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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상 칼럼] 대일외교,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이 되풀이되는 듯

정태상 교수l승인2019.08.13 12: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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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일본 교과서에 실린 사료를 연구한 결과 '코미디 같은' 억지 주장

‘소곡이병위 제출 죽도지회도’는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님을 밝힌 지도
 메이지 10년 태정관지령에서 ‘독도는 조선땅’ 한번더 확인, 공시


 『태정관지령』 ‘일본해내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영토 외로 정함(日本海內竹島外一島ヲ版圖外ト定ム)’
 

▲ 정태상 인하대 연구교수
(고조선연구소)

메이지(明治)시대 초기 일본의 주요 공문서철이라 할 수 있는 『태정류전』에 기록된 24면에 달하는 공문서의 제목이다. 통상 『태정관지령』이라 한다.
 
1877년 메이지(明治) 10년 3월 29일 당시 메이지(明治)정부 최고 국가기관인 태정관은 원록 5년(1692년) 안용복 사건 이래 에도(江戶)막부와 조선간의 외교교섭에 의해 두 섬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 땅으로 확인되었음을 한 번 더 공식 확인하고 일본 시마네현(島根県)의 지적(地籍)에 올려서는 안 된다는 지령을 내려 보냈다.

그래서 『태정관지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태정관지령』은 1987년 교토대학 교수의 논문에 의해 공개되었는데 독도에 관한 역사적인 문제에서 이보다 더 결정적인 자료는 없다. 일본쪽에서는 아킬레스건, 우리쪽에서는 핵펀치라고도 할 수 있다. 아마 샌프란시스코조약 이전에 『태정관지령』이 공개됐다면, 독도는 샌프란시스코조약에서 한국땅으로 분명하게 명시됐을 것이다.

일본정부는 지금도 『태정관지령』을 은폐시키면서, 한편으로는 『태정관지령』에 나오는 섬은 독도가 아니라 두 개의 울릉도라고 잡아떼고 있다. 메이지(明治)유신의 대혁명을 달성했다고 하는 메이지(明治) 정부가 24면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근거 공문서를 가지고 판단한 결과가, 울릉도가 두 개인 것으로 잘못 알고 일본땅이 아니라고 했다는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억지를 넘어 코미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교과서에서도 코미디 같은 억지 주장

최근에 코미디 꺼리를 또 하나 더 찾았다. 일본 교과서를 보니 에도(江戶)시대부터 일본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확립했다고 주장하면서, 「소곡이병위 제출 죽도지회도」라는 지도를 교과서에 버젓이 실어 놓고 있다. 그런데 이 「소곡이병위 제출 죽도지회도」는 독도가 일본땅이라는 것을 확인한 지도가 아니고, 독도가 일본땅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데 사용한 지도이다.
 

▲ <그림 1> 일본 교과서에 실려 있는 「소곡이병위 제출 죽도지회도」(제국서원, 『사회과 중학생의 역사』, 평성28년(2016년) 1월 20일 발간, p247) “竹島(다케시마,독도), 17세기 중반(에도시대 초기)부터 일본은 영유권 확립”

1693년 울릉도에서 조업 중이던 안용복과 박어둔이 납치되자 울릉도를 둘러싼 영유권 분쟁이 양국간에 시작되었다. 3년이 지나도 양국의 주장이 평행선을 달리자, 일본 에도막부는 일본어부를 관할하는 돗토리번(鳥取藩)에 조회했다. 울릉도는 언제부터 일본땅이었는지, 울릉도 말고 또 다른 섬도 있는지에 대해서 묻자 뜻밖의 회답을 얻었다. 울릉도는 돗토리번 땅이 아니고,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섬 독도 또한 돗토리번의 땅이 아니라는 답변이었다. 울릉도와 그 옆에 있는 독도 둘 다 모두 일본땅이 아니라는 것을 공식 확인하고는 일본어부의 울릉도(독도 포함) 도해 금지령을 내렸다. 1696년 1월의 일이다.

그때 에도막부의 질문에 대해 대답한 인물이 돗토리번의 에도연락관 고타니 이헤에(小谷伊兵衛)이고, 그때 제출한 지도가 바로 「소곡이병위 제출 죽도지회도」이다. 그러니까, 「소곡이병위 제출 죽도지회도」는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에도막부에서 공식적으로 확인할 때 쓴 지도이다.

그 지도를 지금의 일본 중학교 교과서에서는 일본이 에도시대부터 영유권을 확보한 근거 자료라고 실어놓고 있으니 소가 웃을 일이 아닌가.

이런 식의 터무니없는 거짓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일본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일본정부에서 부터 이렇게 터무니없이 거짓된 주장을 하고 있는 줄을 알고 있는 우리 식자층은 과연 얼마나 될지, 생각하면 안타까울 뿐이다.
 

▲ <그림 2> 1696년 안용복 일행 11명이 달고 간 ‘朝鬱兩島監稅將’ 깃발과 직명
   ('인번지'(1795년), 청색 글자는 필자 씀)

자칭 울릉도 독도 감세장(監稅將) 안용복

그런데 1696년 1월의 일본어부 울릉도 도해 금지령은 즉시 조선에 통보되지 않고 지체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그해 1696년 5월 조선인 11명이 일본 오키섬을 거쳐 돗토리번에 들이닥쳤다. ‘조울양도 감세장’이라는 깃발을 달고 속인 6명과 승려 5명 도합 11명이었다. 감세장은 세금을 감시하는 장수라는 뜻인데 안용복은 귀국후 심문에서 이 직위는 가칭(假稱)했다는 것을 자인했다.

일행 11명의 리더는 자칭 삼품당상 안용복, 금오승장 뇌헌은 승려들을 이끌었다. ‘조울 양도’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돗토리번에서 물으니 울릉도와 독도라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처음에는 외교사절로 대우 받다가 나중에는 섬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어떻게 보면 울릉도 도해 금지령이 내린 뒤에 갔으니까 뒷북 친 결과가 됐다고도 할 수 있지만, 오히려 그 반대이다. 11명의 다소 엉뚱스러운 것 같은 행적은 일본과 조선 양측에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이라고 주장한 안용복 이야기는 야사는 물론이고 정사인 『숙종실록』에도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독도에 관한 기록이 남게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그들이 한 행위는 결코 뒷북 친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1696년 1월에 일본어부 울릉도 도해금지령이 내려졌지만 조선에 통보되지 않고 지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도막부는 대마도에 명을 내려 일본어부의 울릉도 도해를 금지했음을 속히 조선에 통보하도록 했다.

일본에서 독도영유권 주장을 주도한 금오승장 뇌헌

2005년 일본 시마네현 오키섬의 무라카미가(村上家) 종갓집에서 안용복 일행 11명의 행적을 알 수 있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서를 하나 공개했다. 일본에 불리할 것 같아서 공개하지 않을까도 생각했지만 한일우호를 위에 공개한다고 하였다. 『원록각서』로 약칭되고 있는 이 문서 표지에는 '원록9 병자년 조선주 착안 1귄지 각서'라고 쓰여 있었다.
 

▲ 그림 3> 흥국사 대웅전(1690년) 불벽에 그려진 화상과 ‘시주뇌헌비구’ 명패(좌), 흥국사중수사적비(1703년, 우)

『원록각서』에서 밝혀진 중요한 사실 중의 하나는 안용복과 같이 일본에 간 승려 5명의 소속이 흥국사라는 사실이다. 『숙종실록』에는 승려 5명이 순천승이라고만 되어 있는데, 이 『원록각서』에 기록된 흥국사와 연계시키면 당시 순천부 관할하에 있었던 여수 흥국사의 승려 5명이 안용복과 같이 흥국사의 배를 타고 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내륙에 있지만, 여수 흥국사는 전라 좌수영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은 중앙의 승병과는 별도로 수군승병을 운용했다. 의승수군으로 불린 이들은 후방지원이 아니라 오히려 돌격대의 역할을 수행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송광사 등 다른 사찰의 승병은 점차 폐지됐지만, 여수 흥국사에는 갑오경장 때까지 승병 300명이 계속 주둔했다.

일본에서 금오승장이라고 칭한 뇌헌의 역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703년에 세운 흥국사 중수 사적비에는 '판사 뇌헌'이라고 새겨져 있으며, 1690년에 중창한 흥국사의 대웅전 벽에는 '시주 뇌헌 비구'라는 글자와 함께 뇌헌의 인물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안용복을 영웅화하는 과정에서 야사에서는 뇌헌이 안용복의 꼬임에 넘어간 장사치 중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뇌헌은 일본에 가서,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 주장으로 보이는 소장(訴狀) 작성을 주도했다. 『승정원일기』에도 뇌헌은 이인성의 5촌 당숙으로 이인성에게 소장 작성을 권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뇌헌이 일본에서 밝힌 직위는 금오승장이다. 금오산, 금오도 모두 현재 여수시에 있는 지명이다. 당시 안용복과 뇌헌 일행의 영유권 주장은 일본에서 울릉도 도해 금지령(의 통보)을 이끌어내었고, 이는 1877년 메이지(明治) 10년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영토외로 정함’이라는 『태정관지령』의 판단 근거가 되었다. 그렇다면 임진왜란때 충무공이 양성한 의승수군의 후예가 100년 후인 1696년 독도를 지켰다고 주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충무공이 양성한 의승수군의 후예가 100년후 독도를 지켰다

충무공의 파직 원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모은지 1년 가까이 되는 것 같다. 독도 문제에서 임진왜란을 거론하는 이유는 임진왜란 초기에 관군이 궤멸되어 각지의 의병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직접 나서고, 정유재란때는 이중간첩 요시라의 계략에 온 조정이 속아 넘어가고 농락당하던 그때의 상황이 400년이 지난 오늘날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림 4> 충무공을 유인하기 위한 거짓정보 전달경로

충무공이 파직된 이유에 관해 여러 자료들은 대조해 본 결과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원균의 모함 때문에 충무공이 파직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충무공이 파직된 주된 원인은 요시라의 계략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모함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원균의 모함이 주된 원인인 것으로 잘못 굳혀진 것은 일제강점기 조선사편수회가 편찬한 『조선사』에서부터이다.

육전과는 달리 수전에서만은 충무공이 이끄는 조선수군에 연전연패 하던 왜군은 정유재란 직전에 이중간첩 요시라(要時羅)를 통해 중요한 반간계를 썼다.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간에 사이가 나쁘다는 것을 과장하면서, 충무공을 출동시키면 가토 기요마사를 잡을 수 있다는 비밀정보를 경상우병사 김응서를 통해 선조에게 제공했고, 선조는 그 정보에 속아 넘어가서 이순신에게 출동을 명령했는데, 이순신은 그 명령에 불응했다. 거짓된 정보라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고니시 유키나가는 요시라를 통해 ‘이순신 때문에’, ‘이순신이 출동하지 않아서’ 카토 기요마사를 놓쳤다고 지속적으로 이간책을 썼고, 거기에 또 속아 넘어간 선조는 충무공을 파직・하옥시키고 원균으로 교체했다. 이것이 바로 충무공이 파직된 주된 원인인데, 이 파직원인을 원균의 모함 때문이라고 왜곡한 것이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이다. 우리민족을 서로 모함이나 일삼는 열등한 민족으로 비하한 것이다.

그 후 충무공의 뒤를 이어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부산포로 출동하여 칠천량해전에서 패전・전멸하자, 남해안과 호남지역은 생지옥이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전공으로 코를 베어 바치게 하였는데, 남녀노소 구분없이 마구 살육당하였다. 그 코무덤이 지금도 일본 교토를 비롯해서 몇 군데 남아있다고 한다. 어리석게도 이중간첩 요시라의 계략에 속아넘어간 결과는 이렇게 참혹하였다.

총무공에 대한 모함은 지금도 계속된다

그런데 최근에 요시라가 제공한 정보는 정확했는데, 충무공이 불응해서 가토 기요마사를 잡지 못했다고 하는 근거없는 주장이 일부 국내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근거를 제시하지 않아 무엇을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얼마 전에 단서를 하나 찾았다. 일본 우익 성향의 인터넷사이트를 보니, 고니시 유키나가가 가토 기요마사를 잡을 수 있는 정보를 요시라를 통해 조선 조정에 제공했는데 이순신이 그 출동명령에 따르지 않아서 가토 기요마사를 놓쳤다라고 게재되어 있다.

그런데 그 근거로 제시한 것은 뜻밖에도 유승룡이 쓴 『징비록』이다. 『징비록』을 왜곡되게 인용한 것이다. 『징비록』 뿐만 아니라, 『난중잡록』(조경남), 『백호전서』(윤휴), 『잠곡유고』(김육) 등 거의 모든 사료(史料)에는 요시라가 제공한 정보는 충무공을 유인하기 위한 거짓된 정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일본 우익 사이트에서는 ‘거짓된 정보’라는 핵심적인 내용은 쏙 빼고 정확한 정보를 준 것으로 왜곡시키고 있다.

대단히 참신한 주장을 하고 있는 양 하지만, 사실은 일본 우익이 오래전부터 주장해 오던 것인 경우는 독도학계에서도 왕왕 있는 일이다. 충무공 사후 약 200년이 지난 1793년, 개혁군주인 정조는 다시 충무공을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우리 열조(烈祖)로 하여금 중흥의 공을 이루도록 뒷받침한 것은 오직 충무공 한 사람의 힘이다’이라는 글과 함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친히 짓고, 왕명으로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들어 일본 우익과 동조하면서 단편적인 지식과 구석에서 찾아낸 사료 몇개로 충무공을 또 모함하고 있으니 개탄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당대의 문장가인 한유(韓愈)는 ‘비부감대수 가소불자량’(蚍蜉撼大樹 可笑不自量)이라 하여, 제 역량을 모르고 가소롭게도 큰 나무를 흔들어대는 왕개미에 비유하지 않았던가.

임진왜란 당시의 시대상황과 닮은 지금의 독도문제

서애 유성룡선생은 『징비록』에서, ‘왜적은 아주 간교하다. 그 용병(用兵)에 있어 사술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거의 없다(殆無一事不出於詐術)’고 하였다. 다시는 일본에 속지 말라고 참혹한 전란의 결과 얻은 역사의 교훈을 남긴 것이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대일(對日) 심리전을 벌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현재 국내 독도학계의 실상이 임진왜란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일본측의 사술(詐術)에 넘어가서 일본측 주장이 근거가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일반인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샌프란시스코조약 부분에서 더더욱 그렇다.


정태상 교수  (sejungil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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