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없는 공직생활40년…늦었지만 선배 동료 후배들께 감사”
세무관서장 3번, 중부청 조사 1,2,3국 요직 두루 거쳐 ‘행운’

“납세자 억울함 경청은 기업이 건강해야 나라부강 신념 때문”
예일세무법인 낙점은 ‘맨파워& 현장 찾아가는 서비스’ 돋보여

 

◆ 9급~서기관까지 국세공무원 40년의 기억

“40년 공직생활을 대과없이 마무리한 것은 선배-동료-후배들의 보살핌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늦었지만 모처럼 기회가 주어진 세정일보 기획연재 ‘레전드 & 담’의 지면을 통해 정말 고맙고 감사했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9급으로 시작해 40년을 국세청 조직에 몸담은 김남영 세무사는 예일세무법인에서 인생 2모작 밭갈이를 시작한지 2년 가까이 됐다. 아직도 세무사 업무에 대한 것보다 국세공무원 40년의 추억이 시그널에 투영되며 긴 세월의 아련함은 죽을 때까지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40년 공직생활에서 남다른 길을 걸었고 남다른 열정, 남다른 처신을 보임으로써 프렌들리 한 공무원 상을 짙게 남겼다.

바꿔 말하면 그는 진정성 있는 소통 친절 배려가 몸에 배어있어 주변으로부터 접근성이 좋은 사람으로 평가 받고 있다. 재직시 과장 때나 서장일 때도 후배 직원들은 사석에서 그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그는 40년의 공직생활 중 청년기와 장년기로 나눈다면 청년기는 서울지방국세청, 중년기는 중부지방국세청으로 구분된다. 그의 첫 부임지는 서울청 산하 청량리세무서(1977년4월). 이어 강남세무서→방산세무서(현재 없음)→서대문세무서→동부세무서(현재 없음)→서울국세청 등으로 전전한 것이 20년이다.

국세행정의 짜고 쓴맛을 알 시기 경인청(지금의 중부지방국세청)으로 전보됐다. 중부청 첫 부임지는 동수원세무서. 이어 성남세무서를 거쳐 중부청 조사국으로 발탁된다. 조사국 근무 2년여 만에 사무관으로 승진(2004년)되어 태백지서장에 오른다.

‘뿌린 만큼 거둔다’는 말씀처럼 그는 ‘무한불성(無汗不成-땀을 흘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의 명언을 좋아 한다. 평소 성실함과 배려심의 자세로 일관하다보니 윗사람 아랫사람 할 것 없이 ‘김남영’이란 이름이 알려지면서 같이 일하려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조성됐다. 특히 중부청 조사국 분위기가 압권이었다.

승진이 되면 지방으로 발령이 나는 인사 관례에 따라 잠시 태백지서장으로 내려갔을 뿐, 곧바로 중부청 조사2국 조사팀장으로 호출됐다. 다시 그는 2009년 서기관으로 승진되어 영덕세무서장 1년. 또다시 중부청 조사1국 국제거래조사과장으로 발탁된다. 이어 중부청 조사3국 2과장, 용인세무서장, 중부청 조사3국1과장에 오른다. 2017년 6월 화성세무서장을 마지막으로 공직의 긴 여정을 끝낸다.

깐깐하고 인색하기로 소문난 국세청 인사행정에서 일선 세무관서장 4번(태백지서포함)을, 조사국 1,2,3국 간부 15년의 경력은 찾아보기 힘들다. 힘들다기보다 전무후무한 인사다. 강직하고 성실, 공직자의 자질을 인정받은 당연한 결과라는 게 주변인들의 평가다.

‘조사관으로서의 배려는 때론 오해소지도 있을 법 한데’라는 기자의 질문에 손사래를 친다. “배려에 있어 목적이 분명하면 오해를 불식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그는 스스럼없이 자신은 ‘친기업 조사관’이라고 덧붙인다.

“세무조사를 하다보면 기업입장에서는 억울한 부분이 있게 마련이고, 조사관 입장에서 보면 추징과세가 불가피한 경우가 생긴다. 납세자의 입장을 성실히 듣고 과세관청의 당위성을 이해가되도록 설득하는 것이 조화의 테크닉일 것이다. 칼자루를 쥔 쪽이 부드러워야 한다. 기업이 억울하다는 쟁점에 대해 그렇지 않다는 논리로 이해의 폭을 넓혀 나가도록 최선을 다하다보면 꼬인 실타래는 풀린다”고 했다.

‘주경야독(晝耕夜讀)’,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대학과 대학원은 세무공무원을 하면서 학위를 땄다. 경영학 강의시간에 자원이 빈곤한 우리나라 같은 처지에서는 수출만이 살길이고 수출을 많이 하려면 기업이 잘돼야한고 배웠다. 부국으로 가는 길은 건강한 기업이 많이 생겨야 한다는 것쯤은 모를 사람이 없겠지만, 직업에 충실하다보면 한쪽으로 치우쳐 외눈박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서적 쓰나미 현상’을 의미한다. 정서적 쓰나미는 ‘너는 너, 나는 나’로 변해 서로를 경계하고 미워하고 반기업 문화로 변질돼 종래는 망국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얘기가 빗나가 애국자처럼 말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애국이 별거냐고 반문한다.

국세청의 세무조사 패턴도 많이 좋아졌다. 세수를 늘리기 위한 수단으로 ‘우격다짐의 과세나 쥐어짜기 과세’는 사라진지 오래다. 철저한 검증과 확고한 근거에 의한 과세를 하되 기업의 애로사항 및 자금난 등을 고려해 국세행정이 미칠 수 있는 범위까지 보호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조사반장 및 조사팀장 때도 조사대상 기업이 억울하다고 하소연 하면 진정성 있게 접근해 억울한 부분을 재분석해 기업의 주장이 옳다고 판단되면 최대한 수용하고, 그 반대의 경우 일 때도 오해가 없도록 세심하게 설명해줌으로써 억울함을 해소시켜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동료나 후배 조사관들이 그를 가리켜 ‘기업 프렌들리 조사관’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 같은 별명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15년 조사국에서 근무하면서 세무조사의 잣대를 국고주의에 치우친 적 없이 그야말로 공정한 잣대를 들이 됐다고 술회한다. 조사를 하면서 혹여 생산활동 위축이나, 매출신장에 지장을 주지 않나하는 걱정 때문에 노심초사 자세를 낮춰 최대한 불편을 주지 않으려고 신경을 썼다.

그는 조사를 마치고 추징세액이 결정되기 전 기업의 입장과 억울함 등을 경청하고 오해가 될 만한 부분에 대해서는 납득이 되도록 설명을 곁들인다. 설명을 해도 납득을 못하면 납득할 때까지 보충설명을 곁들여 납세자에게 부과되는 추징세금이 억울하지 않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그래서 재임시절 그가 맡은 세무조사 건은 불복이 거의 없었다고 알려져 있다.

◆명예퇴임 무렵 여러 곳에서 ‘스카우트 제의’…어디로 갈까 ‘고민’

같이 일하자는 제안이 여기저기에서 있었다. 예일세무법인으로 오게 된 것은 임승환 대표세무사와는 친분이 두터운데다 나름대로 판단한 것은 구성원 컬러가 화려한데다 팀 멤버가 골고루 잘 짜여 져 미래성장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남영 대표의 영입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자리를 같이한 임승환 대표가 말을 보탠다.

“정말 모시기 힘들었던 훌륭한 분이었다. 누가 뭐래도 조사 분야에선 살아있는 전설임에는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김 대표를 영입하기위해 소위 ‘삼고초려(三顧草廬)’ 했다”며 “불황기에도 위축 되지 않고 매출을 세무업계 2위로 끌어올린 저력의 힘은 김 대표 같은 분이 계시기에 가능했다”고 밝혔다.

◆ 인생 2모작 농사는 어떻습니까?

이제 2년도 안된 초보라 감히 세무사의 삶에 대해 논평하기는 어렵다.

짧은 기간 동안 느낀 것은 생각보다 세무사를 하기가 어렵고 힘들다. 하지만 나름대로 보람과 성취감도 있다. 여태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삶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물론 40년 조직에서 경험한 것들이 세무사생활에서 접목은 되겠지만, 세무공무원의 입장에서 보는 시각과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재직 시절에는 모든 일을 과세관청의 입장에서 바라보았지만, 세무사의 일을 시작하면서 납세자 입장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납세자들이 정당한 권익을 찾을 수 있도록 조언과 각종서비스 제공을 강화해 나가는데 소홀함이 없도록 더 노력할 각오다.

짧은 기간 납세자들을 위해 보람된 일들을 다소 했지만, 구체적으로 예를 드는 것이 적절하지 않아 간략하게 말씀드린다. 대기업에는 자문 세무사, 법률자문 변호사 등이 많아 별 문제가 없으나, 경영환경이 열악한 중소기업은 취약한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특히 세법지식은 전무인 상태다.

한가지 예를 들면 K중소기업의 경우 세법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어 세무조사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함으로 인해 기업이 존폐의 기로에 처해 있었다. 자문을 의뢰받은 나는 최선을 다해 적극적으로 소명하여 억울한 추징세액을 대폭 줄이는 한편 일시적 납부가 어려운 세금에 대해서는 징수유예 등 마지막 까지 노력을 기울여 그 기업이 정상궤도에 오르는데 일조했다. 이러한 사례는 더 있지만 저 혼자의 보람으로 간직하고 싶다.

▲ 김남영 세무사의 '레전드 인터뷰'가 잡힌 날 예일세무법인 본점 대표인 임승환 세무사가 함께 했다.(우)

◆ 김 대표께서 몸담은 예일세무법인은?

저야 최근에 합류해 그간의 모든 과정을 잘 알지는 못한다. 다만 창립기간에 비해 급성장 한 것은 분명하다.

예일세무법인은 2010년 1월에 설립됐다. 정확히 9년 3개월째다. 6월말 법인으로 아직 결산을 안 해 매출규모는 알 수 없지만 경제 불황속에서도 선전하고 있는 매우 튼튼한 법인인 것으로 알고 있다.

예일세무법인의 매출 구성을 따져보면 기장보다 컨설팅부분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기장보다 컨설팅분야의 수익이 높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전문성이 높다는 의미다.

조직과 구성원을 보면 ‘맨파워’의 강렬함을 실감나게 한다. 나아가 기업의 성공적인 파트너로 발전할 수밖에 없는 강점들을 찾을 수 있다.

현재 예일세무법인은 김창섭-임승환-천영익 대표세무사로 이어지는 트로이카 경영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여기에다 조사업무에 강한 김남영 대표가 가세했고, 지난해 12월말 명예 퇴임한 김승현 대표세무사가 합류했다.

김승현 세무사는 광명세무서장을 끝으로 36년의 국세경력을 가진 ‘특급인재’다. 국립세무대학 1기인 그는 광명세무서장, 동울산세무서장 등 주요보직을 역임했고, 조사국 경험도 풍부한 ‘세무조사통’이다.

예일세무법인은 사업장을 찾아가는 서비스를 표방하고 있다. 구성원에는 지방청장, 서장급은 물론 사무관 출신 세무사와 30대, 40대 청년세무사들이 있지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찾아가는 서비스를 우선, 서비스의 문을 사무실에 두지 않고 기업현장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경영방식이 차별화되어 예일의 성장동력과 미래비전에 불을 지피고 있다.

◆김남영 대표의 인생철학은?

40여년의 세무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 많은 경험을 쌓다. 숱한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보아왔다. 그러다보니 나도 모르게 “항상 내가 조금 더 양보하고 상대방이 만족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며 ‘상대를 위한 배려’가 좌우명이 되다시피 했다.

물론 사람마다 부족함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 부족함을 물질적으로 채우지 않고 사랑으로 채우려고 노력한다.

◆ 자식농사는?

평년작은 한 것 같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모두 대학을 나와 착실히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둘 다 미혼이다. 좋은 짝을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 지식농사는?

변명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공직생활을 성실히 하다 보니 옆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지식농사 역시 자식들 보기 창피하지 않을 정도의 평년작 수준이라고 하고 싶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진학을 포기,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세무공무원 공채시험에 합격해 국세공무원이 됐다. 주경야독 야간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 김남영 세무사 he is?

김 대표세무사의 고향은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이다. 어릴 때(초등학교1학년) 서울로 이사를 했기 때문에 고향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고 했다.

청량중학교, 장충고교, 건국대학, 건국대 행정대학원 졸업. 1977년 청량리세무서 9급 임용, 2004년 사무관 승진-태백지서장, 중부청 조사2국 조사팀장, 2009년 서기관 승진-영덕세무서장, 중부청 조사1국 국제거래조사과장, 중부청 조사3국 2과장, 용인세무서장, 중부청 조사3국 1과장, 화성세무서장(2017년 6월 명예 퇴임).

 

저작권자 © 세정일보 [세정일보] 세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