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호영 세무사

의심은 확신만큼이나 강력하고 지속 가능한 결속력과 힘을 발휘한다(Doubt can be bond as powerful and sustaining as certainty)".

퓰리처상을 받은 동명의 연극을 각색해 만든 영화 ‘다우트(Doubt,의심)’는 제목과 같이 한 수녀가 한 신부를 끊임없으면서도 집요하게 거짓과 위선에 대해서 의심하며 의심되는 사항을 파헤치려는 줄거리의 영화이다.

또한 이 영화는 성당에서 플린이라는 신부의 위의 설교 장면과 함께 시작한다. 인간은 증거가 없는 것도 믿어 버리는 것일까하는 소박한 의문을 픽션으로 만든 영화였다.

미국 뉴욕에 소재한 한 카톨릭 교구의 부속 학교에서 플린이라는 남자 신부가 거짓말쟁이와 위선자로, 또 급기야는 아동 성추행범으로 지목되었다. 설교 등 언제나 주위 사람들에게 금과옥조와 같은 멋진 말과 교훈이 되는 애기를 따뜻하고 친절하게 해주는 신부를 아동 성추행범으로 지목한 사람은 바로 이 학교의 수녀 교장선생님인 알로이시스라는 사람이다.

교장은 증거는 없지만 플린의 과거 행적, 자신의 경험과 정황 및 상황을 종합해 볼때 플린 신부가 아동 성추행의 범인임을 확신하여 단언한다. 영화 내내 성추행범이라는 단어는 어느 곳에서도 드러나지 않는다. 물증이 없고 교장처럼 심증만 있을 경우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판단 할까하는 궁금증을 자아내는 영화였다.

플린 신부는 이 학교에 발령되어 배치 받은 이후 시대 변화에 부응하여 교회도 새롭게 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64년 당시 미국 사회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어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이 재조명되는 상황이었으며 월남 파병에 대한 저항 등 개인주의의 새로운 물결이 태동하는 시기였다.

그래서 플린 신부는 교장 알로이시스의 원리원칙과 교리주의의 엄격한 규율 및 공포로 다스려 지던 보수적이고 고전적인 학교의 모습을 시대 조류에 맞게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속칭 진보 주의자였다.

그러나 엄격한 규율과 금욕생활, 욕망의 절제를 철저히 준수해야 올바른 교육이 될 수 있다고 철석같이 그 점을 신봉하는 교장 알로이시스 입장에서는 학생들에게 따뜻하고 친절히 대하고 자유분방한 플린 신부의 행태에 대해서 당연히 못마땅해 보이는 듯 했다.

교장 알로이 시스는 선생님들의 수업 시간에도 반을 순회하며 학생들의 수업 태도를 감시하고 바람직하지 못한 학생은 교장실로 호출하여 반드시 교화를 하였다. 선생님들도 학교에 관한 사안에 대해서는 어떤 사안이든 스스로 결론 내지 말고 교장인 자신에게 사사건건 보고토록 한다. 가히 철의 여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그리고 학교에 관한 모든 책임은 교장인 자신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제임스 수녀에 의해 주도 되던 수업도중 도널드라는 흑인 학생이 플린 신부에 의해 사제관으로 호출이 된다. 또 수녀인 제임스에게 플린 신부가 캐비닛에 무엇인가를 은밀히 숨기는 것이 목격 된다. 숨긴 물건은 도널드의 내복이었다. 제임스 수녀는 플린 신부와 흑인 학생간의 이상한 낌새를 감지하게 된다.

제임스는 도널드를 불러 이러한 사실에 대해 추궁하나 원하는 대답을 시원하게 들을 수 없었지만 도널드에게서 이상한 행동과 술 냄새를 맡게 된다. 제임스 수녀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 성추행등을 의심하는 뉘앙스와 함께 교장인 수녀 알로이시스에게 보고(밀고)한다. 신부나 도널드가 남성인데 상호 호머(momer)라도 된다는 말인가?

제임스 수녀의 보고(밀고)를 통해 역시 자신의 의심과 틀리지 않았음을 직감한 알로이시스는 플린 신부와 대화를 시도한다. 본격적인 대화에 앞서 알로이시스는 차를 한잔 하면서 연말 크리스마스 행사 준비 등에 대해서 가벼운 대화를 하게 된다.

이때 플린 신부는 교회가 시대 상황에 발맞춰 변해야 된다는 주장을 거듭 한다. 학생들에게 금지 되었던 유행가도 부르게 하고 아이스크림도 먹게하고 캠핑도 장려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이 완고한 알로이 시스한테 먹혀 들리가 없다.

거기에 더하여 커피에 설탕을 세 개나 넣으라 하고 글도 만년필이 아닌 볼펜으로 쓰고 손톱은 길어도 깨끗하면 된다며 길게 손톱을 기르고 다니는 등 교장이 싫어하는 행동을 자연스러우면서도 태연자약하게 행한다. 교장으로서는 이런 플린 신부가 못 마땅해 하는 눈치다.

교장이나 교장 주위의 수녀들의 입장에서는 커피에 설탕을 타 마시는 것은 금욕적이지 못하다는 뜻으로 블랙커피를 마시도록 하고 있으며 볼펜은 만년필 보다 글씨체가 나빠진다 하여 사용을 철저히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깨끗하면 된다며 손톱까지 기르고 다니는 플린 신부가 교장의 성향으로는 당연히 못 마땅한 처사로 생각될 듯 하다.

몇마디 가벼운 대화 후 본론으로 들어가 흑인 학생인 도널드를 사제관으로 호출하여 무슨 일이 있었는지 플린 신부에게 추궁하듯 조사하듯 단호하게 캐묻는다. 단도직입적으로 왜 도널드와 술을 마셨느냐고 다그친다. 그러나 플린 신부는 도널드가 술마시는 것을 맥건이라는 사람이 발견했고 그로 인해 도널드가 신부를 돕는 일인 복사일에서 해고됨을 걱정하여 괜찮다고 말해줬다고 해명한다.

함께 동석한 순진 난만한 제임스 수녀는 플린 신부의 해명을 통해 도널드에게서 풍긴 술냄새에 대한 오해가 완전히 해소 되었다고 해맑게 웃는다. 반면 교장 알로이시스는 의심을 오히려 확신으로 바꾸는 눈치였다. 플린 신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한번 물은 개는 또 다시 물수 있듯 한번 거짓말을 하면 계속 거짓말을 하게 된다는 눈치다.

이렇게 플린 신부에 대해 의심이 가득찬 교장 알로이시스는 도널드의 어머니를 교장실로 불러서 의심이 가는 상황에 대해서 확신을 얻기 위해 상담을 진행한다. 도널드의 어머니는 도널드가 플린 신부의 따뜻한 배려로 흑인으로서 학교에서 동료들로부터 왕따도 당하지 않고 잘 지내고 있음을 말하는 등 도널드의 상황에 대해서도 잘 아는 듯 했다.

도널드가 이 학교에서 무난히 졸업만 해주기를 바라는 그의 어머니는 교장의 추궁성 상담과 질문에 못 마당 해하며 아들 문제에 대해서 증거도 없이 개입하지 말고 묻어 달라고 교장에게 역정을 낸다. 플린 신부와 자기 아들 문제에 신경을 끄라는 식의 주장을 펼친다.

남들과 다른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오히려 자신의 아들이라며 증거도 없이 상황을 키우지 말고 신부와 아들 사이의 상황에 대해 덮어 두고 무사히 졸업을 시켜 달라고 눈물로서 호소한다.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간절한 사랑과 소망이 담겨져 있는 것 같았다.

이 순간 만큼은 연기의 고수인 알로이 시스 역의 메릴스트립도 무명의 흑인 배우 밀러역의 비욜라 데이비스에게 밀리는 듯 했다. 두 사람의 대화 내용과 장면은 이 영화에서 멋진 장면중의 하나로 기억될 만 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두 사람이 대화 후 각각 헤어져 떠나는 길에 밀러의 경우는 뒤에서 많은 낙엽이 휘날리고 알로이시스의 경우는 앞에서 수많은 낙엽을 날리는 일진 광풍이 휘몰아쳤다. 밀러의 아들에 대한 현실적 판단과 알로이시스의 교육자로서의 도덕적 판단간의 입장차이가 얼마나 거리가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메타포(metaphor) 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흑인 학생 도널드의 어머니인 밀러와의 상담 중에서 교장 알로이시스는 본인이 알고자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나마 파악하는 소득은 얻었으나 한편으로는 교장이 밀러에게 본전도 못 찾은 대화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밀러와의 대화 후 다시금 교장은 플린 신부와 대화할 상황에 처하게 된다. "증거도 없으면서 무작정 사람을 아동 성추행범으로 몰아가지 말라, 그 확신이라는 것도 감정일 뿐이지 사실이 아니지 않느냐"는 플린 신부의 강하게 반론한다.

반면 "자신의 의심은 합리적 의심이며 증거는 필요하지 않다"는 알로이시스와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서로 고성이 오가는 한판 전쟁을 벌인다. 마치 사자와 호랑이가 죽음을 걸고 한 우리에서 싸우듯 치열한 언쟁이었다. 필립 시모어 호프만과 메릴 스트립, 두 배우의 메소드(method)가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역시 명 연기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밀리면 끝장이라도 되는 결기로 두 사람은 눈에 핏발을 세우며 한치의 양보도 없이 진검 승부를 가르는 듯 한 험악한 대화 분위기였다. 이 영화에서 진보적 사고를 지닌 플린 신부와 보수적 관점을 지닌 교장 알로이시스 간의 대화속에서 누가 옳다 그르다를 판단한다는 것은 영화를 보는 내 입장에서는 쉽지 않았다.

영화 속 어느 장면에서도 실제적으로 성추행 장면이 없는 가운데 플린 신부는 성추행범으로 오해를 받고 있으니 억울하고 분노에 치밀어 교장에게 고성으로 항변하는 것도 일리가 있어 보이고 나름대로 가치관과 경험 및 정황으로 플린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굳게 확신하며 의심하는 교장의 입장도 일리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어느 장면(scene) 하나도 의미가 없는 장면이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이 영화에서도 명장면이 많았고 특히 알로이시스를 중심으로 수녀들이 식사하는 모습과 플린 신부를 중심으로 식사하는 장면은 디테일하고도 선명하게 대비되었고 인상적이었다.

즉, 수녀들은 식사중에 대화 한마디 없이 침묵과 정적이 감도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하는 반면에 신부들은 자유분방하게 신변잡기에 대한 대화와 농담도 하며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식사를 하였다. 물론 어느 모습이 좋다 나쁘다라는 가치판단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식사 분위기 속에서도 한쪽은 남성들만 있고 한쪽은 여성들만 있으며 한쪽은 욕망을 속박하지 않는 듯 하고 한쪽은 금욕적이며 한쪽은 상대주의적이고 한쪽은 절대 주의 적이며 한쪽은 진보주의 적이며 한쪽은 보수주의적이고 한쪽은 열려있어 보이고 한쪽은 답답해 보이는 분위기였다. 진영이 짜여져 있는 느낌이었고 그 자체만으로도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그 바탕에 이러한 인생관과 가치관, 세계관을 걸고 싸우니 대화속에서도 승자와 패자가 결판날 수 없는 구조적 모순이 상호 내재되었다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그 식사 장면 하나로도 이 영화가 의미하는 메타포를 잘 표현해 주는 명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플린 신부의 추행과 거짓말을 철저히 확신하면서도 교장은 영화의 말미에는 수녀 제임스 앞에서 "의심이 들어요 그런 의심이 들어요, I have doubts, I have such doubts"라고 울면서 부르짓는다. 자신의 확신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 같았다. 또 자신의 의심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되었다.

사람들은 흔히 보이는 것이 사실이나 진실은 아니지만 보고 싶은 부분만 보는 사람도 많고 자신이 보는 부분만이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많다. 더욱이 확실히 본 것도 불편한 기억은 바로 지워버리고 믿지 않지 않는가.

생떽쥐페리는 어린 왕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마음으로 봐야 한다"라고 하였듯 진실은 보는 것이 아니고 아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에 몰입할수록 교장이 억지를 부리는 듯 하나 그녀의 의심이 진실이 아닐까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며 주저앉으며 외친 "의심이 들어요 I have doubts"라는 독백 속에서 과연 그녀가 의심하고 확신하는 것이 진실일까에 대한 스스로를 의심하는 것은 아닐까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아니 그녀가 신봉하는 교육관 인생관 세계관등의 가치관이 과연 스스로 확신할 수 있는가에 대한 자문자답이며 의심이고 고민인 듯 하였다.

설령 플린 신부와 도널드 학생이 호머로서 성적 유희를 자행했다 하더라도 성경이나 편협한 인간들의 도덕적 기준에는 부합되지 않을지라도 DNA 성향이 그렇게 태어난 것을 어쩌란 말인가. 신의 실수 일수 있을진대 신을 믿는 수녀로서 신을 탓해야 되는 영역은 아닐런지 끊임없는 의심이 솟구친다.

교장인 수녀가 그야말로 신에 가까이 갈수 있을 정도의 훌륭한 수녀 일수 있으나 자신의 의심을 의심하면서 그로 인해 신으로부터 한 걸음 멀어지게 되었다는 스스로의 자성과 절규 속에서 교장 알로이시스의 큰 성숙을 보게 되는 듯 했다.

이 영화는 필립 시모어 호프먼과 메릴 스트립 그리고 에이미 아담스와 흑인 여성 배우 비욜라 데이비스 등 소수 정예의 연기파 배우들의 등장으로 연기가 펼쳐진다. 또한, 무대도 교회라는 고정된 장소에서 의상도 시종일관 신부와 수녀복만을 착용한 가운데 음악이나 조명등의 영화적 배경없이 끊임없는 대화와 대립적 대화로 이어졌다.

의심의 대상이 될 만한 큰 사건 하나 없이 정황을 가지고 진행되는 일종의 심리극이며 탐정물적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재미있는 장면은 없어도 의미있는 영화였다. 그래서 단조로운 가운데에서도 과연 성추행이 발생했을까 하는 긴장감 속에서 몰입하여 감상하게 되는 영화였다.

그러나 거짓말쟁이 내지는 성추행범, 혹은 위선자로 의심받고 있는 플린 신부가 자신을 추궁하는 교장 알로이시스에게 "이 세상에는 말로 모두를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며 교장 당신의 이해를 뛰어 넘는 부분도 있음을 알아야 된다"는 말의 함의를 되새겨 보게 된다.

플린 신부와 알로이시스와의 사이에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았다. 플린 신부가 순수하고도 완전히 정결하다고도 할 수 없으며 남편을 전쟁에서 잃고 평생을 수녀로 살아왔으며 카톨릭 학교의 교장인 알로이시스 입장에서 미심쩍은 것을 그냥 덮어 두고 지나칠 수 있을수만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한편 매사가 명경지수와 같이 투명하고 공명정대하고 명명백백한 일만 있으면 그 또한 삶에 매력을 창출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삶과 인생 여정에는 뭔가 어렴풋하고 희미한 부분이 있을 때 또 다른 맛은 삶의 의미와 매력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도 생각해 보게 된다.

과연 검정색에서 백색까지 0에서 100까지의 명도가 있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의 회색까지 받아들이면서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명제를 던져 주는 영화 같았다, 어느 교수는 18%까지의 그레이한 부분은 늘 상존하고 있으며 수용 되어 져야 할 부분이라고 하나 일상에서 18%를 찾는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듯하다.

학창 시절 후 사회생활이 이어 지면서 연간 사용할 나의 노트 첫 페이지에는 늘 이런 글귀를 써놓고 일년을 시작했다 "의인물용 용인물의 疑人勿用 用人勿疑, 의심이 드는 사람은 사용하지 않으며 일단 사용하는 사람은 의심하지 않는다" 얼마나 내가 순진했던가 이제야 깨닫게 된다. 이렇게 선듯 선듯 나 자신에게 깨달음을 주니 영화 감상의 백미다.

오늘 날 우리 주위에서도 특정인의 사안과 관련하여 진영 논리까지 오버랩 되면서 정계 언론 방송계 전문가간 법조계 등에서 아니 공‧사석에서까지 어디까지가 의혹이고 의심이고 거짓 위선이고 진실이고 정의인지에 대한 논의가 어느때 보다도 뜨겁게 이슈화 되어 있다. 복합적인 사항들과 연계되어 더욱 가열차게 뜨거워 지는 듯 하다.

어쩌면 플린 신부와 교장 알로이시스와의 경우처럼 밀리면 천길 천애 절벽에 떨어져 죽게 된다는 결기로 싸우는 듯한 양상이기도 하다. 일단 논쟁에 올라가고 법적인 다툼의 링 위에서는 전쟁이다. 그 곳에서는 18%라는 ‘그레이의 법칙’은 설 땅이 없어지게 된다. 오직 흑과 백이 있을 뿐이다. 역사는 면면히 늘 정의의 편에서 언젠가는 결론을 내려왔듯이 시간이 지나면 결론에 이르지 않겠느냐는 나이브한 생각을 해본다.

이 영화는 물리적 사건이 없는 가운데 인간의 심리와 본성 등 감정선을 따라 가며 전개 되는 영화로서 그 분야에 문외한인 나로서 영화의 진맥조차 잡기 힘든 상황에서 감상후기를 쓴다는 것이 도전일수 있으나 도전은 늘 나의 취미이니 겁 없이 후기라는 글을 또 써본다.

지나친 확신은 독선과 아집에 빠질 수 있고 지나친 관용은 위선에 동조할 수 있으니 참으로 쉬운 것이 없는 듯하다.

실존주의 철학자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I think therefore I am’라는 말에 ‘나는 의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I doubt therefore I am’이라는 말과 함께 후기를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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