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법적으로 ‘독도는 한국 땅’ 확신 부족에 아쉬움

포츠담 선언에서 독도에 관한 잘못된 번역 바로 잡아야”

▲ 정태상 인하대 연구교수
(고조선연구소)

♦ 일본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한 도공의 후예

박무덕(朴茂德)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의 후예이다. 1597년 화의교섭 결렬로 재침략한 왜군은 7월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을 칠천량해전에서 전멸시키고, 수륙양면으로 남해안과 호남지방을 유린했다. 8월에는 남원성을 포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는데, 그때 납치된 남원지방의 도공 43명은 일본 큐슈 최남단, 지금의 가고시마현 나에시로가와(苗代川) 마을에 정착했다.

당시 사츠마번주(薩摩藩主)는 조선인 도공들을 철저히 격리시키고 도자기 만드는 일에 집중하게 했다. 조선의 풍속을 지키고 조선이름을 쓰게 하고, 다른 마을 사람과의 자유로운 교류를 금지시켰다. 그로 인해 이 마을에는 특이하게 조선의 풍습이 수백년간 이어졌다. 심지어 옥산궁(玉山宮), 일본어로 다마야마 진자(玉山神社)라는 단군을 모시는 사당까지 지었다. 금년4월 소속대학의 연구소에서 심수관요(窯) 전시관과 그리 멀지 않은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을 다녀왔는데, 일정상 도공마을과 단군사당을 가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 <그림 1>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 기념관과 송덕비

명치유신 이후 도공마을의 전통을 지켜나가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도자기를 상품화하여 재력이 있었던 박무덕의 부친 박수승(朴壽勝)은 박무덕이 5살 때 도고(東鄕)라는 사족(士族)의 성을 사서 박씨에서 도고(東鄕)씨로 성을 바꾸었다. 이름 무덕(茂德)은 변함이 없었다.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는 독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부친의 기대와는 달리 동경대학 법대 대신에 독문학과에 입학하였다. 어떻게 해서 외교관의 길을 택했는지 분명하지는 않으나, 문학도로서의 자질과 재능에 회의를 느끼던 중 살던 하숙집에 불이 나서 귀중한 자료들이 전부 불타버린 것도 진로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외무고시 합격으로 외교관의 길로 들어선 후 고향 도공마을을 찾아 옥산궁에 참배하였다. 단군사당에 참배한 것이다. 외교관으로서 실력을 인정받아 독일대사로 근무하던 중 나치즘에 반대하고 대립하여 소련대사로 경질될 정도로 소신을 지킨 평화주의자였다.

도고(東鄕)는 외무대신을 2번 역임했는데 1941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킬 때와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할 때이다. 패전 후 도쿄재판(극동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20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 사망했다. 전범재판과정에서 도고(東鄕)는 심문에 당당하게 응하면서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라면 타인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조선인이라서..’라는 비난도 감수해야 했다.

도고(東鄕)의 소신과 능력이 빛을 발한 것은 태평양전쟁 종전 과정에서이다. 1945년 8월, 당시 일본은 히로시마에 이어 나가사키에 원폭을 당하고, 소련이 뒤늦게 참전한 상황 하에서 사실상 무조건항복 요구인 포츠담선언의 수락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패전이 명백한 상황 하에서도 일본군부는 광적으로 전쟁계속을 주장했는데, 도고(東鄕)는 구테타와 암살테러 위협을 받으면서도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냈다. 만약 항복이 늦어졌더라면 일본전체가 불바다가 되고, 한국이 아닌 일본이 분할 통치되거나 아예 일본국이 지구상에서 소멸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임진왜란 때 납치된 도공의 후예가 결정적인 순간에 일본을 구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도고 시게노리에 대해 일본을 미국에 팔아넘긴 조선인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도 없지 않다.(참조: 도고 시게히코 감수, 정수웅 지음, 『일본역사를 바꾼 조선인』, 1999년)

♦ 잘못 번역된 포츠담선언과 독도문제

그러면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와 독도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독도가 한국땅이라는 중요한 국제법적인 판단 근거가 포츠담선언인데, 포츠담선언의 영토에 관한 조항의 번역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도고(東鄕) 외무대신은 포츠담선언에 대해 법률적 관점에서 엄밀한 검토를 할 것을 명했는데, 일본외무성에서 포츠담선언의 번역과 검토를 했던 사람은 조약국 제1과장 시모다 다케소(下田武三)였다. 포츠담선언 제8항의 원문 및 일본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8. The terms of the Cairo Declaration shall be carried out and Japanese sovereignty shall be limited to the islands of Honshu, Hokkaido, Kyushu, Shikoku and such minor islands as we determine.

8. 카이로선언의 조항은 이행되어야 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本州)·홋카이도(北海道)·큐슈(九州)·시코쿠(四國)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될 것이다.

그런데 시모다는 위에서 밑줄친 ‘terms’를 조항으로 번역했는데, ‘terms’ 의 통상의 의미는 조항이 아니라 조건이다. 조항들로 번역할 경우에는 카이로선언에서의 ‘연합국의 영토불확장원칙’ 즉, ‘일본땅은 빼앗지 않는다는 방침’도 포츠담선언에서 수용되어 지켜져야 한다. 이렇게 번역하는 경우에는 제8항의 앞구절에는 일본땅은 빼앗지 않는다는 방침, 뒷구절에는 연합국에서 임의로 일본의 영토를 결정할 수 있음을 규정한 것이 되어 앞뒤가 서로 모순된다. 많은 국내학자들도 포츠담선언을 위와 같이 번역하여 ‘포츠담선언은 연합국의 영토불확장 원칙을 천명한 것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terms’ 의 통상의 의미는 ‘조건’이다. 다시 말해 ‘연합국이 일본에게 요구한 조건’만 포츠담선언에 수용된다. 이렇게 번역하면 독도가 우리땅인 근거가 좀 더 단순・명쾌해진다. 즉, 카이로선언에서 일본이 빼앗은 영토는 모두 돌려주게 한 조건(terms)은 포츠담선언에서도 그대로 유효하고, 독도는 빼앗은 영토에 해당하므로 일본은 독도를 돌려줘야 할 의무가 포츠담선언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포츠담선언 제8항의 해석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교수의 2013년 논문을 보고 비로소 번역이 의도적으로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일본 외무성에 의해 정치적 의도에서 잘못된 번역이 우리학계에서 아무런 의심도 없이 수십 년간 통용되어 왔으니 국내학계의 수준을 한번 더 가늠할 수 있게 한다. 하긴 필자도 2012년에 쓴 책에서는 ‘모든조항들’(terms)로 번역했으니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니다.

♦ 곳곳에 여전히 존재하는 한일관계의 흔적과 상처

1945년 9월 2일 동경만에 정박한 전함 미주리호에서 일본과 미국 등 9개 연합국간에 역사적인 항복문서(Japanese Instrument of Surrender) 조인식이 있었다. 일본대표는 목발을 짚고 전함 미주리에 오른 시게미츠 마모르(重光葵)이다. 도고 시게노리의 뒤를 이어 외무대신이 된 시게미츠는 그 이전 1932년 중국 공사(公使)로 있을 때 윤봉길(尹奉吉)의사의 상하이 폭탄사건으로 한쪽 다리를 잃었다. 한일관계의 흔적과 상처는 곳곳에 남아있었다.

▲ <그림 2> 항복문서 조인식에 참석한
시게미츠 마모르(重光葵) 등 일본대표단

일본이 폭력과 탐욕(violence and greed)에 의해 빼앗은 땅에서 축출되어야 한다는 카이로선언의 규정은 포츠담선언에 수용되고, 포츠담선언을 이행할 것을 항복문서에 서명했으므로, 독도는 빼앗은 땅으로서 돌려주어야 할 국제법적인 의무가 항복문서 서명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의무는 즉각 이행되지 않고, 3년 후인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이행되었다.

그 이전에 일본을 점령통치한 연합국최고사령부는 훈령(SCAPIN) 제677호(1946년 1월 29일)에 의해 독도를 통치권적・행정적으로 일본으로부터 분리하였으며, 훈령(SCAPIN) 제1033호(1946년 6월 22일)에 의해 독도 12마일 이내에 일본선박의 접근을 금지했다. 또한 연합국최고사령부는 관할지역도(SCAP Administrative Areas: Japan and South Korea)를 발간하여 간접통치 지역인 일본과 직접통치(미군정) 지역인 한국(South Korea)을 구분하면서, 울릉도와 독도, 제주도는 한국에 소속시켰다. 독도는 통치권적・행정적 및 어선 조업의 양면에서 일본으로부터 분리되어 미군정의 관할하에 있다가, 그대로 대한민국에 인계된 것이다.

그런데, 일본을 연합국의 통치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한 평화조약 체결과정에서 독도문제는 다시 불거져 나왔다. 우여곡절 끝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인된 최종 평화조약에는 독도에 대한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 독도는 해석상 1948년 8월 15일 이미 일단락된 것이고, 설사 샌프란시스코조약에 의하더라도 독도는 한국땅으로 해석되므로 문제가 없다.

♦ 샌프란시스코조약 비준과정에서 일본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독도=한국땅’ 지도

그러나, 국내에서도 마치 샌프란시스코조약이 우리에게 불리한 것처럼 해석하는 경우도 없지 않은데, 2014년 샌프란시스코조약 직전에 일본정부에 의해 제작되고 조약비준시 조약과 함께 국회에 제출된 지도 「일본영역참고도」에 독도가 한국땅으로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 새로이 밝혀졌다. 필자가 박사학위논문으로 국내에서 처음으로 공개한 것이다.
 

▲ <그림 3> 「SCAP관할지역도」(1946년 2월, 좌)와 「일본영역참고도」(1951년 8월, 우)의 비교

독도문제를 제대로 연구하는 학자들도 어떻게 이런 지도를 당시에 일본정부에서 만들었을까 의아해 할 정도였다. 샌프란시스코조약에 대한 연구를 원점에서 다시 해 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951년 8월에 일본이 스스로 독도를 한국땅으로 그린 지도를 제작하였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거꾸로 추적해보니, 우선 1951년 4월 7일자 미국초안에 ‘독도는 일본땅’으로 되어 있었다는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발단은 같은 날짜 영국초안에 독도가 한국땅으로 되어있었는데 A교수는 그 초안에 ‘독도는 일본땅’으로 되어 있다고 거꾸로 번역하고 B교수는 그 초안을 미국초안으로 둔갑시킨 것이었다. 또한 당시에 ‘미국이 독도를 일본에 주려고 했다는 주장도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밝힐 수 있었다. 그 주장을 한 당사자가 그런 사실이 없다고 신문지상에서 잡아떼고 있으니, 이는 곧 그 주장이 근거없다는 것을 자인한 거나 마찬가지다.

「일본영역참고도」에서 역으로 추적해 본 결론은 샌프란시스코조약 당시에 일본은 독도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이 샌프란시스코조약 때 독도를 포기했다고 주장해도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어쩌면 일본우익의 침투, 포섭, 세뇌공작이 주효하여 잘못된 인식이 고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2014년 이 지도 공개후 침묵을 지킨 국내학계와는 대조적으로 일본측의 반응은 한마디로 뜨거웠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신문기사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필자에 대한 조롱, 협박성 댓글이 상당히 많아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거짓말을 숨쉬듯이 한다’, ‘죽어라’ ‘한자 뜻도 모르는 놈’ 등등 대충 모아보니 A4 용지로 50페이지나 됐다. 사실관계는 정확하게 모르겠으나, 자칭 일본의 군관계 연구기관에서 그 지도의 입수경로를 묻는 메일을 간접적으로 보내오기도 했다.

최근에는 국내 일본계 학자들 중에서 「일본영역참고도」에 관해 다른 주장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중 2가지만 반박하자면,

1951년 10월 「일본영역참고도」를 ‘중의원 예산 소위원회’ 설명회에 나누어 주었다는 주장이 있는데,(호사카 유지) 「일본영역참고도」는 평화조약 비준 동의를 위한 평화조약 특위에 제출된 것이다. ‘중의원 예산 소위원회’ 설명회와 ‘평화조약 특위’는 그 격이 다르다. 1951년 10월 22일 일본 중의원 평화조약특위 회의록에 의하면 야마모토(山本) 위원은 ‘이번에 우리가 참고자료로 받은 「일본영역참고도」’, ‘이런 중요한 위원회에 배부된 지도’ 등의 표현으로, 「일본영역참고도」를 평화조약특위에서 일본 정부로부터 제출받았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둘째 「일본영역참고도」는 샌프란시스코조약 발효 이전의 일본영역을 그린 지도라는 주장이 있는데,(박병섭) 샌프란시스코조약은 일본의 주권을 회복하고 일본의 영토를 새로이 정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여 일본과 연합국 48개국간에 체결된 조약이다. 그 새로이 영토를 정하는 조약을 비준하는데 구 영토를 그린 지도를 제출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와 같이 「일본영역참고도」를 중위원 예산소위원회 설명회에 나누어 주었다든가 「일본영역참고도」는 샌프란시스코조약 이전의 지도를 나타낸 것이라든가 하는 등의 국내학자 주장은 설득력이 약하다. 오히려 「일본영역참고도」로부터 시기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이전 우리에게 불리한 종래의 주장들이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 새로이 밝혀지고 있는 실정이다.
 

▲ <그림 4> 「일본영역참고도」(1951년 8월, 좌)와 「일본영역도」(1952년 5월, 우)의 비교. (빨간색 반원은 필자 그림)

대일평화조약에 의해 독도가 일본땅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대일평화조약 발효 1개월 후에 일본의 주요일간지 신문사가 발간한 책자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샌프란시스코조약 발효직후인 1952년 5월 마이니치(每日)신문사는 『대일평화조약』이라는 책자를 편집・출간하면서 그 안표지에 <그림 4>와 같은 「일본영역도」를 게재했다.

국제법적인 연구는 단순화시켜 놓고 보면 결코 어렵지 않은데도 쉬운 내용을 어렵게 설명하여 혼란시키는 경향이 없지 않다. 일본측에서는 마치 샌프란시스코조약에 의해서 독도가 일본땅이 된 것처럼 주장한다. 역설적으로, 샌프란시스코조약에 의해 독도가 일본땅이 된 것이라면, 어떻게 해서 동 조약 비준 과정에서 독도를 한국령으로 그린 지도(「일본영역참고도」)를 일본국회에 부속지도로 제출했겠는가? 어떻게 해서, 조약 발효직후에도 일본 유력일간신문사에서 발간한 조약 해설책자의 표지에 독도를 한국령으로 그린 지도(「일본영역도」)가 실렸겠는가?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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