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창규
한국세무사회장

2003년 이전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변호사는 국세청에 세무사 등록을 한 후 장부기장, 세무조정 등 일반 세무사가 하는 세무대리 업무를 무제한 할 수 있다. 이렇게 국세청에 등록한 변호사는 2007년까지 500여 명에 불과하였으나 대한변협 등의 적극적인 홍보로 인해 2010년에는 약 3,300명이 등록하여 세무대리 업무를 준비하였다. 하지만 대다수 변호사는 세무대리를 한 건도 수행하지 못했고 이들에게 세무사는 ‘장롱 속 자격증’이 되어 버렸다. 이후 등록자 수가 매년 급격히 줄어들어 2017년에는 84명에 불과하였고, 그나마 이분들 중 11명만 세무사가 일반적으로 수행하는 세무조정을 하고 있다. 물론 변호사가 되기 전에 세무사 또는 회계사로서 기장과 세무조정을 한 경험이 있는 분들이 여기에서 선전하고 있다. 결국 6~7000명에 달하는 2003년 이전 변호사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세무조정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지만 세무조정에 필요한 회계와 관련 세법을 익혀 세무사 업무를 하고 있는 변호사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벌어졌을까? 세무사 사무실 경영은 전문성과 경험을 축적하고 자세를 낮추어 고객기업을 확보하기 위한 영업에 온전히 전념해도 쉽지 않은데, 회계와 세무에 문외한인 변호사가 본연의 업무인 법률사무와 병행하면서 부수적으로 수행하는 세무대리에서 수익을 창출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먼저, 세무대리는 대학에서 관련 교과목을 이수하면서 전문성을 다지고, 다년간 준비한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6개월 이상의 실무교육을 이수한 후, 수년간 세무법인 등에서 선배들에게 도제식 교육을 받은 자에게 길이 열리는, 그야말로 세무전문가의 영역이다. 게다가, 세무사는 기장과 세무조정이 주 업무인 만큼 적어도 수십 개의 거래기업을 관리해야 한다. 즉, 수많은 중소기업 임직원이나 자영업자에게 기꺼이 을이 되어야 한다.

매년 대폭적인 세법개정과 다양한 직종에서 새로운 거래형태의 출현 등으로 인해 업무에 필요한 세법, 회계기법 등을 지속적으로 현재화하고 학습해야 하는 부담도 크다. 너무나 잦은 세법개정으로 인해 오류의 위험이 큰 양도세 세무대리를 포기한다는 데에서 유래한 ‘양포 세무사’라는 신조어와 개정 세법, 전산회계 등에 대한 특강이 있으면 세무사나 사무직원으로 거의 항상 만원을 이루는 현상이 이를 대변한다. 이를 게을리 하는 등 업무에 전념하지 않으면 징계, 손해배상 등 책임추궁이 뒤따른다. 매년 수십 명의 세무사가 영업정지 등 징계를 받으며, 매년 손해배상책임보험에 가입한 세무사 중 약 5%가 세무대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착오 등으로 인해 고객기업에 손해배상을 하고 있다. 특히 개별 세무사가 수행한 세무조정에 대해서는 전문가 집단으로 하여금 엄격한 감리를 하고 있는데, 약 2.5%가 부적정으로 판정된다. 부적정 세무조정은 대체로 형식적인 지식의 부족보다는 오랜 학습과 경험에 의해 축척되는 암묵지(暗默知)가 부족한 세무사들의 결과물이다.

다시 말해 세무대리 업무에 잔뼈가 굳은 세무사도 업무에 전념하지 않으면 징계나 손해배상을 당하기 십상이며, 수익을 실현하기 어려운데 비전문가인 변호사는 말할 나위가 없다. 3,300여 변호사가 세무사 등록을 하고 혹여나 하는 마음으로 세무대리 시장을 기웃거렸지만 결국 포기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법이다. 더구나 최근에는 급격한 임금인상과 사무직원 확보의 애로로 인해 20~30년 된 중견 세무사들도 어려움을 호소할 만큼 시장상황이 악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변호사측은 거의 대다수 세무회계나 세법을 배운 적이 없는 2004~17년에 합격한 18,000여 변호사에게 13,000여 세무사가 담당하고 있는 세무대리 시장을 아무런 교육이나 검증 과정을 거치지 않고 내어달라고 한다. 일반 세무사는 수년간의 준비과정을 거쳐 시험에 합격한 후 6개월의 실무교육을 받아야 등록을 할 수 있는데 전혀 다른 시험과목으로 합격한 변호사가 이 과정을 완전히 건너뛰고 등록하여 세무사를 개업하겠다는 주장이다. 지나친 선민의식과 자만심이 아닐 수 없다. 변호사 시험에 회계학은 아예 없으며, 선택과목인 조세법은 세무사에게는 상식 수준인데, 이마저도 방대하며 어렵다고 2.5%만 선택하는 현실에서 변호사가 이 업무를 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며,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18,000여 변호사에게 무차별적으로 세무사 등록이 가능하게 되는 상황에서, 변호사의 고유 업무인 법률사무에서 경쟁력을 잃은 변호사가 세무대리를 한다고 나선다면 이는 사실상 명의대여를 하겠다는 것이다. 2003년 이전 변호사의 사례에서 보듯이 행정력 낭비와 함께 변호사의 초기 진입과 퇴출과정에서 시장에 엄청난 혼란이 발생할 것이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납세자와 30만 세무가족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의 요구는 지극히 상식적이다. 변호사가 세무조정 등 업무를 위해 등록을 하려면 적어도 회계와 4,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세법에 대한 최소한의 소양은 갖출 수 있도록 교육과 검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해당 변호사가 이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변호사측은 부디 현실을 직시하여 세무대리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변호사가 기존의 세무사와 같은 실력을 갖춘 후 납세자와 시장의 혼선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관련 입법을 지원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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