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금성!

이 세글자로써 많은 설악산 봉우리 중의 하나를 일컫는 말인지, 문자 그대로 성(城)인지, 산의 정상을 이르는 의미인지 쉽게 구분이 되지 않는다. 성이라면 하필 공간도 없는 천애절벽의 산꼭대기에 세웠을까, 그러나 알고 보니 엄연히 성(城)의 이름 '권금성(權金城)'이란다.

▲ 석호영 세무사

고려말 난을 피해 권씨와 김씨가 단 하루 만에 3,500여m 길이의 성을 쌓아 가족의 피난 처로 축성되었다 한다. 하루만에 축성했다니 권세가 대단했던 듯하다. 그러나 폐허가 된 성벽 등 흔적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어떠한 흔적도 시야에 들어 오지 않았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10여분을 걸어 권금성에 오르니 탁트인 일망무제, 설악산 자락의 많은 봉우리들, 집선봉, 노적봉, 만물상, 장군봉 등이 코앞에 펼쳐지고 멀리 공룡능선과 마등령, 세존봉, 황철봉, 눈에 많이 익은 울산 바위까지 조망되었다.

1978년 사십여년 전 친구들과 처음 이곳에 올랐을 때는 날씨가 흐려서 주위의 경관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권금성을 중심으로 뿌연 안개인지 구름으로 산봉우리 들을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서도 구름 위에 서있는 기분으로 환상적이기는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오늘은 날씨까지 맑고 화창하여 설악산의 각 봉우리와 동해 바다까지 시야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야말로 남한의 명산(名山)답게 비경이었다. 두차례의 권금성 등정을 통해서 여행에서 날씨의 비중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설악산(雪嶽山)은 이름이 말해 주듯, 큰 산으로 기암 괴석과 암벽, 암봉 등의 바위 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하다. 사실, 필자는 설악산 하면 대청봉, 소청봉에 울산바위 정도로만 인식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봉우리들이 많은 줄은 처음 알게 되었다.

첨탑처럼 뾰족하게 쭉쭉 뻗은 봉우리들이 마치 수 많은 새들이 앉아 하늘을 향해 부리를 내밀고 설악의 아름다움, 권금성 쇠락의 운명, 아니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합창하고 있는 듯한 형상이다. 아름답기도 하지만 장엄하기도 하였다. 설악산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는 순간이었다.

대학시절 동기들과 백담사, 봉정암, 천불동 계곡을 여행하면서 한번 올랐던 경험이 있던 곳, 그러니 사십여년의 세월이 흘러 다시 찾게 된 것이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 했거늘 사십여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변화된 모습이 매우 궁금하기도 하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권금성의 모습은 변화된 것은 없었다. 권금성뿐만 아니라 설악산의 모습도 옛모습 그대로인 것 같았다. 사십여년이 지났어도 의구한 자연, 설악의 모습을 경외심과 함께 바라본다.

한 겨울의 모진 눈 보라와 삭풍, 그리고 온갖 풍파에 시달려도 의구한 자태를 간직하며 흐트러짐이 없는 자연에 다시 한번 존경과 감탄을 보내야 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에 비하면 필자 스스로는 많이 변했음을 느꼈다,

당시 파릇파릇한 푸른 청춘의 시절에서 사십여년이 지난 이제 은발의 중년이 되어 이곳에 돌아왔으니 말이다.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 칠정의 세월에 떠밀려 왔음 이리라.

그러나 여전히 마음만은 청춘이고 그때보다 젊다는 느낌을 갖고 있으니 비극인지 희극인지는 가름이 안된다. 자연은 반복의 세월 속에서도 제 모습을 잃지 않으나 반복의 세월 속에서 어느 인간, 영웅 호걸인들 필연의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코스를 거역할 수 있겠는가.

함께 동행한 친구들도 권금성과 설악의 비경에 마냥 즐거워하고 많은 감동을 받는 것 같아 더욱 기분이 업 되었다. 친구들과 필자는 유난히 코앞에 우뚝 서있는 만물상을 포함하여 이곳 저곳 동서 남북, 설악의 자태를 고루고루 눈으로 돌아보면서 권금성 여정을 카메라에 담고 눈과 마음에도 담으면서 만끽했다.

옛성, 권금성은 허물어져 고즈넉하기만한 빈터, 주인은 보이지 않고 나그네들만 서성였다. 아니 등산객, 관광객만 북적였다. 그러나 폐허에 서린 회포나 허무함을 노래하는 구슬픈 벌레 소리도, 초라하게 우거진 방초도 없었다.

다만 사방을 돌아보니 깎아지른 듯한 암벽과 깊은 골짜기, 심산유곡으로 사람은 물론 야생 짐승까지도 접근하기 어려운 천연의 요새 같았다, 권금성은 피난처의 성으로서 입지는 탁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권씨와 김씨, 그들은 지켜야 될 무엇이 있었기에, 혹은 무슨 잘못이 있었기에 외지고 하늘이 맞닿은 이곳까지 피난 왔어야 했을까. 한편으로는 성이나 피난처라기보다는 의식주가 차단된 막다른 산정, 진퇴양난의 험난한 곳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권금성 내의 암벽, 물도 영양분도 휴식을 취할만한 여유로운 공간도, 비나 사나운 바람을 피할 곳도 없는 아슬아슬한 절벽에 분재처럼 자라고 있는 소나무들을 바라본다.

아마 당시, 피난해 살아가던 권씨와 김씨들을 대변이라도 해 주는 듯, 그들도 낮에는 강한 햇볕, 밤에는 처연히 달빛만 고요한 외롭고 쓸쓸한 악조건에서 암울하고 피폐한 삶을 하루하루 지탱해 나갔으리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게 되었다.

그러나 권금성은 어엿한 설악산의 준봉으로서 관광객을 맞고 또 보내고 있었으며 필자와 친구들을 포함하여 그곳에 오른 어느 누구도 폐허가 된 옛 성터라는 것에 대한 인지가 없는 듯, 설악의 아름다움과 멀리 보이는 동해 바다를 조망하면서 관광객으로서의 여정과 감동을 만끽하는 것 같았다.

하산을 위해 다시금 케이블카에 오르는 순간, 산정 아래 먼발치에 신흥사의 극락보전과 일주문, 불이문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특히 세계 최대의 거대한 청동불 좌상(높이 14.6m)이 인상 깊었다. 다음 일정으로 신흥사에 직접 가보지는 못하고 눈에만 담아 왔다.

특별한 계획없이 친구들과 함께 불현듯 찾은 권금성, 설악산 자락의 봉우리들이 의외로 많다는 점과 설악산이 아름답지만 웅장함도 함께 지닌 명산(名山) 이라는 점을 크게 느낌은 물론, 무엇보다도 친구들과 멋진 감동과 추억을 쌓았다는 의미가 더욱 큼을 느낄 수 있는 여정이었다.

해발 고도 800여m 지점에 위치한 권금성, 다녀온지 일주일여가 지난 지금 이 순간, 권금성과 더불어 설악산 자락의 준봉들이 파노라마가 되어 그 여운이 뇌리에 뚜렸하게 와 닿는다. 또한 오래 오래 친구들과 필자의 가슴 속 깊숙히 아련하고 멋진 여정,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속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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