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표’직함 수두룩…석성장학회, 석성1만사랑회, 밥퍼운동본부 명예본부장, 천안함재단 이사장

해군 장성들 앞에서 병영문화 “야, 자, 해”를 “꾸나, 꾼요”로 개선하자는 명품강의 일화

세무사회장 4년, 세무조정업무 ‘임의조정⟶강제조정’으로 환원 노력
“회장 때 두 차례 걸쳐 전자세액공제 대폭 올렸는데, 지금은 도루묵”

“나눔의 업적, ‘중증장애인 사랑의 쉼터’건립‧미얀마 학교건립 뿌듯”
 

‘세무법인 석성’ 조용근 회장. 그는 ‘천사표’직함을 수두룩하게 가진 명인(名人)이다.

전 대전지방국세청장, 전 한국세무사회장, 전 천안함재단 이사장, 현 재단법인 석성장학회 회장, 사단법인 석성1만사랑회 이사장, 청량리 밥퍼나눔운동본부 명예본부장 등 묵직한 직함에다 강연마다 ‘앵콜’로 이어지면서 명성이 높다.

지난 8월 19일에는 경찰청으로부터 명예경찰관 위촉과 동시에 ‘명예경정’으로 추대됐다. 그는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추대“라고 했다. ‘명예경정’은 전국에서 두 사람 뿐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추겨 세웠다. 부연설명도 곁들였다.

“자신을 아끼는 몇몇 국세청 후배 및 세무사 후배들은 대전지방국세청장 및 한국세무사회장을 지내신 분을 ‘명예경정’으로 추대한 것은 격이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지만 경찰청에서 위촉하는 명예경찰관 제도를 잘 모르고 하는 충언이라고 일축한다. 초임에 명예경정으로 위촉은 경찰청개청이래 처음이며, 현재 전국에서 자신과 또 한사람 두 분밖에 없다. 희소가치를 따지면 자랑스럽고 영예로운 추대이다. 배우 최불암 씨가 드라마 수사반장으로 경찰의 위상을 드높이는 막강한 공적을 세웠지만 명예경찰관으로 위촉 될 당시에는 명예경위(현재는 경무관)였다.

조 회장은 1966년 국세청 개청과 함께 9급 세무공무원에서 출발, 국세청 공보관을 거쳐 대전지방국세청장을 끝으로 36년간의 공직생활을 마감하면서 한걸음 두 걸음 씩 나아가며 승진하는 기쁨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명예경찰관’ 위촉이 의미 있는 것이지 계급추대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어려운 환경의 자녀들을 위한 ‘석성장학회’ 및 ‘중증장애인을 돕는 사단법인 석성1만사랑회를 운영하면서 ’낮은 대로 임하소서(사도행전)‘라는 성경말씀을 손수 실천하고 있기에 계급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회고록 ‘나는 평생 세금쟁이’라는 책의 표제에서도 그의 인품과 소탈함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책의 프롤로그에서 ‘세월이 참 빠른 것 같다. 백구과극(白駒過隙)이라 했든가? 세월은 흰말이 달리는 모습을 문틈으로 얼핏 보는 순간처럼 50여년이 찰나처럼 지나갔다’고 술회한다.
 

만 20세가 되던 1966년 6월20일 국세청 개청과 함께 최 말단 9급에서 출발한 국세공무원, 대전지방국세청장을 끝으로 36년간의 국세공무원을 마감했다. 그리고 세무사가 되어 2007년 1만 3천여명의 회원을 포용한 한국세무사회 제25대 회장에 당선된다. 세무사회장 임기 2년동안 일궈놓은 공적을 인정받아 제26대 회장선거 때는 경합자가 없어 무투표당선으로 회장에 오른다.

세무사회장을 떠나서도 나눔의 전도사가 되어 어두운 곳에 빛과 소금이 되는 힘든 일들을 자청하고 있다. 석성세무법인 사무실내에 재단법인 석성장학회 및 사단법인 석성 1만사랑회를 설립해 운영을 맡고 있다. 뿐만 아니다. 그는 위대한 영웅 46용사들을 기리고 유족들을 돌보는 ‘천안함재단’ 이사장을 6년동안 맡아 헌신했다.

칠순을 넘긴 나이인데도 60대 초반 같다. 3시간을 넘긴 인터뷰에서 화술은 변함없이 청산유수이며, 열정 역시 철철 넘친다. ‘100세 시대’ 천수를 누리시겠다며 건강비결을 묻자 “그저 낮은 자세로 사람가리지 않고 만나고 나눔을 실천하는 기쁨이 나 자신을 힐링하는 것 같다”고 했다. (편집자 주)

◆국세공무원 재임시절 에피소드?

‘나는 평생세금 쟁이’라는 회고록을 펴낼 정도로 국세공무원 생활 36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만 20세. 1966년 국세청 개청요원으로 9급에서 출발해 대전지방국세청장으로 명예퇴임하기까지의 긴 여정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세상물정 모르던 철부지 나이에 세무공무원이 되어 9급에서 8급, 7급 등을 거쳐 한 단계 한 단계 살얼음을 내딛듯이 올라가면서 겪은 조마조마했던 기억들을 되살리면 지금 이 순간에도 몸에서 ‘식은 땀’이 난다며 바동거렸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면 웃음이 절로난다. 이렇게 긴 세월 세금쟁이로 머물면서 치열한 경쟁의 구도 속에서 ‘성실한 세금쟁이’로 살아남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고 젊음을 불태웠기에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첫 근무지 대구서부세무서 법인세과 근무시절 작은 실수로 좌천의 아픔도 겪었다.
 

◆대구에서 서울로 발탁된 계기는?

고교 동창들 중 서울유학생들이 많았다. 방학 때 내려와 대학생활 얘기를 들으면 그들이 부럽고 왠지 말단 세무공무원이 된 자신에 대해 자괴감이 들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청구대학 야간부는 향학열에 불탔던 나에게는 조금은 미흡하다는 생각이 앞섰다. 어떻게 해서든 서울에 있는 야간대학을 다녀야겠다는 결심으로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때가 1968년 3월로 기억된다. 때마침 성균관대학 2부 상학과(지금의 경영학과)에서 편입생 모집이 있다는 정보를 받았다. 2명을 뽑는데 68명이 응시했다. 운 좋게 합격했다. 하지만 직장생활을 하면서 서울 야간대학을 다닌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궁여지책의 머리를 짜내 집안 형님뻘인 조용대 형님(당시 세정감독관, 현재 감사관)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내가 세무공무원이 된 사연과 집안사정이 어렵다는 이야기와 함께 성균관대학교 야간학부 편입시험에 합격했다는 사연, 그리고 장래희망 등을 진솔하게 썼다. 며칠 후 답장이 왔다. 본청에서 얼마 있으면 수도권에 많은 세무공무원을 배치하기 위해 지방에 있는 우수한 인력을 뽑을 예정이라며, 그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조금만 기다리라는 답장이 왔다. 너무 반가운 답장이었다.

성균관대학교 수강신청을 할 즈음 국세청으로부터 인사발령통지가 날아왔다. 성균관대학교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동대문세무서로 배치됐다. 대구에서의 철부지 9급 세무공무원 생활은 1년10개 월 만에 마감하고 마침내 상경의 꿈을 이뤘다. 이 때가 1968년 5월1일. 동대문세무서 조사과 자료계로 발령받았다.

◆작고하신 오혁주 씨와의 묘한 인연

오혁주 선배는 당시 나의 첫 서울부임지인 동대문세무서 조사과장이었다. 8급과 사무관은 높낮이가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지만 그분은 공사가 분명한 분으로 성실하게 일하는 직원들에게는 ‘멘토’ 역할을 열심히 해주었다.

이 분은 나중에 대전지방국세청장을 지내시고 퇴직 후에는 언론사에도 관여하시다 작고하셨지만 국세청에서는 유명인사 반열에 올라 있다. 이분과의 인연은 동대문세무서 조사과장과 말단 직원으로서의 만남 외에도 독특한 만남이 지속됐다.

웃지 못 할 에피소드는 동부이촌동 공무원 아파트 분양사건이다. 분양주체 처는 총무처 연금국으로 기억된다. 집이 없는 공무원들에게 혜택을 주는 제도였다. 사무관 이상은 공모대상이 아니고 6급이하 무주택자만 공모대상이었지만 경쟁률이 높아 ‘은행 알 돌리기’로 당첨여부를 가렸다. 나는 애초부터 당첨이 되도 입주할 형편이 못돼 오혁주 과장의 권유로 대리역할을 담당해 참여했다. 운 좋게도 당첨이 됐다. 이후 입주는 당연히 그분의 가족이 했다.

문제가 발생했다. 총무처에서 불씨에 거주자 실질조사를 하는 바람에 살아야 할 조용근이는 없고 엉뚱한 오혁주 씨가 살고 있었으니 나는 불법 전매자로 오인 받게 됐다. 총무처 담당직원에게 “대구에서 전출되어 아직 입주할 형편이 안 돼 부득이 과장님에게 몇 달 살고 계시면 준비 되는대로 이사 짐을 옮기겠다고 했다며 곧 이사를 하겠다”는 궁색한 변명으로 위기를 넘겼다. 그 후 실제 그분과 동거는 하지 않았지만 주민등록을 옮기고 빈방하나에 옷이며 이불 헌 신발까지 가져다 놓고 일주일에 한번 씩은 왔다 갔다 하며 위장 출퇴근을 해야 하는 불편을 겪기도 했다.

그분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분이 서울중부세무서로 전출할 때 같이 가게 되어 여기서도 과장으로 모셨다. 또 제5공화국 출범초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파견 근무당시에도 상관으로 모셨다. 특히 이분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사세서기보(지금의 9급)에서 보자를 떼고 사세서기(8급)로 진급할 때에도 이분을 과장으로 모실 때였으니까 그렇다. 당시 나만 진급했다면 특혜인사라는 오해도 있겠지만 임용동기생 두 사람도 함께 진급해 특혜시비는 없었다.
 

◆김수학 청장의 격려 “자네, 제대로 한건 했네”

국보위 파견시절. 신군부 실세들은 국세공무원에 대한 선입견이 좋지 않았다. 더 솔직히 말씀드리면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국세공무원 전체가 탁류에 오염돼 있다고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사정기관을 총동원해서 세무공직자 정화를 곧 착수하겠다는 절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때 나는 절박감을 느끼며 소수의 부조리한 행위가 국세청 전체 공무원으로 파급 확산 된다는 것은 충격이며 국익에도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한 나머지 소속 상관인 국보위 재무위원회 오관치 간사님에게 독대를 요청해 오해를 풀 기회를 마련했다.

그동안 내가 겪었던 세무공무원으로서의 애환과 어느 조직이던 일부 몰지각한 공무원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런 부조리 문제를 땜질하는 방법으로 물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 보다 근본적인 예방장치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렸다.

오 간사님은 무엇보다 일선 세무공무원로서의 고충들을 귀담아 들으시며, 부조리의 근원이 뭔지를 알아내어 시정을 해야겠다는 의지를 보이셨다. 나는 용기를 내어 문제점을 하나하나 설명 드렸다. 예를 들어 출장비며 소모품구입비 등을 개인이 부담해야하고, 지방국세청장, 세무서장 과‧계장, 직원 등이 지방으로 발령받으면 관사 및 사택이 없어 자기부담으로 거처를 마련해야 한다는 애로사항도 말씀드렸다. 아울러 얼마간의 말미를 주면 이러한 문제점 및 개선방안을 마련해 보고 드리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분도 일부 수긍하는 눈치였다.

때맞춰 나는 국세청으로 달려가 국보위의 국세공무원 사정(司正) 분위기를 알렸다. 일견 나름대로 동료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 국가예산지원이 없어 현실적으로 세무공무원 호주머니를 털어야하는 경비를 모두 파악해 관련보고서를 만들어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오 간사님도 꾀나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러면서 지방청장과 세무서장 관사확보에 필요한 예산(25억원)을 확보해주면 세수를 얼마나 늘릴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10배 이상은 늘어날 것입니다”라고 어림잡아 말씀드렸다.

그분은 내가 보는 자리에서 경제기획원 고위관료에게 전화를 걸어 예산지원을 요청했다. “예 간사님, 적극검토해 보겠습니다”라는 상대방의 음성이 수화기 밖으로 흘러나오는 소리를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분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으로 오늘날의 지방청장 관사와 세무서장 관사 및 간부들의 숙소가 마련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후 일련의 상황들을 종합해서 김수학 국세청장에게 보고서를 올렸고 청장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졌다.

청장께서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조용근, 자네가 제대로 한건 했어” 청장의 격려 한마디가 그동안 쌓였던 피로를 말끔하게 씻어 내렸다. 순간 복받치는 감회를 참지 못해 와락 눈물이 솟구쳤다. 이렇게 파격적인 청장의 격려는 수 십 년의 세월이 흘러도 잊혀 지지 않는다.

반추해보면 “모름지기 공직자는 계급이나 직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비록 직급은 낮더라도 어떤 일을 했으며 어떤 결과를 낳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우쳤다. ‘용기 있는 자만이 세상을 바꾼다’는 하나님 말씀처럼 지금생각 하면 아마 9급에서 지방청장까지 갈 수 있었던 원동력의 용기가 여기서 생겨났던 게 아닌가 싶다.

이렇듯 성품이 소탈하고 유머가 풍부한 조용근 회장의 재직이 겪은 숨은 야사는 너무 많다. △화장실에서 몰래 뜯어본 흰 봉투사건 △부동산 투기업무 원조 조사관의 역할 △삼수 끝에 사무관으로 승진 된 이야기 △신사동 Y특급호텔 사우나탕에서 김수학 국세청장과 마주쳐, 청장은 자신을 국세청 출입기자로 오인하고 난처해하는 모습에 놀라 “저는 국세청 직세국 소득세과에 근무하는 6급 조용근입니다”라고 실토한 일화 등 숱한 비화가 있지만 지면 관계로 모두 담론에 담지 못해 아쉽다. 그는 “어이 조용근 주사, 우리 앞으로 목욕탕에서 만나면 서로 아는 체하지 마세” 목욕탕을 나서며 하시던 김수학 청장님의 말씀이 아직도 귓전에서 맴돈다고 술회한다.

◆‘나눔의 전도사’로 변신, 사회봉사활동에서 기적을 낳고 계신다. 에너지의 원천은?

먼저 현직 세무공무원이 장학재단을 세운 배경부터 설명하려고 한다. 내 아버지 어머니는 초등학교 문턱에도 못 가신 ‘일자무식’으로 흔히 말하는 가방 끈이 너무 짧았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배움에 대한 한이 있어서인지 “너만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열심히 공부해서 사회에 나가 당당하게 살아다오”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린 1984년 12월30일 한밤중에 어머니가 먼저 가계시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부모님께서는 그동안 사시던 한옥집 한 채를 남겨 주셨다. 얼마 후 그 집을 처분해보니 5000만원이나 됐다. 당시로서는 큰돈이었다.

그 돈으로 10년간 재테크한 결과 2억원으로 불어났다. 1994년 ‘공무원 재산등록제’가 처음 실시된 시기여서 2억원의 돈을 어떻게 할 것인가 아내와 상의했다. 아내의 첫 마디가 “그 돈은 우리 것이 아니잖아요”라고 반문했다. 아내와 고심 끝에 평생 동안 배우지 못해 공부에 한이 맺힌 아버지 어머니의 한을 풀어드리자는 생각에서 장학재단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장학재단 이름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 가운데 글자를 하나씩 따와 ‘석성(石成)장학재단’이라고 지었다. 이름을 짓고 보니 제법 그럴 사 했다. 즉시 재단법인 인가를 받으려고 했으나, 설립자금(3억원 이상)부족으로 포기하고 ‘석성장학회’란 단체로 출발했다.

처음에는 매년 은행에서 나오는 정기예금 이자수입으로 강원도 산골 화전민촌에 사는 어려운 청소년 몇 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장학생 숫자도 매년 조금씩 늘려 나갔다. 장학 사업을 숨어서 한다 해도 소문은 나기 마련이었다. 대부분의 지인들은 나를 격려하고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 에서는 가재미눈으로 쳐다보며 뒤에서 수군거렸다.

“현직 세무공무원이 무슨 돈으로 장학회를 운영하지?” 뇌물이나 받아 장학회를 운영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혹의 눈초리도 보냈다. 그럴 때 마다 아내는 “여보, 남들이 뭐라고 해도 괘념치 말고 열심히 운영하다 보면 언젠가는 진심이 통할 날이 있을 겁니다. 석성장학회 파이팅이 예요” 아내의 격려 한 마다가 천군만마를 얻는 만큼 위안이 됐다.

이렇게 조금은 어설프게 시작한 ‘석성장학회’가 출범한지 7년이 지난 2001년 ‘재단법인 석성장학회’로 거듭났다. 22년이 지난 2019년 9월의 석성장학회는 어떤가? 장대하고 빛나는 장학회로 발전했다.

자산규모는 현금 30억원, 부동산 2억원을 합치면 총 32억원으로 설립당시와 비교하면 108배로 늘어났다. 25년 동안 무려 2000여명에게 20여억 원의 장학금을 지급하고도 자산규모가 엄청나게 늘어난 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나눔과 사랑의 손길이 해외까지 확산

석성장학회는 운영방식이 조금은 다르다. 통상 장학금은 공부 잘하고 모범학생에게 지급되는데, 석성은 가난한 학생을 우선적으로 선발해 지급하고 있다.

석성장학회는 국내는 물론이고 미국, 미얀마, 캄보디아, 중국에 까지 나눔의 손길이 뻗쳐 나가고 있다. 특히 미얀마는 2008년 쓰나미가 덮쳐 8만여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이재민, 재산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학교도 폐허가 됐다. 석성장학회는 그곳 청소년들이 교실이 없어 공부를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힘을 보태기로 하고 미얀마 양곤시 딴린지역 제3고등학교 재건사업에 참여했다. 벌써 10년째 교실증축에 힘을 쏟고 있다.

미얀마와의 인연은 제가 한국세무사회장 시절 세무사회 예산으로 교실 2개동을 지어준 계기가 출발선상이다. 세무사회장 4년을 마치고 본래의 자리인 석성세무법인으로 돌아와 이왕 시작한 일 유종의 미를 거둬야한다는 사명감에 미얀마 학교 건립을 재개했다. 10년이 걸려 지난해 말까지 총 8개동을 건립(투자액 3억5000만원)해 교실부족난은 해소 시켰다. 무엇보다 감동적인 것은 양곤시 교육당국이 학교정문 기둥에 ‘대한민국 석성고등학교’라는 간판을 달아줘 감동적이었다.

지난해 연말에 8번째 준공식을 마치고 돌아올 때 학교 체육관을 지어주기로 약속했다. 체육관건립비용이 7500만원 정도가 소요되는데, 귀국해 챙겨보니 투자여력 예산이 2500만원밖에 없어 고민하던 중 최근 강남에 사시는 75세(1944년생) 할머니가 장학재단에 5000만원을 기부해 왔다. 일면식도 없는 생명부지의 할머니는 석성장학회가 진정한 장학 사업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지인으로부터 들었다며 거액을 쾌척했다. 이렇게 감동적인 기적이 주변에서 일어날 때 마다 느끼는 점은 하나님께서 즐겨하셔서 채워주셨기 때문임을 깨닫게 됐다.
 

◆‘밥퍼나눔운동본부’와의 인연

저는 ‘청량리 밥퍼나눔운동본부 명예본부장’ 직함을 사랑한다. 지인의 소개로 ‘다일복지재단’을 이끄는 최일도 목사님을 알게 됐다. 최 목사님은 청량리역 광장에서 수 백 여명의 노숙자와 독거노인들에게 무료식사를 제공한지 31년째를 맞고 있다. 제가 밥퍼나눔운동본부와 인연을 맺은 것은 국세청 과장 때 이었으니까 벌써 22년의 세월이 흘렀다.

최 목사를 개인적으로 돕는다는 생각이 먼저였지만 막상 이 일에 참여해보니 진정한 나눔과 이웃사랑의 의미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세무법인 석성 개업 때는 물론이고 세무사회장 취임식 때에 받은 축하금을 비롯해서 딸아이 결혼식 때 받은 결혼축하금 상당 부분을 이곳으로 보냈다. 또 개인적으로는 매달 100만원씩을 보내고 있으며, 시간 날 때마다 밥퍼배식에도 동참하고 있다.

◆(사)석성 1만사랑회 후원 열기가 뜨겁습니다. 비결은?

“사단법인 석성1만사랑회는 중증장애인을 돕는 공익단체입니다. 최일도 목사님의 희생정신에 영향을 많이 받은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육신이 온전하지 못하니까 소외감은 배가 될 수밖에 없는 중증장애인을 돕는 게 나눔의 값어치가 있겠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죠.”

사단법인을 만들기 전 우선 가까운 친척분과 지인들의 반응을 들어 봤다. 100% 찬성이었다.

법인명은 ‘석성1만사랑회’ 목표는 매월 1구좌 1만원의 성금을 1만명으로부터 협찬을 받기로 목표를 설정했다. 심지어 어떤 지인은 매달 100구좌에 해당하는 100만원을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했답니다.

2011년 4월 마침내 서울시로부터 사단법인 석성1만사랑회 설립인가를 받았다. 그로부터 8년의 세월이 흘렀다. 현재 500여명의 기부천사들이 적게는 1만원에서 많게는 100만원의 성금을 보내오고 있다. 월 평균 1300여만원, 연평균 1억5000여만원이 모아진다. 이 돈으로 뭘 하냐 구요?

처음에는 중증장애인을 찾아가 생활에 도움이 되는 ‘음성자동인식기’를 달아주고 휠체어 배터리도 교환 해주었다. 곰곰 생각해보니 돕고 있는 제품이 모두 소모품이라 달아 없어지면 도움을 주었다는 흔적이 사라졌다. 아쉬웠다. 그래서 다시 착안 한 것이 반영구적인 지원 사업을 해 보자였다. 고심 끝에 결정한 것이 중증장애인들이 마음껏 쉴 수 있는 ‘사랑의 쉼터’겸 삶의 터전이 될 수 있는 ‘공동작업장’건립이었다.

간절히 원하면 하나님은 이뤄 주신다는 믿음은 확고했다. 2013년 12월 12일 석성1만사랑회는 ‘석성 사랑의 쉼터’ 1호점을 충남 논산에서 오픈하게 됐다. 쉼터는 1억2000여만원이 지원되어 200평 대지에 30평 단층 목조건물로 축조됐다. 이렇게 시작한 사랑의 쉼터는 지금껏 4호점을 건립하고 오는 12월 경북 구미에 5호점을 건립할 예정이다. 5호점 건립예산 1억5400만원을 이미 확보해 두고 있다.

세금쟁이 출신이 중증장애인을 위한 사랑의 쉼터를 논산에 건립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대전지방국세청 후배들이 사랑의 쉼터 운영비에 보태라며 매월 100만원씩 보내오고 있다. 이것을 보면서 ‘사랑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 박원순 서울시장의 배려로 성탄절 3일간의 청계광장 사용승낙을 받아내 중증장애인들을 위한 음악축제를 열었다. “이런 음악축제는 난생처음이라며 환하게 웃는 이들 중증장애우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값진 나눔의 봉사라는 자긍심을 떨칠 수가 없다”고 회고한다.
 

◆어떻게 천안함재단 이사장이 됐나?

당시에 벌어진 일련의 일들은 생각하면 납득이 안 된다. 천안함 함정의 폭침사건도 사건이지만, 기라성 같은 명사들 중 책임이 막중한 천안함재단 이사장에 추대되리라고는 전혀 예상되지 못한 것이었다.

떠올리기 싫은 사건이지만, 2010년 3월26일 늦은 밤 서해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104명의 해군 장병을 태운 천안함 함정이 NNL작전임무를 수행하던 중 북한 어뢰에 맞아 해병용사 46명이 희생되고 58명의 해병은 사투 끝에 겨우 목숨은 건졌다. 충격적인 뉴스를 접한 온 국민들은 치를 떨며 비통함에 잠겨 망연자실했다. 희생 장병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기 위해 범국민적 성금모금에 나섰다. 모금운동에 KBS와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주도적인 역할을 해주었다.

짧은 기간에 모인 성금은 무려 395억원. 당시 나는 한국세무사회장이었다. 모금이 조성 된 얼마 후 모금된 성금을 뜻있게 사용하고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를 협의하기 위해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시민단체 대표 자격으로 특위에 참석하게 됐다. 5개월가량의 고민 끝에 시체 인양작업 중 숨진 고 한주호 준위를 포함 한 유가족 1가구당 5억원씩, 금양호 선원들까지 모두 250억원을 위로금으로 지급했다. 나머지 145억원을 유익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의견일치로 ‘천안함 재단’을 설립키로 했다. 초대 이사장을 누구로 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숙의 끝에 ‘조용근’이 추대됐다. 세무사회장하기도 벅차다며 고사를 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이왕 맡은 이상 영웅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잘해보자고 다짐했다. 재단에서 해야 할 중점과제 4가지를 선정했다.

▲첫째, 46용사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추모사업과 유가족 지원사업 ▲둘째,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리는 58명의 생존 장병의 정상적인 사회복귀 지원 ▲셋째, 현실적으로 근무환경이 열악한 병영문화 개선 지원 ▲넷째, 느슨해진 국민의 안보의식 고취 지원 사업들이었다.

나는 6년 가까이 천안함재단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육해공군 장군들과 제독들 앞에서 안보특강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강의 주제는 ‘부국강병은 근자열(近者悅)로부터’였다.

이날 강의는 참으로 재치 넘치고 해학이 담겨 있는 강의로 찬사를 받았다.

병영언어도 하향식 “야-.자-해-”의 명령이 아니라 “~꾸나, ~꾼요”로 끝나는 말이 사기진작에 도움이 아니겠느냐고 제안했다.

예를 들어 “김대위, 자네 그렇게 생각했꾸나” “군수참모,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꾸나”라고.

모름지기 리더는 비록 부하들의 생각이 나와 다르더라도 그 생각은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르다고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창의력 생산이 확산된다. 병영문화에 하향식 명령만 팽배해 진다면 우리 군의 미래는 없다. 그리고 “꾸나‘문화가 전군으로 확산되면 우려되는 병사들의 총기사고와 자살사고는 사라질 것이다. 강연이 끝나자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때 많은 장성들과 제독들로부터 “이사장님, 세금쟁이 출신맞소?”라는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날 한 조간신문에 “육군병장 출신이 대장들 울렸네”라는 기사가 실렸다.

◆세무사회장 4년 기억에 남는 일은?

세무사회와 회원을 위한 업적 3가지만 이야기 한다. 첫째는 세무조정업무다. 강제조정업무였던 세무조정을 전군표 청장 당시 납세자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명분으로 임의조정으로 규정을 바꿨다. 2007년 세무사회장에 당선되자마자 회원들에게 뭔가 선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임의제도’를 ‘강제제도’로 환원시키는 공략 작업에 몰입했다.

당시 김창환 법인납세국장, (고)성윤경 법인세 과장 등을 차례로 만나 설득하고, 처음에는 반대하던 한상률 차장까지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끝내 ‘강제조정’으로 환원시킴으로써 ‘회장당선 100일 기념선물’이 됐다.

둘째, 내가 회장 당시에는 한국세무사회관 앞의 차선 중앙선은 절대 침범이 불가능한 두 줄이 그어져 있었으며 변리사회관 앞에서 좌회전이 가능 하도록 돼 있었다. 세무사회관과 변리사회관과의 거리는 불과 20M의 지근거리다. 경찰청에 불합리성을 주장해 세무사회관 앞에도 두 줄을 제거했다. 단순한 일 같지만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셋째, 2003년도에 처음생긴 전자신고세액공제는 국가예산 지출과 맞물려 세무사들의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이것 역시 허용석 기획재정부 세제실장 시절로 기억된다. 신고건당 법인세는 2만원, 부가세는 1만원, 연간 상한선은 세무대리 개인 100만원, 법인 300만원이었던 것을 2008년 회장 당시 건당 2만원, 연간한도 200만원, 세무법인 500만원으로 끌어올렸다. 또 2009년 윤영선 세제실장때다. 1인당 4만원 연간한도 300만원, 세무법인은 800만원으로 인상시키는데 견인역할을 맡았다.
 

◆석성 조용근 회장은 누구?

-1946년생. 고향 경남 진주.

□ 학력 : 경북대 사범대 부속고. 성균관대 3년 중퇴. 2012년 명예졸업.

□주요경력 :

1966년 국세청 개청요원(9급), 대전지방국세청장 명예퇴임(국세청 재직 36년), 2005년 세무법인 석성설립 대표세무사 취임, 2007년 한국세무사회장 당선, 2009년 경쟁자가 없어 무투표 당선

2011년부터 7년간 서울고검 항고심사위원, 2009년 2월부터 지금까지 서울고검 검찰시민위원

□사회봉사활동 :

2010년 12월부터 6년간 천안함재단 이사장, 2011년 (사) 석성1만사랑회 이사장, 2009년부터 국세청행정위원 및 명예교수

□ 수상 :

2011년 은탑산업훈장, 2005년 홍조근정훈장, 1992년 근정포장, 1982년 대통령 표창, 2017년 대한민국 나눔봉사 대상 (전국언론연합회)

□저서 :

기적은 순간마다 (2012년 상상나무), 나는 평생 세금쟁이(2016년 나남), 크리스천의 재정관리(2017년 상상나무)

저작권자 © 세정일보 [세정일보] 세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