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정태상 연구교수, 조선사의 구체적인 왜곡사례 발표

"고종 부분, 일방적 일본 입장 대변…독도문제도 숙종대의 결정적 기록 누락"
 

▲ 정태상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연구교수가 9일 '조선사편수회의 역사왜곡 사례에 관해 강의하고 있다.
▲ 독도해설사 양성과정 참석자들이 정태상 교수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소속 기관으로 설립된 조선사편수회가 한 역점사업 중의 하나는 총 6편 35권에 달하는 편년체 사료집 『조선사』를 발간(1938년)하는 것이었다. 발간 목적을 '학술적이고 공평무사한 사료집 편찬'이라고 내세웠지만, 식민 통치를 위한 목적에서 한 사업이며, 『조선사』 35권은 식민사관 형성의 토대가 되었다. 그 조선사편수회 참여자들이 광복 후에도 우리 역사학계의 주류를 형성해 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까지 조선사편수회 발간 『조선사』에 대한 비판 논문은 많이 발표되었으나, 그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비판한 연구 결과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조선사』가 전부 일본어로 기록되어 있어 우리말로 번역해야 하는 불편이 있다는 것이 주된 원인일 것이다.

그런데 조선사편수회 발간 『조선사』에서의 구체적인 우리 역사왜곡 사례가 발표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11월 9일 흥사단 독도수호본부가 주관하고 대구경북흥사단이 후원한 독도해설사 과정 특강에서, 인하대 고조선연구소의 정태상 연구교수는 그 『조선사』의 어느 부분이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지적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고려 말에 문제가 된 철령위문제는 강원도의 철령이 아니라 요동의 철령에 관한 것이며,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이 파직된 주된 원인은 원균 모함 때문이 아니라 왜인 이중간첩 요시라의 계략 때문인데, 이러한 내용들이 『조선사』에서부터 왜곡되었다는 것이다.

역사왜곡은 흔히 침략 전쟁의 구실로 악용되어 왔기 때문에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지 않으면 나중에 큰 화근이 될 수도 있다. 일제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지 않으면 중국의 동북공정에 그대로 악용될 수 있다. 그 전형적인 예가 바로 철령위 문제이다. 중국에서는 고려 말에 실지로 강원도 북단에 철령위가 설치되었으며, 강원도 철령 이북 땅은 명나라 땅이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우리쪽에서 식민사관에 빠져 당시 명나라가 강원도 북단에 철령위를 설치하려 했다고 하니까, 중국에서는 한술 더 떠서 철령위를 설치했다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 교수는 조선사편수회 『조선사』의 역사왜곡에 관해 이미 두 편의 논문을 학술지에 게재한 바 있는데, 앞으로도 논문을 통해 이러한 역사왜곡을 바로잡는 일을 계속해 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흥사단 독도수호 본부에서 정교수가 발표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고려말 국경이라 할 수 있는 ‘요동의 철령위’를 ‘강원도의 철령위’로 왜곡

▲ <그림 1> 1387년 12월 명태조가 국경으로 삼고자 한 철령의 위치에 관한 주장의 변화.

고려말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철령을 양국간의 국경으로 할 것을 제의함에 발생한 철령위 문제는 요동정벌과 위화도회군으로 이어졌는데, 그 철령은 강원도의 철령이 이니라 중국 요동땅의 철령이었다.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등 일본학자들 조차도 요동의 철령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조선사』부터 그 철령을 압록강 이남의 강계라고 주장하기 시작하고, 조선사편수회의 수사관(修史官)이자 경성제대교수인 스에마츠 야스카즈(末松保和)가 강원도의 철령으로 고착시켰다.

▲ <그림 2> 1388년 2월의 『조선사』(3편 7권 p273).

“명나라가, 철령위를 고려 강역내(강계)에 설치하려고 하였다”고 자의적으로 써넣고, 지명들을 모두 압록강 이남의 지명인 것으로 끌어내렸다.
 

2. 충무공의 파직원인을 원균 모함 때문인 것으로 왜곡, 고착

▲ <그림 3> 이중간첩 요시라에 의한 거짓된 정보 전달경로

원균을 천거한 인물들이 충무공을 모함하기는 했으나, 원균이 직접 충무공을 지칭하여 파직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충무공 파직의 주된 원인은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이중간첩 요시라(要時羅)의 계략에 무능한 임금 선조가 속아 넘어갔기 때문이다. 『선조수정실록』에 의하면, 악명높은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의 이동경로와 일시에 관한 거짓된 정보를 요시라가 선조에게 제공하고, 선조가 거기에 속아 충무공에게 출동명령을 내렸는데, 충무공이 불응했기 때문이다.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징비록』 등 임진왜란 당대 및 그 직후의 거의 모든 기록들에 일본의 공작이 주된 원인인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을 원균모함 때문인 것처럼 조작, 고착시킨 것이 바로 조선사편수회가 발간한 사료집 『조선사』이다. 우리민족을 서로 모함을 일삼는 열등한 민족으로 비하한 것이다. 또한 『조선사』에서는 당시 이중간첩 요시라에 대해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는 인물로 왜곡되게 기록했다.

▲ <그림 4> 『조선사』(4편 10권 p804)에 기록된 충무공의 졸기(卒記)“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그런데 원균과 합하지 못하고, 인하여 모함을 당하였다.”


3. 독도를 직접 지칭하여(우산도) 조선땅이라고 한 숙종실록 부분 누락, 왜곡

독도부분에서도 의도적인 누락과 왜곡의 흔적이 엿보인다.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독도의 위치까지 분명히 하고(왜가 말하는 ‘송도’), 독도를 ‘우산도’라고 직접 지칭하여, 조선땅으로 기록한 것은 1696년 9월 25일자 『숙종실록』이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부분이 누락되었다.

▲ <그림 5> 1696년 안용복 일행 11명이 일본 백기주에 가서 ‘조울양도감세장’이라 칭하며,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땅임을 주장할 때 뱃머리에 달고 간 깃발독도(=于山島)는 일본 발음 ‘우사무스무’로 일본의 『인번지』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안용복사건 당시 조선이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 중에서 '울릉도는 조선땅'이라는 말을 삭제해줄 것을 요구한 것은 일본측 대마도 연락관인 귤진중인데도(1694.2.23『숙종실록』) 조선측의 접위관 홍중하가 요구한 것으로 왜곡시켰다. 양국간 외교 교섭이 타결된 이후, 조선에서는 원래부터 조선땅이었으니까 감사히 여길 일이 아니라고 감사 의사를 표명하지 않았는데도, 『조선사』에는 조선측에서 사의를 일본에 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편집과정에서의 실수라고 볼 여지도 있지만, 하나의 사건에서 조선측에 유리한 내용들이 연이어서 누락되거나 사실과 다르게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의도적인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 <그림 6> 1694년 2월 23일자 『조선사』(5편 6권 p103)
‘폐경울릉도’란 말을 삭제해줄 것을 홍중하가 요청한 것으로 왜곡되게 기록되었다.

▲ <그림 7> 1696년 9월 25일자 『숙종실록』
“(왜인들이 말하는) 송도는 우산도로서 이 역시 우리땅이다”라고 안용복의 말을 인용하여 독도가 조선땅임이 명시되어 있는데, 『조선사』에는 누락되었다.


4. 고종부분은 일방적으로 일본측 주장 대변, 무력충돌은 조선이 먼저 공격한 것으로.

▲ <그림 8>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경복궁침입을 기록한 6월 21일자 『조선사』(6편 4권 p1097).
“새벽에 일본군이 경복궁 영추문에 이르자, 조선군이 까닭없이 총을 쏘았다.”고 왜곡되게 기록되어 있다.

일제가 만든 『조선사』가, 독립된 나라인 조선의 역사가 아니라 일본사의 일부로서 『조선사』가 쓰여졌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조선사』의 고종부분이다.

소제목에서부터 잘못되어 있다. '한 일'이 아니라 전부 '일 한'으로 되어 있다. 또한 일본과 대립되는 부분은 거의 일방적으로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여 서술하고 있다.

일방적으로 당한 무력충돌에서도 우리 쪽에서 먼저 공격을 한 것으로 왜곡되게 서술되어 있다. 강화도조약 체결 원인이 된 운양호사건(1875년)에서도 조선이 먼저 발포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갑오경장 직전인 1894년 6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입하여 점령했을 때도 조선군이 까닭 없이 먼저 총을 쏘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정도라면 거의 노골적인 날조라 할 수 있다.

당시 중국측 역사서인 『청사고』에서도 일본군이 ‘조선왕궁에 들어가 衛兵을 죽이고, 끝내는 국왕 이희(李熙)를 위협하여 대원군 이하응(李昰應)으로 하여금 國事를 주관하게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35권에 달하는 방대한 사료집임에도 불구하고 12조 밖에 안되는 강화도조약 조문은 『조선사』에 수록하지 않았다. 당파싸움 관련 상소문은 2~3페이지에 달하는 것도 전부 수록한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한반도 해안 어디든 측량을 핑계로 일본군함이 드나들 수 있게 한 강화도조약 제7관이 문제다. 불평등한 정도를 넘어 세계 개항조약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해안 침탈조항을 넣으면서도 만국공법에 따른 것이라고 속였기 때문이다.

『조선사』는 식민사관 구축의 토대가 된 사료집이다. 『조선사』를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의 사료와 면밀히 대조하고 왜곡된 부분을 찾아내어 역사를 바로잡는 일은 시급한 과제이며, 식민사관에 빠진 일부 기존학계 주장과의 충돌이 불가피하겠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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