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제3대 ‘칼리굴라’ 황제의 경우-

▲이상환 세무사(강남대대학원 세무학과 박사과정)

로마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본명 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 BC63 ~ AD14, 재위 BC27 ~ AD14]를 이어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Tiberius Caesar Augustus, BC 42 ~ AD 37, 재위 AD 14∼37]가 77세의 나이로 휴양도시 나폴리의 한 별장에서 숨을 거두자, 그의 손자격인 칼리굴라(Caligula) [본명Gaius Caesar Germanicus, 12.8.31. ~ 41.1.24, 재위 37~41]는 24세 7개월의 젊은 나이로 로마 제3대 황제로 화려하게 즉위하게 된다.

그의 즉위는 로마 시민뿐만 아니라 멀리 라인 강 방위선(지금의 독일영토 내)에서 근무하는 군사들에게는 더없는 기쁨이었다. 당시 총사령관 게르마니쿠스(Germanicus)의 셋째 막내아들인 칼리굴라는 병사들이 만들어준 유아용 ‘칼리가(로마 군화)’를 신고 아장아장 연병장을 돌아 다녔기 때문에 병사들은 그를 ‘가이우스’라 부르지 않고 ‘칼리굴라(작은 군화)’라 부르며 더없이 예뻐하였던 것이다.

2대 황제 티베리우스가 나중에 속세(로마)를 떠나 오랫동안 나폴리 ‘카프리’섬 별장에서 사실상 은둔생활을 하다 ‘미세노’에서 숨을 거두자, 로마시민은 젊은 황제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고, 황제 즉위식에 수많은 꽃다발을 던지며 그를 반겼다.

젊은 황제는 즉위하자마자 원로원으로부터 ‘제일인자(princeps)’, ‘황제(imperator)’, ‘호민관(護民官, Tribunus Plebis)’ 특권, ‘국가의 아버지’ 등 많은 존칭과 권위를 인정받으며 출발하였고, 심지어 그는 로마신화 최고의 신 유피테르[Jupiter(영어발음, 주피터), 그리스의 최고의 신 제우스(Zeus)]와 동격의 살아있는 신으로 대접받고자 하였다.

그는 로마시민들이 그에게 거는 기대에 부응하고자 그동안 금지되어왔던 ‘검투사 시합’과 ‘전차경주’를 부활하였고, 1%의 ‘매상세(賣上稅)’(오늘의 소비세)를 폐지하였으며, 티베리우스의 유언에 따라 물려받은 2억7천만 세스테르티우스(Sestertius)에서 서민층과 병사 등에게 300세스테르디우스(당시 직업군인인 병사의 1년치 급여의 1/2정도)씩을 황제 즉위 기념으로 나누어 주었다.

칼리굴라가 황제에 즉위하고서 약 7개월 동안 로마는 날마다 명절 같은 분위기였고, 날마다 어딘가에서 검투사 시합이나 전차경주나 체육대회가 열리고 연극이 상연되었다. 그 결과는 황제 개인뿐만 아니라 막대한 국가예산이 소요되었던 것이다.

칼리굴라가 즉위한 지 3년도 지나기 전에 황제의 사유재산은 물론이요 국가 재정까지 파탄 나게 되었다. 이유야 어떻든 낭비(浪費, dissipation, 시간이나 재물 따위를 헛되이 헤프게 씀)라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갈수록 심해지는 숙명을 갖는 것이다. 로마의 시민들은 칼리굴라가 베푸는 진수성찬에 자기도 모르게 입맛이 들어 버렸던 것이다.

가까스로 그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거래가액의 1%를 징수하던 매상세를 폐지한 것을 이제는 어쩔 수 없고, 로마 속주민이 안보의 대가로 납부하는 수확액의 10%를 납부하는 속주세의 세율을 올리기도 쉽지 않았다. 결국 그는 황실의 가재도구와 패물에서부터 노예까지도 경매에 내놓기로 하였다. 경매장소는 수도 로마보다는 속주 갈리아(지금의 프랑스)의 수도인 ‘리옹’에서 하기로 하였다. 로마에서보다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황제 일가에 대한 경의와 동경으로 비싸게 매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였다.

그가 조세정책으로 손을 보게 되는 세제는 당시 로마에서 민사재판의 대상이 되는 금액의 2.5%를 수수료로 국고에 납부하던 것을 중도에 소를 취하하여도 반환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시내에서 팔리는 ‘땔감’에도 세금을 부과하였고, ‘매춘업자’와 ‘창녀’에게도 수입의 일부를 세금으로 매겼으며, 심지어는 시장의 ‘짐꾼’에게도 하루 수입의 1/8을 과세하였다.

더욱 웃기는 일은 유산자의 사망 시 상속재산을 상속받는 대상에 황제 자신도 이름을 넣으라는 강제규정을 만들었다. 피상속인의 6촌 이외의 사람이 상속하는 경우, 5%의 상속세를 국고에 납부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칼리굴라가 즉위할 때 열광적으로 지지했던 시민들의 반응은 점차 싸늘해지기 시작하였고, 그는 이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이후 칼리굴라는 느닷없이 7개월 동안 갈리아 지방으로 떠나 있었다. 다시 돌아온 그는 손쉬운 자금 마련책은 서민이 아니라 원로원 계급이 대부분인 부유층으로부터 빼앗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하자 일반 시민들까지도 칼리굴라에게 싫증을 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무리한 세금 부과는 모든 민중의 반감을 사기 시작하였다. ‘테러(Terror)'라는 행위는 문명이 미숙해서가 아니라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어서, 그 한 사람을 죽이면 정치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칼리굴라에게 기대했던 로마 시민의 열광이 차갑게 식기까지는 3년 반밖에 걸리지 않았다. 당시 실행한 무상 지급한 ’밀‘과 인기 정책인 ’각종 경기‘가 있는데도 일반 시민의 지지도까지 떨어진 결정적인 것은 ’땔감‘에까지 부과된 세금 때문이었다. 당시의 땔감은 생활에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었던 것이다.

드디어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다. 서기 41년 로마의 팔라티노 언덕(로마의 7개 언덕 중에서 황제의 궁전과 귀족들의 거주지가 모여 있던 곳)에서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치는 팔라티노 축제가 열리고 있던 날이었다.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연극 또는 각종 경기대회가 이어지고, 닷새째 되는 날에는 연극 상연이 있었다. 관람을 마친 칼리굴라 황제와 그 가족들은 집으로 가는 길에 황제의 근위대 대장으로부터 무참히 죽임을 당하였다. 로마 3대 황제 칼리굴라는 재위 3년 10개월 만에 28세의 나이로 모든 것을 마감하게 되었다.

칼리굴라 황제를 암살하고 그의 숙부인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Claudius 1세, BC10~AD54, 재위 41~54)가 즉위하게 되고, 그의 즉위에 공헌하였다하여 근위병들은 1인당 1만 5천 세스테르티우스의 포상금을 받았으며, 직접 살해에 가담한 근위대장 2명은 사형선고를 받는 것으로 칼리굴라황제 테러사건은 마무리가 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 제국의 청사진을 그렸고, 그 청사진에 따라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의 기반을 구축하고, 티베리우스가 튼튼한 반석위에 세운 제정 로마는 일시적이나마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2천 년 전의 제정로마에서 일어난 무리한 조세정책에 따른 민중의 반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되짚어보면서 많은 것을 회상케 한다.(위 내용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에서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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