래실무와 파생상품전문 교수님들, 미국소득세법 실무와 조세협약, 수출입 절차와 무역실무, 범죄심리학, 하버드로스쿨의 미국대법원 조사판례 사례 등 국제거래와 수사실무 등에 국제거래와 관련된 필수적인 최고의 교육을 수강하는 특수전문분야의 우수한 강사진들이 참여토록 섭외하는 과정에서 빈약한 강사료 지급 예산 등으로 애국심에 호소하며 동참을 이끌어내는 어려움도 많았다.

국제조세 조사요원교육이 끝나고 조사팀이 정예화 되자 본격 역외탈세조사가 시작됐다. 첫 조사 타킷은 K항공사로 국세청의 국제거래분야 조사성과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외에도 국제거래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여 탈세추징세액 실적을 높인 것도 기억에 오래 남아있다.

김 회장은 가는 곳 마다 일복이 터졌다. 서기관 승진 이후 두 번째 부임지가 중부지방국세청 인사계장. 부임하자마자 국세청의 숙원이었던 정도세정의 실천으로 지역담당제가 폐지되고 기능별세원관리제가 전국적으로 새로 도입 시행되는 획기적인 세정개혁시기였다.

세 차례에 걸친 지역별 인사 참고조사를 실시하여 직원마다 자택과 근무지와의 거리 및 출퇴근수단(버스, 지하철, 자가용)과 소요시간들을 전수 조사하여 전국 세무공무원들의 인사관리카드에 등재하여 인사자료로 활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인사 앙케이트에 나타난 개선의견을 본청장에게 직접 보고하여 대부분 반영하기도 했다.

또한, 정기인사작업과정에서 현 근무지 잔류희망과 희망부서 등을 낱낱이 보고 받아 인사에 반영하는 일종의 인사혁신이었다. 당시 처음 맡아본 인사업무에서 최대한 공평무사한 인사를 위해 난생 처음으로 ‘우루사 한 알과 영진구론산 1병씩’ 나눠주며 직원들과 함께 3일 밤을 뜬눈으로 지새워야 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리고 2001년 1월 대통령비서실 총무담당 인사행정관으로 발령받아 1년간 근무하다 처음으로 일선 세무서장에 올랐다. 첫 부임지는 남양주세무서(2002년 1월).

그는 남양주세무서장 1년을 하면서도 많은 일을 했다. 정도세정이후 다소 서먹해진 세정분위기를 온화하면서 성실납세가 선행되도록 해야한다는 생각에서 납세협력방안의 일환으로 관내 세무대리인들과는 세정의 진정한 동반자차원에서 친목체육대회를 처음으로 개최했다.

또 당시엔 존속되지 않았던 세정협의회를 지방청장이상 표창을 받은 성실납세자 중심으로 4개 시군지역별, 업종별로 균형감있게 구성하여 국세행정의 대변환과정과 절차를 적극 홍보하기 위해 납세자와의 신뢰와 성실납세에 감사하는 가교가 되도록 노력했다.

세정협의회는 매월1회 열어 국세청의 세정운영방향과 협조사항 및 주요세정 변화 등 업무흐름을 직접 설명하여 세정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고 성실납세가 애국자라는 자부심을 갖는 기회를 가져 납세의식을 제고하는데 기여했다.

남양주서장 1년 만인 2003년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1과장으로 발령됐다. 그 자리에 앉자마자 ‘금지금거래’ 부가가치세 부당환급 사건이 터졌다. 홍콩을 거래 매개처로 해서 골드바(금)를 수출했다가 다시 수출한 금을 수입하는 방식의 위장거래수법을 동원한 거래였다.

이들은 우리나라 금수입량은 연간 70톤 규모임에도 최고조에 달할 때는 월30톤이상의 금수입으로 부당환급된 부가가치세를 재원으로 다시 금지금을 영세율 또는 면세수입하여 시중가격보다 10% 저렴하게 유통시키면서 5단계이상을 변칙위장 거래하여 과세거래로 전환하고, 부가세는 무납부하고 폐업하는 수법을 이용했다. 결국 마지막에는 폭탄조가 개입, 부가가치세 불법환급 메카니즘 범죄조직을 활용해 5천억원이상 약2조원대의 부가가치환급금을 불법부당하게 받아 챙기는 지능적 조직적인 조세포탈행위를 반복적으로 해오다 덜미가 잡혔다.

IMF이후 금모으기 운동으로 금수출이 한창인 시점이어서 위장수출배경에는 국내 굴지의 재벌그룹 종합상사까지 포함돼 있었다. 그는 이 사건을 국세청과 부가가치세제의 존폐라는 기로에서 검찰과 공조해서 치밀하게 진두지휘해 부가가치세 부당환급 메카니즘을 뿌리 뽑는데 공헌했다. 이러한 그의 업무추진력을 인정받아 특별조사국으로 알려진 조사4국1과장 자리를 보기 드물게 2년이상 근무하는 기록을 남겼다.

◆ 국세공무원교육원장을 끝으로 영예로운 공직을 마감하다

그는 이후 국세청 종합부동산과장(2년)을 거쳐 2007년 부이사관으로 승진, 국세공무원교육원 운영과장에 오른다. 교육원 운영과장으로 재직하면서도 많은 일을 했다. 하위직을 겨냥한 3단계 핵심인재 양성 및 액션런닝 등 역량향상 프로그램 5개년 중장기교육계획을 수립 시행하는 등 남다른 열정과 역량으로 진정한 세무공무원의 질적 가치를 제고하는 등 모름지기 후배양성에 최선을 다한 자랑스러운 인물로 평가받았다.

이어 국세청 고공단으로 승진(2008년 4월10일)하면서 중부국세청 조사3국장, 서울국세청 조사3국장, 마지막 은퇴무대는 국세공무원교육원장(2009년 7월27일~2010년 6월30일)이었다.

◆ 국세공무원 35년의 보람과 공적을 꼽는다면?

본청 국제조세과 근무당시 300명 국제조사요원 양성을 시발로 현재는 약1천여명의 국제조사요원 양성되어 역외 탈세방지에 첨병역할을 담당 △지능적 금지금거래 자료상 일망타진으로 전단계 세액공제방식의 부가가치세제의 지속가능 △본청 종합부동산세 과장 시절 세대별합산 등으로 저항이 많았던 종합부동산세를 정치하게 준비하여 자진신고율 98.2%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워 당시 전군표 국세청장이 참여정부로부터 칭찬을 받는 계기를 마련 △6급주사시절에 현장 실무중심의 소득세사무처리 규정 신설 등이 생각납니다.

그는 공직생활 35년의 에너지가 담겨있는 일들이라 잊을래야 있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 세무사로서의 또다른 인생의 보람

김 회장은 국세공무원교육원장으로 재직하다 퇴직하면서 2010년 그해 ‘세무법인 하나’ 부회장으로 취임했다. ‘원펌’체계의 하나에서는 회사의 방침대로 기업의 경영컨설팅, 세무조사 대행, 조세불복 사건을 주 업무로 일했다. 세무사들의 일이 다 그러하겠지만, 납세자권리보호업무 및 억울한 과세에 따른 대응 논리를 개발해 조세소송에서 승소를 이끌어내는 일이 전부다.

정말 억울한 세금을 수없이 구제해 줬다. 불복승소율이 90%이상이었다. 가끔씩 납세자들로부터 “세무사님 고맙습니다. 철저한 건강관리로 변함없이 납세자권리구제에 힘써 주십시오”라는 격려편지를 받고 있다고 했다. 최선을 다해 일한 성과를 편지한통으로 보상받기는 힘든 직업이지만 제2의 인생을 구가하는 입장이고 보면 납세자의 격려 한마디가 보약이며 청량제라고 했다.

그는 며칠 전 8년여의 ‘세무법인 하나’ 부회장에서 물러나 ‘탑코리아 세무법인’ 회장에 취임했다. 이곳에서 뿌리 깊은 나무가 되도록 최선을 다할 각오라고 했다.

◆ 자식 농사는?

김 회장의 고향은 전남 장성군 장성읍. 슬하에 2남1녀를 두고 있다. 큰아들(76년생)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 미국 LA에서 미국공인회계사(AICPA)자격을 취득하고 현지 회계법인에 잠시 근무하다가 현재는 국내 N그룹의 현지법인의 재무이사(CFO)로 재직중이다. 차남(78년생)은 홍익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국내 D건설회사에서 차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두 아들과 딸들 모두 결혼하여, 손자를 4명이나 둬 다복한 일가를 이루고 있다고 했다.

◆ 한때 세무사회장을 꿈꾸기도 했는데 세무사회장이 가져야 할 덕목이 있다면?

지난해 8월 세정일보에 ‘근로소득자 신용카드 소득공제 존치와 전자신고 세액공제 제도 확대’에 대한 나름대로의 소고를 기고한 적이 있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세수를 확대하기위한 수단으로 신용카드 소득공제를 없애는 한편 전자신고제도의 일등공신인 세무대리인들에게 납세협력비용의 일부보전명목으로 지급하던 전자신고세액공제액을 축소하는 방안에 대한 반대논평을 법적논리에 맞게 지적했었다.

제가 쓴 글에는 근로소득자 신용카드 소득공제 제도가 왜 생겨났는지, 없애면 어떤 부작용이 발생하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전자신고세액공제 역시 같은 맥락에서 세액공제를 현실보다 확대되어야 하며, 왜 축소하면 안 되는지를 명확하게 밝혔다. 문제는 주장의 타당성이다.

한국세무사회는 산하 13,000여명의 회원이 있고 이 13,000여명의 회원은 모두 세무사다. 세무사의 본분은 납세행정의 동반자라고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납세자의 권리구제가 우선이다. 회원세무사가 타당성 있는 주장을 제기했다면, 공론화의 길을 모색해야 정도正道라고 생각된다.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한다면 비전은 커녕 공멸의 지름길로 가는 것이라고 본다. 세무사회 회장과 임원은 모름지기 회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하고 전체 회원의 공익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목적을 쟁취해야 한다고 봅니다.

변호사에게 세무사자동자격부여를 폐지하려고 하다 목에 가시가 걸려 이젠 세무사 전체시장을 내어 줘야하는 처지가 됐다. 변호사측에서는 세무조정업무, 성실신고확인업무, 기장업무까지 모두 달라고 하는데도 세무사회에서는 임원들이 간헐적으로 반대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힘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만 들려온다.

기획재정부 및 국세청의 담장 벽이 높다고만 불평하지 말고 높은 담장을 허물 수 있는 역량과 자질을 겸비하고 업무추진력이 강하면서 협상력이 강한 리더십이 있는 회장이 절실히 필요한 때라고 본다.

보다 많은 새로운 업역을 확보하고 세무대리인으로서 역할에 버금가는 납세협력비용 보전을 위해서 입법 활동을 위해 전력투구하면서 말만 앞세우고 실천력이 뒤처지는 인물보다는 엄정하게 현실을 파악하고 확실한 미래의 발전을 진정으로 담보한 인물을 선출하고 당선자와 낙선자 모두가 세무사회의 무궁한 발전과 영광을 위해 서로 진정성있게 화합하고 협조해 나아가야한다고 생각한다.

세무사회의 감독기관인 기재부장관의 작년도의 감사결과를 수용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 거부한다면 그의 합당한 이유를 제시하여 시정을 요구하던지 그 처신을 명확히하여 세무사회가 진정한 발전과 대리인의 업역을 확대하는 일에 더욱 매진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 김상현 탑코리아 세무법인 회장은?

-1975년 02월 24일, 조선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법학사)
-1993년 08월 21일, 부산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
-1995년 11월 07일, 세무사 자격취득(No 9056)
-2001년 12월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최고위과정
-1976년 11월 04일 부산지방국세청, 동래, 동부산, 울산, 밀양세무서
-1982년 02월 01일 중부청 평택세무서

-1982년 07월 12일 도봉(법인), 국세청(소득, 국제조세3과) 및 반포, 동대문, 강서, 남부산서
-1990년 09월 24일 사무관승진, 남부산(총무), 국세청(국제조세3과, 소득세과), 북인천(법인), 서인천(부가), 동작(소득)
-1999년 01월 14일 서기관승진, 국세청(국제조사과), 중부청(인사계장)
-2001년 01월 01일 대통령비서실 총무비서실 인사행정관(과장)
-2002년 01월 14일 남양주세무서장 1년, 서울청4국1과장 2년, 국세청 종합부동산세과장 2년

-2007년 02월 14일 부이사관승진, 국세공무원교육원(운영과장)
-2008년 04월 10일 ~ 2009년 07월 26일 일반직고위공무원 승진, 중부청 조사3국장, 서울청 조사3국장
-2009년 07월 27일 ~ 2010년 06월 30일 국세공무원교육원장(일반직 고위공무원)
-2010년 09월 27일 ~ 2019년 02월 28일 세무법인 하나 대표세무사(부회장)
-2011년 02월 ~ 2013년 02월 롯데제과(주) 사외이사

-2019년 03월 11일 ~ 탑코리아 세무법인 회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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