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동복‧류병하‧최봉순’ 3인방…“퇴직하면 같이하자 도원결의”
최고의 광교세무법인 창업 1등 공신, 끝내 약속 지킨 의리男

‘화성시 깡촌’ 남양읍에 세무법인 첫 개업…미래 혜안 돋보여
“언젠가 개발호재 온다 열심히 공부한 양도세분야 최근 적중”

 

‘박하사탕’ 같은 사람을 만났다. 최봉순 세무사다. 그가 우리나라 최고로 불리는 세무법인 ‘광교’설립자라는 사실을 지인 몇 분을 빼고는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시피하다. 과묵하다 못해 석등(石燈)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해도 거부감이 없을 정도로 내공이 깊다.

그가 오늘의 광교세무법인이 있기까지 수훈갑인데도 알려지지 않은 것은 평소 자신을 낮추고 남을 배려하는 지고지순한 성품 탓인지도 모른다.

◆ ‘송동복‧류병하‧최봉순’ 3인방이 광교세무법인 창립

광교세무법인 설립을 얘기하면 밤을 새도 모자란다. 벌써 20년 전 까마득한 세월이 흘렸지만 의기투합이 맞아 떨어지는 법인설립의 도원결의(?)였기에 기억이 생생하다.

“퇴직하면 같이 세무법인을 만들자”는 약속이었다. 한날한시에 퇴직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지키기는 어려웠지만 그 결의는 끝내 지켜졌다.

20여 년 전 동수원세무서 법인세과 근무시절. 일선세무서 마다 ‘반원, 반장제’가 있었다. 당시 그는 반원이었다. 운 좋게도 그는 사람 좋기로 정평이 나 있는 송동복 반장, 류병하 반장을 번갈아가며 반장으로 모셨다. 절친 ‘3인방’은 나이 차이가 있으나 사석에서는 친구나 다름없이 허물없이 지냈다.

그러다보니 사석에서 퇴직 이후 제2의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이며, 버킷리스트는 어떻게 마무리 해야 잘 살았다는 말을 듣게 될까? 등에 대해서도 얘기가 오고갔다.

그는 “‘3인방’ 중 제가 먼저 퇴직했다. 1998년 세무사시험에 합격하면서 17년의 국세공무원 생활을 마감했다. 수원세무서 법인세과가 마지막 고별장이 됐다. 다음해 1월 수원에서 개인 세무사사무실을 열었다. 1년 뒤에 송동복 세무사와 류병하 세무사가 퇴임 후 법인설립을 제의했다. 1999년 12월에 ‘광교세무법인’을 창립했다. 동수원세무서 법인세과에서의 도원결의가 지켜진 셈이다”라고 회고했다.

의리로 맺어진 광교세무법인은 해를 거듭할수록 도약의 발판을 굳게 다져 나갔다. 세무사 포진 및 직원규모, 매출규모 면에서 최고의 세무전문 싱크탱크로 거듭나고 있다.

◆ 광교세무법인 화성지점은?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로 671 더굿메이트 13층에 위치해 있다. ‘근무환경이 좋으면 업무능률이 오른다’는 말처럼 세무법인 사무실을 남양읍 구도심에서 얼마 전 이사를 했다.

화성시청 길 건너편 신시가지에 신축한 빌딩, 100여평 남짓한 사무실 분위기는 ‘굿싱크’ 그 자체다. 최봉순 대표세무사의 집무실 역시 고객접견실 및 상담실 등을 갖추어 세무전문가로서의 위상을 제고하고 있다.

‘깡촌이나 다름없는 시골에 세무법인 개업은 무모한 도전이었을 텐데?’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웃으며 “도전이라는 자체가 무모하고 때로는 엉뚱한 짓이기도 하죠”라며 말을 잇는다.

화성은 크게 동부권 도심과 서부권 미개발 농촌지역(남양읍)으로 구분된다. 2001년 11월 제가 이곳에 세무사사무실 문을 열 시점에는 세무사사무실이 전무했다. ‘개업1호 세무사’로 기록돼 있다. 주변 지인들 및 국세공무원 선후배들은 무모한 짓이라며 개업을 만류했다.

그는 화성시 남양읍 깡촌에 광교세무법인 깃발을 꽂은 것은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미래가치에 투자해야한다는 신념이 강했기 때문이다. 황무지 가시밭길 개척의 진척은 느리고 힘든 세월이 었다. 어느새 19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는 화성을 무궁무진 발전할 수 있는 신천지로 보았다. 그의 생각은 빗나가지 않았다. 처음 시작 할 때 수임건수 제로(0), 전화 받는 여직원 1명으로 문을 열었다. 피나는 노력으로 개업 3년 만에 안정적인 사무실 운영을 도모했다.

▶강산이 두 번 변할 정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어떤가?

사무장 1명에 여직원 10명을 두고 있다. 고객도 법인-개인 비율이 6대4로 법인이 많은 편이다. 때문에 수익이 안정적이다. 최근 이곳으로 이사를 올 때도 법인사무실을 분양받았기 때문에 임대로 지출비용도 절감되어 직원들 복지 및 처우개선을 우선하고 있다. 돌이켜 생각하면 ‘기적과 같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내 자랑 같지만 나름대로의 선견지명이 있지 않나요(웃음). 앞서 말했듯이 화성시 남양읍 일대 지역은 분명 개발호재가 있을 것으로 믿었다.

따라서 세무사로서의 공부도 양도소득세 및 상속증여세 등 재산제세분야를 많이 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개발에 따른 토지보상이 많아지자 양도소득세 문의 및 상담이 많았다. 특히 재산제세 분야에서 실력 있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고객이 늘어나면서 신설 법인들의 세무 및 재정컨설팅이 몰려들었다. 시쳇말로 깡촌에서 용이 된 세무사로 지존의 존재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

“광교 화성지점의 도약이 어디 나 혼자 힘으로 되겠는가. 모든 임직원들이 내일같이 도와주었기에 강건한 법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개업초창기부터 나를 도와준 이향미 이사와 김도연 팀장 같은 분이 있었기에 오늘의 광교 화성지점이 선망의 롤 모델로 거듭나고 있다.”

◆ 세무사를 하면서 기억에 오래 머무는 일들은?

도농복합도시인 이곳은 각종 개발 사업으로 인해 토지수용이 많았고 따라서 부동산제세에 따른 민원도 수반됐다.

부동산 매매시점에서는 자경농지 8년 경작증명만 있으면 양도소득세가 면제된다. 문제는 매입자가 개발지연으로 인해 제때 소유권이전이 지연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럴 경우 소유권 이전 지연으로 인해 부동산 시가 변동에 따른 문제가 생긴다. 과세당국은 매매당시 가격이나 공시지가를 표준가격으로 인정하지 않고 현 시가 기준으로 평가해 매매가격을 추산해 과세표준으로 삼는다. 실제 매매가격에 따른 과세표준액보다 훨씬 많은 과세표준액이 결정됨에 따라 양도소득세가 추징 과세된다.

추징당한 납세자는 억울하다며 세무사사무실을 찾게 된다. 이러한 불복사건은 비일비재했다. 과세당국에 이의신청으로는 해결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입증 자료를 총동원해 조세심판원을 노크해 감면 인용처분을 받았다. 환급신청도 대리해 납세자들의 권익을 챙겨 주었지만, 아쉬움이 남고 뒷골이 뻐근한 기분은 과세당국의 태도다.

탁상행정의 구태의연한 태도가 못마땅하다. 과세당국의 실무자도 도시개발 지연으로 인해 불거진 어쩔 수 없는 ‘파생 과세’라는 것을 알면서도 땅값 시세차익에 대한 과세를 하지 않으면 감사에 지적받게 된다는 것이다. 행정편의 주의적 사고로 인해 납세자는 선의의 피해를 입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 화성지역세무사회 ‘최장수’ 회장

그는 2013년 4월 화성세무서 개청과 함께 초대회장에 올랐다. 현재 화성지역세무사회 회원은 100여명이 되지만 개청 당시는 40여명에 불과했다. 회장에 오른 이후 회원 친목도모와 화합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유임 또 유임 초대, 2대, 3대에 이르기까지 6년간 지역세무사회장을 지냈다. 부가세신고 법인세신고에 따른 세무서 간담회 주선 및 회원들의 애경사 일을 6년간 챙기다보니 100여명의 세무사 이름 암기는 물론 세무사사무실 운영 실상 및 가족관계까지 꿰뚫게 됨에 따라 회원 간에 친분이 쌓이면서 회장유임이 길어졌다. 사실 초창기에는 회장 일을 맡을 사람이 없어 유임이 길어진 면도 없지 않았다.

그는 “지역세무사회장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딱히 드러내놓고 내세울 것은 없다. 하지만 회원 간 서로 믿고 회를 위한 협동심은 매우 높다. 그리고 면적이 너무 넓어 세무서 주관의 각종간담회는 모두 참석하지만 평상시에는 3개 권역별 소모임을 갖도록 해 시간 및 교통비 비용을 줄여 주는 등 회원배려에 신경을 썼다”면서 “지역회 장점은 단합과 회원 애경사 참여율이 매우 높다. 개인적으로는 화성시 기업인모임과 로터리클럽 회원으로 몸담아 불우이웃돕기에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다”고 했다.

◆ 최봉순 세무사의 유년시절

최봉순 세무사의 고향은 강원도 정선이다. 광부 아버지를 따라 탄광촌으로 유명했던 강원도 태백시 황지로 이사를 했고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마쳤다. 뼈아픈 기억은 가난이다. 삼시세끼조차 잇지 못하고 끼니거르기를 밥 먹듯 했다.

대학을 졸업, 사법고시에 합격해 판-검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나 학업은 초등학교에서 끝났다. 그는 어린나이인 15살 때 직업전선에 뛰어들었다. 그 당시는 직업이며 직장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굶지 않고 하루 세끼 배불리 먹여주는 곳이 좋은 직장이었다.

15살 때 친구의 소개로 경기도 성남시 소재 스프링제조공장에 취직을 했다. 이곳에서 2년여 일하다 서울 고속터미널 주유소로 직장을 옮겼다. 주유소에 다니며 공부를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경야독 2년 동안 독학으로 향학에 증진했다. 1975년쯤으로 기억된다. 친구가 일하고 있는 전남 완도군 김양식장에서도 1년여 일하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중-고 검정고시를 봤다. 모두 합격했다. 다시 4년 뒤인 1979년 4월 대입검증고시 시험에도 합격했다.

국세공무원의 징검다리도 대학검정고시합격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국세공무원 17년의 기억

1981년 김수학 국세청장 시대였다. 국세공무원 인원확충에 따른 공채시험에 합격해 영월세무서 간세과가 첫 부임지다. 이어 춘천세무서 법인세과, 안양세무서 부가가치세과 등에서 세무행정을 익혔다. 성실히 일하다보니 동료와 선배들로부터 실력과 능력을 인정을 받았다.

3개 일선세무서를 거쳐 경인지방국세청(현 중부청) 특별조사국으로 전보되어 이곳에서 5년동안 근무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자신이 세무공무원으로서 성숙해 져가고 있음을 가름할 수 있었다. 9급에서 8급 승진도 되었다. 1계급 승진에 10년6개월이라는 시간이 세월이 흘렸다. 보편적으로는 13년이 걸렸는데 자신은 그래도 근무성적이 우수해 승진이 빠른 편이었다.

2년제 세무대학 출신은 졸업과 동시에 8급 국세공무원이 되는 시절이었다. 상대적 비교에서 9급 공채출신들의 정신적 피해의식은 컬 수밖에 없었고 근무의욕에서도 절망과 좌절감은 아주 높았다. 그래서 9급 출신들의 퇴직률이 높았다.

그는 8급 승진과 동시에 동수원세무서 법인세과로 전보되었고 2년 뒤 수원세무서 법인세과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저곳 17년을 옮겨 다녔지만 더 이상 세무공무원으로서 비전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여기서 세무사의 길을 선택한다. 이 때가 1998년으로 기억한다. 세무사시험에 합격하자마자 퇴직했다. 다음해인 1999년 1월에 수원에서 개인 세무사사무실을 냈다.

그는 개인세무사 사무실을 11개월 만에 접었다. 동수원세무서 재직시 반장과 반원(송동복-류병하 반장)으로 맺어진 인연에다 퇴직하면 법인사무실 같이하자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진짜 박하사탕 같은 의리를 가진 ‘신의남(信義男)’이다. 그해 12월 이들 3인방이 광교세무법인을 탄생시켰다. 그는 2년 뒤인 2001년 11월에 분가해 깡촌 화성에다 광교화성지점을 개업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 꼭 남기고 싶은 것

“아직은 주어진 일에 충실하며, 억울한 납세자들의 권익보호에 최선을 다했으면 한다. 법인설립 19년이 되었지만 광교세무법인이 대형법인으로 내세우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내년이면 20주년을 맞게 된다. 의미 있는 20주년을 기대해 본다. 기회가 되면 화성시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

앞서 언급했듯 화성시 면적은 서울의 1.4배 규모다. 특징은 동서로 구분되는데 동쪽은 인구 포화상태인데 반해 서쪽(바다를 끼고 있는 지역)은 개발이 안 되고 있다가 복선전철(홍성~여의도 간) 공사가 시작되면서 개발바람이 거세다. 상공인 단체인 화성시상공회의소 모임에 참여하며 소상공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유년시절을 생각하며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진학을 못하는 청소년을 위한 장학재단을 설립하는 게 바람이다“라고 했다.

◆ 최봉순 세무사는 누구?

굴지의 세무법인 ‘광교’설립의 1등공신이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원사무실을 포기하고 화성시에서도 깡촌으로 알려진 남양동에 세무법인사무실을 차릴 정도로 미래를 보는 혜안이 넓다. 옛 남양동은 남양읍으로 승격되었지만 법인사무실 개소 당시에는 남양동이었다. 세무사사무실이 전무한 상태인 이곳에 광교세무법인이 최초로 입성한 셈이다. 이 지역에서 지존(至尊)으로 존경받는 것도 개척정신과 헌신적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학을 못나온 만큼 주경야독 배움에 열중했다. ▷아주대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졸업 ▷경희사이버대학 세무회계학과 졸업 ▷명지대학 부동산경매상담사 과정수료 ▷서울시립대 조세쟁송과정 수료 ▷명지대 증권보험대학원을 수료했다.

그는 또 다양하고 왕성한 사회활동으로 보폭을 넓혀나가고 있다. ▷화성지역세무사회장 6년(전) ▷경기도의회 고문세무사(현) ▷화성시 기업지원협의회 자문위원장현) ▷중부지방국세청 재산평가심의위원(전) ▷화성시 과세적부 심사위원(전) ▷수원세무서 국세심사위원(전) ▷중부지방세무사회 이사(현) ▷경기카네기 CEO클럽 화성-오산 총동문회 초대사무총장 ▷현 광교세무법인 대표세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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