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연말이면 수십년간 국세행정을 주무르던 고위직들이 관복을 벗는다. 아마도 내달이면 지방청장급에서 최소한 2~3명, 세무서장급에서 십수명이 국세청을 떠날 것이다. 세무서장들 중에서는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근무 중이거나 나이 많은 고참들이 옷 벗을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국세청 고위직들의 탈관복이 매번 화제가 되는 것은 국세청만의 오랜 전통 때문이다. 4급(세무서장)이상 간부들의 경우 공무원법에 정해진 정년을 2년이나 앞두고 인사적체 해소라는 명분으로 후진을 위한 용퇴(명예퇴직)라는 이름으로 사표를 내고 야인으로 돌아가는 아름다운 전통으로 면면히 이어져 왔다.

그런데 이 훈훈한 전통으로 승진의 기쁨을 맛보는 후배들에겐 선배들의 용퇴소식이 더없이 반가운 일이지만 2년이라는 보장된 정년을 앞두고 먼저 우격다짐 사표를 던져야 하는 당사자들에게는 결코 해피한 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는 데서 ‘바로 잡아야 할 때’라는 지적이 수년전부터 거론되어 왔다. 선배들의 아름다운 용퇴로 나 역시 승진이라는 영예를 안았지만 ‘2년 먼저 승진하고 2년 먼저 퇴직’하는 전통에 대한 재론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2년 먼저 용퇴제도가 활기를 띈 것은 인사적체가 심각했던 1990년대였다. 당시에는 아예 국세청 감찰에서 세무서장들을 따라다니면서 뒷조사를 하고 티끌만한 실수라도 보이면 가차없이 명퇴를 종용하고 안되면 반강제적으로 옷을 벗겼다. 그런 와중에 감찰과 당사자간 티격태격 웃지 못할 일들도 많았다. 그러면서 당시 명퇴제도는 ‘강퇴제도’라는 말로 희화화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국세청의 청렴지수가 높아지면서 선배들을 강퇴시킬 명분이 약해지자 이제는 후진을 위한 아름다운 용퇴라는 이름으로 포장됐다. 선배들의 용퇴로 먼저 승진했으니 너희들도 후배들을 위해 ‘결심’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용퇴를 하는 면면이 고시출신보다는 비고시 출신들의 비율이 높아지면서 비고시 출신들사이에서 조금씩 아쉬움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행정고시 출신들은 승승장구하면서 최소한 지방청장까지는 한 후 명퇴를 하지만 비고시 출신들은 겨우 세무서장에서 명퇴를 해야하는 상황이 불만으로 쌓여온 것이었다.

물론 단편적으로 살피면 현재 서기관(4급)으로 승진하고도 세무서장 직위로 발령받지 못한 앉은뱅이 서기관들이 백여명을 훌쩍넘어서는 상황에서는 인사적체가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꺼풀 벗겨보면 이 인사적체는 행시출신들의 중용에서 나오는 적체라는 분석에서 비고시출신의 불만요소로 작용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현재 전국의 세무서장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나이가 가장 많은 서장이 61년생, 가장 적은 서장이 78년생이다. 둘의 차이는 무려 17년이다. 물론 나이 많은 서장은 비고시 출신이고, 나이가 적은 세무서장은 행정고시 출신이다. 즉 이런 갭엔 행정고시라는 시험제도가 존재한다. 그리고 행시에 합격해 그런대로 근무 연한을 채우면 대부분 순조롭게 4급으로 승진을 하면서 생긴 것이다. 그렇다고 78년생 세무서장이 능력이 모자란다거나 그 인사가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 역시 주어진 제도에 따라 열심히 공부했고, 또 국세청에 들어와서도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일해서 4급으로 승진했기에 지금 기관장이라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2만여 명의 국세공무원 중 99%가 비고시출신이라는 점이다. 이들의 생각은 이렇다. “행정고시만 합격하면 자연스럽게 4급으로 승진하고, 대충 일하는 것 같은데 대부분 부이사관은 물론 고공단과 지방청장까지 오르고 있다”라는 것. 그러면서 이들은 “우리에게도 기회를 주고, 빡세게 일을 시켜달라”고 한다.

일례로 이런 것이다. 국세청의 요직으로 불리는 국세청 본청 조사국에 국장을 비롯해 8명의 국‧과장 중 비고시 출신은 단한명이다. 철저한 행시중용의 한 단면이다. 과거엔 국장도 비고시였고, 불과 얼마전만해도 7명의 과장 중 2명이 비고시가 배치되는 등 고시와 비고시의 균형을 맞추어왔다.

과거엔 행정고시에 합격해도 세무서장으로 관복을 벗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 요즘에 정말 어쩌다 한명정도 나올까 말까한 현실도 비고시출신들이 명퇴제도에 내심 반기를 드는 이유로 분석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고시출신들도 마냥 좋은 것만도 아니다. 젊은 나이에 승승장구하여 지방청장까지 지낸 후 명퇴를 한다해도 ‘너무 젊어 졌다’는 문제가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작년에 이 우스운 명퇴제도로 관복을 벗은 김용준 전 중부국세청장, 양병수 전 대전국세청장, 금년에 그만둔 이은항 전 국세청 차장 등은 겨우 50대 중반의 나이다. 그리고 현 국세청장도 50대 초반이다. 인사적체가 아니라 과속인사다. ‘국가적으로 보면 인재의 심각한 손실’이라는 세평이 나오는 이유다.

올해 명퇴 신청 시한은 이달 말이다. 지금 세정가에서 세무서장으로 근무중인 61년~65년생, 특히 세무대학 출신들은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한다고 한다. 국세청에서 전화 왔다고 하면 혹시 운영지원과(인사계)에서 온 것은 아닐까 하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세무서장들이 혹시 명퇴를 종용 당하지나 않을지, 아니면 아예 명퇴를 결심하고 세무사 개업준비에 여념이 없다면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 아닐까.

국세청의 ‘2년 먼저 명퇴제도’ 켜켜이 쌓여온 적폐는 아닌지 한번 되새겨 봐야할 때다.

저작권자 © 세정일보 [세정일보] 세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