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명령을 받고 행한 행위에 대해서는 후회 하는 것이 아니다.(A man does not regret the act of being ordered)" ㅡ영화 그랜토리노 월트의 대사중에서ㅡ

▲ 석호영 세무사

영화 ‘그랜토리노(Gran torino)’는 1972년산 미국의 클래식 자동차 이름이다. 3년간의 한국 6.25전쟁에 참전하여 전쟁의 참화와 인명살상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주인공 월트 코알스키 (클린트이스트우드)라는 미국 꼰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역은 내용이다.

클린트이스트우드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듯이 서부 연극 시리즈나 서양 영화, 석양의 무법자등에 등장하는 대표적으로 멋진 총잡이, 석양의 건맨(Gun man)역의 주인공이다. 그가 이제 70대 중반을 넘어 주연 배우로서, 스스로 감독과 연출자로서 제작한 영화가 그랜토리노란 영화이다.

'꼰대'라는 말은 1960년대 에서부터 1980년대에 나이 많은 남자를 가리켜 주로 학생이나 청소년들이 어른이나 선생님들에게 사용하는 악의가 함축되지 않았던 일반적인 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근래에는 권위주의적이고 자기의 구태의연한 봉건적 사고 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변질 되어 사용하는 나쁜 의미를 내포한 세대 갈등을 표현하는 속어가 되었다.

'꼰대질'은 꼰대가 어떤 행위나 말을 행하는 것으로 나이가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자기의 경험을 일반화해서 고리타분 하고 낡은 사고방식과 생각을 아랫 사람이나 신세대와의 쌍방향의 대화나 소통없이 일방적으로 강요 하거나 시대착오적인 행동이나 설교를 하는 사람을 말한다.

반면에 "老馬之路(노마지로)"라든지 "노인이 죽으면 도서관 한 채가 불타 없어진다"라는 말도 있다. 나이든 분의 경험과 지식, 지혜가 때로는 요긴할 때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따라서 나이 들었다고 해서 요즘 기성세대와 신세대간의 세대갈등을 나타내는 꼰대라는 말로 모두를 일반화 하고 보편화 하여 어떤 틀, 프레임(Frame)에 가둬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분별있는 꼰대론의 지향이 필요할 듯하다.

사실 요즈음의 시대는 과거 느릿한 농경사회나 초기 산업사회에서는 백년 십년에 걸쳐 변화했던 사항들이 하루 아침에 바뀌고 몇 분 몇 초만에 변화하는 모습을 쉽게 접하고 볼 수가 있게 된다. '초고속 변화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첫 번째로 꼽으라면 IT기술의 발달일 것이다. 또 하나는 과거에는 대가족 제도하에 삶이 이뤄졌기 때문에 생활 속에서 가족간, 세대간에 자연스럽게 부딪히며 소통이 이뤄졌으나 핵가족화 되면서부터 세대간의 소통과 대화 단절이 심화된 측면이 있다는 생각이다.

한편으로는 과거에 비해 나이든 어른들에게서 배울만한 새로운 지식이나 경험이 그리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지식과 경험이 신세대들에게 더 이상 유용하거나 효용성이 떨어져 산 경험 혹은 산지식이 안된다라는 데에 방점이 있다 할 것이다.

신세대나 젊은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나이나 비교하고 예의 범절이나 따지면 "그들의 유일한 경쟁력은 나이나 예의를 강조하는 것"일뿐, 직방 꼰대 대열에 합류할 수 밖에 없는 시대 조류에 처해있는 것이다. 물론, 예의를 서로 갖춘다면 그 이상 아름다운 것은 없을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어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IT환경 등 신세대들이 새로운 지식을 광범위 하고도 깊게 습득할 수 있는 쉬운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케케묵고 녹슬은 골방의 먼지 낀 지식이 신세대들에게 먹힐리가 없다는 것은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

젊은 사람이나 신세대에게 권위주의적이고 시정잡배나 양아치적인 태도를 못버리고 언어 사용에 있어서도 '반말'부터 한다든지 의견이 다르다 해서 버럭 '화'부터 낸다든지 대화도중 박차고 나간다든지 아집과 독단으로 '반듯하거나 바르지 못한 엉뚱한 의사결정'을 한다든지 하는 것이 대표적인 꼰대질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점은 기성세대와 신세대간의 일상생활에서의 갈등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꼰대, 이념적인 꼰대, 혹은 인종적인 꼰대에서부터 종교적인 꼰대에 이르기까지 그 예를 찾아보면 다방면에 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현시대에 우리 주위에서 야기되고 있는 소위 보수, 우익과 진보, 좌파와의 첨예한 갈등도 서로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대화나 소통부재라는 측면에서 또 하나의 정치 사회적 꼰대 현상이 아닐까 느껴진다. 가히 '꼰대 포비아(ggondaiphobia)'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그랜토리노에 등장하는 주인공 월트 코알스키는 주위 사람들과는 단절의 벽을 높이 쌓고, 젊은 사람들의 하는 짓이 도통 마음에 들지않고, 하나뿐인 아들, 가족간에도 소통이 되지않아 소위 콩가루 집안이고, 세상 일에 불평 불만으로 가득차 있다.

매사에 언행이 완고하며 퉁명스럽고 거칠뿐만 아니라 거들먹거리며 냉소적이고 터프 하기만한 대표적 꼰대 할아버지다. 늘 미간은 못마땅한 것이 많아 찌푸려져 있고 눈은 눈동자가 있는지 없는지 보이지 않게 실눈의 모습으로 자신만의 테두리를 지키려 한다.

그의 아내, 도로시가 사망하여 성당에서 장례식을 치룬다. 젊은(27살) 신부의 설교중 "삶이 어떻고 죽음이 어떻고…"하는 말에도 어린 것이 공부는 했겠지만 인생을 알면 얼마나 알겠느냐는 듯 비웃듯 대하고 참여한 조카들의 옷차림이나 행동 하나 하나에도 못마땅하게 본다. 시선을 돌릴 때마다 이상한 것들만 보인다는 투다.

또 그의 아들은 일본산 외제차를 판매하고 외제차를 타고 다닌다. 40여년 동안 미국 포드 자동차에서 청춘을 보내고 잔뼈가 굵어진 월트, 자신이 소유한 그랜토리노까지 직접 제작하여 애지중지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아들의 그런 행동마저 아니꼽게 본다. "할아버지 돌아가시면 저 차는 누구에게 줄 것이냐"고 묻는 철부지 손녀도 마음에 안든다.

거기에 대표적인 미국 백인주의자로서 소수 동양족 멕시칸족이나 몽족 그리고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주의적 편견 또한 심한 노인네다. 그런 그가 백인이 주로 사는 지역이 아닌 소수 민족이 사는 지역에서 아내 도로시까지 세상을 떠난 상태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간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기 주위의 집안 일을 하고 유일하게 동거하는 개와 함께 맥주를 마시며 석양을 응시하고 자신이 가장 아끼는 애마 그랜토리노라는 자동차를 수리하고 그것을 자부심 넘치게 바라보는 것이 유일한 취미이고 일상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그가 6.25 전쟁 참전시에 몰려오는 수천명의 중공군을 향해 무참히 총격을 가하고 항복해 오는 17살 먹은 어린 소년을 삽으로 죽인 공에 대해 댓가로 받은 훈장을 아끼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그에게 있어서의 소확행(小確幸)은 그랜토리노와 훈장이 전부인 듯하다.

어느 날 그의 옆집에 몽족이라는 10여명의 대가족이 이사를 오게 되며 가족 중에는 타오라는 어린 소년과 수라는 타오의 누나도 함께 이사를 오게 된다. 타오는 시키는 일만은 잘하는 착하기는 하나 소심하고 내성적이며 주위 사람들과는 도통 어울리지를 못하는 외톨이 소년이다.

몽족의 깡패들은 월트의 멋지고 귀티 쫙 흐르는 그랜토리노를 손에 쥐기 위해 호시탐탐 노린다. 착한 타오를 꼬드겨서 컴컴한 밤중에 그랜토리노를 훔치려 하나 잠결이 예민한 월트에 의해 발각되어 타오는 36개 줄행랑을 쳐 목숨을 겨우 구하게 된다.

월트는 본능적으로 라이플 총을 들고 자기 영역에 들어온 침입자를 쫒으려 하나 무엇인가 발에 걸려 넘어 진다. 타오의 본성은 착하나 깽들의 성화에 못이겨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가게된 것 같다.

월트(클린트이스트우드), 지금은 힘 빠지고 맥 빠진 늙은 사자의 모습이지만 석양의 무법자로서 광야를 누비며 폭력에 대항하여 정의를 구현하던 역전의 일당백 노장이 아니던가. 그런 그에게 연약하고 소심한 타오는 상대가 될 수 없음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그랜토리노를 훔치는데 성공하지 못한 타오에게 몽족의 깡패들은 행패가 이만저만이 아니며 급기야 괴롭힘이 지나쳐 얼굴을 담배 불로 지지는 인치를 가하게 된다. 약자가 당하는 꼴을 못보고 사는게 월트의 삶의 캐릭터요 개념이 아니던가.

월트는 곧바로 그들을 찾아가 대표 한놈을 맨 주먹과 발길질로 초전 박살, 묵사발을 내 버린다. 완전히 뭉개버린 것이다. 깡패 두목도 늙었지만 역전의 노장한테는 아직 당하지를 못하는 것 같았다. 용감 무쌍하고 무자비한 노장이었다. 본래 "폭력을 행하는 자에게 자비는 없다"라는 게 석양의 건맨 정신 아니던가.

평생을 법에 호소하지 않고 폭력에는 폭력을 통해 동해 보복형으로 응징하고 자력 구제와 자기 방어로 정당방위를 하며 살아온 월트의 진가가 그대로 나타나는 현장 같았다. 월트는 몇차례 깽들의 거친 행동에 거친 말과 행동으로 기선 제압하여 위기에 처할 때 마다 타오 가족을 구해준다.

이 영화에서도 월트,클린트이스트우드는 서부 사나이의 캐릭터를 그대로 표출함으로써 유년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기승전결의 삶의 연속성과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즉 위기의 상황에서도 결코 경찰을 부르지 않고 자력 구제하였다. 총기 휴대가 가능한 미국사회의 특징이 아닐까도 생각 된다.

일련의 이런 사건 후 몽족은 월트를 영웅시하게 되어 그의 집 앞에 많은 꽃다발 등을 선물하게 되며 몽족의 맥주와 음식을 나눠 먹는 바베큐 파티에도 특별 손님으로 초대되어 자연스럽게 높게 드리워졌던 월트의 단절의 벽을 허물고 소통을 시작한다.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 존중함으로서 친구와 이웃으로서 공간과 시간을 교류하게 된다.

어떤 정신세계나 마음의 경계를 허무는 데는 동양이나 서양을 막론하고 胃(위)운동을 함께 하는 것이 주효할때가 있는가 보다. 그래서 음식은 생존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소통의 매개체나 촉매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할 때가 있는 것같다. 이 영화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자동차 도둑의 미수에 그친 타오는 가족의 권유와 강요에 의해 월트의 집에 가서 몸으로 빚을 갚을 상황에 처하게 된다. 타오는 월트가 시키는 일들을 소소한 일부터 난이도가 높은 일에도 근성있게 잘해낸다.

이런 타오의 심성과 태도에 월트는 그를 높게 평가하여 건설회사에 취직을 시켜 주어 배움의 밑천을 벌게 해주는가 하면 욕을 하며 남자답게 터프하게 사는 법도 알려 주는 등 힘없고 약하며 부적응 현상까지 있는 가냘픈 타오의 미래를 개척해 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애마 그랜토리노를 타오가 처음 데이트 할때 빌려 주겠다는 약속까지 한다. 이제 타오와 월트는 진정한 친구 내지는 가족과도 같았다. 사실 월트는 아들과 사이가 안 좋아 스스로 콩가루 집안이라고 하는 상황이다.

월트로부터 한방 먹은 깽들은 복수를 하기 위해 타오의 집에 무차별 총격을 가하고 타오의 누나에 대해서 폭력을 가하여 예쁜 여성의 얼굴을 만신창이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달아난다.

복수심에 불타는 타오를 보호하기 위해 감금하여 현장에 못오게 하고 이에 격분한 월트는 이발을 단정히 하고 생전 입지 않던 정장도 맞춰 입고 신부를 찾아가 고해성사도 하고 홀홀단신 그들에게 복수라도 할 듯이 허겁지겁 찾아간다. 깽들의 앞마당에 들이 닥쳐 복수를 하고 정의를 실현하듯 그는 의기있고 당당했다.

그는 복수에 앞서 고해성사에서 보트를 팔아 탈세를 하고 아들과 친해지려는 노력을 등한시 한 것을 말하였으나 6.25참전시 죽인 소년에 대한 반성이 가장 큰 것인 듯 했다. 과거에 대한 진정한 고뇌와 성찰이 아닐까 생각 되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는 그의 이미지대로라면 복수를 하기 위해 깽들의 행동에 대해 폭력에 대해서 폭력으로 정당방위나 자력구제를 해야할 듯 하나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살이라는 반전을 선택하게 된다.

과연 그 자살의 의미가 무엇일까?

그는 이미 각혈을 하는 등 가까운 시일 내에 죽음이 예정된 삶을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살을 결코 미화해서도 안되고 미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월트의 자살은 이 영화에서 만큼은 살신성인의 에센스요 백미가 아닐까 느껴진다.

우리는 때때로 중요한 순간에 중요한 결심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나이 들어서의 그 중대한 결심이라는 것은 자신을 희생, 죽음까지 포함하여 자라나는 신세대의 미래와 앞길을 밝혀 주기 위한 것이라면 더욱 거룩하고 숭고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주인공 월트, 그는 굳게 닫혔던 마음의 벽을 헐고 백인이며 자신의 아들이나 가족이 아닌 흑인 내지는 유색인종인 이방인인 몽족과 교류하고 소통하면서 자신의 외롭고 쓸쓸한 삶을 변화시키고 그들과 한때나마 행복한 공동체적 삶을 지향해 나간다.

그리고 그가 과거 살아온 경험을 토대로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소년, 타오의 앞길을 개척해 주는 희생적이며 의젓한 할아버지로 변모해 나간다. 꼰대 할아버지에서 누구나에게 환영 받는 멋진 할아버지로 변신 한 것이다.

그의 죽음 역시, 그가 살아온 방식, 즉 '폭력에는 폭력으로 응징하여 정의를 구현했던 삶의 행태'를 바꾸어 죽음이라는 극단적 처방을 통해서 폭력을 일삼는 깽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그러한 환경을 제거함으로써 미래를 살아갈 약한 소년, 타오와 그의 누나 수에게 살아갈 수 있는 분위기와 환경을 조성해 주기 위한 큰 배려가 아녔을까 생각해 본다.

한편으로는 한국의 6.25전쟁에 참전하여 이념이라는 푯대와 명분으로 참전하여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급기야 17세 어린 소년을 무참히 죽인 트라우마와 진정한 반성과 성찰의 댓가를 타오의 삶에 돌려 준 것은 아닐까도 생각 된다.

사실 월트에게 있어서 심연에 자리 잡은 가장 어두운 면과 심각하게 괴롭히는 트라우마는 6.25전쟁에 참여하여 살상을 한 것일 것이다. 신부는 그에게 "전쟁에 참여하여 살상한 것에 대하여 후회 하느냐"는 질문에 월트는 "남자는 명령에 의해 행한 행동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나 그것은 자신을 위무하기 위해 하는 정당화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또한 미국 사회는 다민족이 어울려 사는 국가로서 많은 민족들이 정치성향이나 이념적 스펙트럼이나 종교적인 점까지도 초월하여 인종 용광로, 즉 멜팅 폿(melting pot)을 통해 용해되어 일방적이 흡수나 강제적 통합이 용인 되지 않고 다민족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대표적인 국가이다.

월트의 행위는 약하고 소심한 타오라는 한 소년을 폭력이 난무하는 미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미래의 미국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 주고 징검다리를 놓아준 훌륭한 미국 주의적 정신의 발로가 아닐까도 감히 생각해 본다.

과거 자신이 살아온 경험과 트라우마에 대해서 깊은 고뇌와 반성과 성찰을 통행해서 미래를 살아갈 연약한 신세대, 타오에 대한 삶과 앞길을 밝혀 주고 개척해준 그의 삶이야말로 요즘 꼰대라고 질시를 받는 기성세대들에게 한걸음 멈추어 생각해 볼 수있는 기회를 주고 큰 경종을 주는 영화가 아닐까.

또한 월트가 포드 자동차 회사 근무시 스스로 제작하여 애지중지 아끼던 그랜토리노라는 멋진 차도 월트를 요양원에나 박혀 놓으려 하고 미국제가 아닌 외제차나 타고 다니는 그의 아들에게 상속하지 않고 이방인인 타오에게 상속을 시켜 준다.

가장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것까지도 진정으로 마음이 통하고 그와 함께했던 타인에게 상속함으로서 사해 동포주의, 즉 코스모포리탄이즘(Cosmopolitanism)의 구현과 반 종교, 인종적 편견을 엿볼 수 있는 휴머니즘이 용솟음침을 느끼게 한다.

또한 상속받은 그랜토리노를 몰고 해변을 신나게 질주하는 타오의 행복한 모습에서 자유와 평화, 그리고 해방감이 무엇이라는 것을 느끼며 마치 평소 드라이브를 좋아하는 나 자신이 그 해변을 달리는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느낄 수 있었다.

아집과 독선의 꼰대 할아버지 월트에서, 과거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 인종 차별과과 전쟁의 트라우마까지 극복한 유연성과 탄력성을 지닌 멋진 휴머니스트로 변하는 노련한 노장으로, 또 타오와 그 가족의 영웅으로 변해가는 크린트이스트우드의 아름다운 뒷모습이었다.

Gran Torino!,클린트이스트 우드!

"뒷모습이 아름다우면 그가 살아온 모든 인생 여정이 아름답다(A man is beautiful in all his life if the back is beautiful)" 라는 말이 더욱 크게 울려오게 하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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