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호영 세무사

설악산(雪嶽山)자락 심산유곡,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백담사는 647년 신라 진덕여왕 때 자장 율사에 의해 한계사라는 이름으로 창건 되었단다.

그 후 여러 이름으로 전해져 오다가 1783년, 정조 때에 백담사라는 이름으로 개칭 되었고 그 후, 6.25로 소실되었다가 1957년 개축되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설악산 정상인 대청봉으로부터 백담사까지 100개의 담(못:潭)이 있는 지점에 사찰이 있다하여 백담사라고 한단다. 이 사찰은 유난히 불(火)과 친하여 일곱 차례나 화마로 소실되어 연못 담(潭)이 포함된 백담사라는 이름으로 했다고 한다.

백담사 입구, 용대리 버스 승차장에서부터 7km의 거리에 위치한 이 곳에 오려면 용대리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20여분 올라가야 한다. 미니버스 한대 지날 만한 좁다란 외길, 승(僧)과 속(俗)을 연결해 주는 신성한 길!

길옆에는 시냇물이 졸졸졸 소리 내어 흐르고 좌우에는 태곳적 원시림 같은 숲이 두텁게 울울창창 우거져 있다. 시냇물 소리에 장단이라도 맞추는 듯, 간간히 들려오는 산새 소리가 아름답고 청량하게 깊은 산에 울려 퍼졌다.

그야말로 맑은 계곡물, 맑은 바람, 맑은 공기, 맑은 햇살, 진초록의 녹음, 거기에 마음이 맑은 친구들과 함께하니 그 한 복판에 있는 것만으로도 필자의 마음 또한 맑고 고요해질 수밖에 없는 천연의 청정구역이었다. 간간히 들려오는 새들의 노래 소리 마저 청아하게 들려온다.

그러나 용대리 셔틀버스 승강장에서 백담사에 이르는 길은 꼬불꼬불 하고 오르락 내리락을 거듭하며 미니버스가 요동치고, 곡예 하듯 타고 오르니 아슬아슬 하고 스릴만점이었다.

사찰로 향하는 마음을 경건하며 고요히 하고 싶어도 고요해 질수 없게 한다. 속세를 등지고 수행하여 세속적 속박과 아집으로부터 벗어나 해탈(解脫)을 이루기 위해 가는 길이 그만큼 험난함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버스가 숲으로 이뤄진 아치 터널을 통과하니 때 이른 무더위지만 시원함을 안겨 주었다. 줄기와 잎을 키워 한줌의 햇볕이라도 더 받기 위해 서로 경쟁하여 무성해진 잎들이 시원함을 제공해 주니 아이러니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승(僧)과 속(俗)이 하나이고 너와 내가 하나라는 의미와 일심(一心)을 상징한다는 일주문(一柱門),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 있단다.

그리고 사찰 금당(金堂)에 안치된 부처의 경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수행자는 먼저 지극한 일심(一心)으로 부처나 진리를 생각하며 이 문을 통과해야 한단다. 함께한 친구들과 잠시 그 뜻을 음미해 보며 서로 일심(一心)이 되어 뜻 깊은 여정이 되기를 소박한 마음으로 소망해 보았다.

▲ 수심교

계곡과 계곡천을 가로지르는 일직선의 수심교가 백담사로 필자와 우리 일행을 안내한다. 수심교(修心橋),마음을 닦은 후 백담사에 들어오라는 뜻인지 백담사에서 마음을 닦으라는 뜻인지 알쏭달쏭하다.

그 수심교 위를 걷노라니 햇살이 유난히 뜨거웠고 수심교 밑을 흐르는 물 또한 명경지수와 같이 맑았다. 마음도 저절로 맑아짐을 느꼈다. 수심(修心)을 의도적으로 하지 않아도 주어진 환경에 의해 자연스럽게 수심이 되는 듯 했다.

수심교를 건너며 속세에서 쌓인 탐진치(貪嗔癡)와 번뇌, 그리고 복잡한 심경들을 다소나마, 아니 순간적으로 나마 흐르는 물에 흘려보내고 싶은 마음도 일었다. 아마 다소나마 흘러갔을 것으로 믿고 싶다.

수심교를 지나 금강문을 통과하여 불이문, 만해 기념관, 교육관, 극락전, 요사체, 나한전 등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화롭고 고요해 짐을 느낀다. 불교 신자는 아니더라도 분위기에 스스로 압도당하는 것 같았다.

▲ 돌탑들

백담사 경내를 돌아 본후 물이 흐르는 계곡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마치 백담사의 랜드 마크라도 되는 듯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돌탑들이 쌓여 있었다.

돌탑만큼이나 중생들의 소원과 소망이 많은 듯하다. 돌탑과 돌의 모양만큼이나 소망도 다양하리라. 뜨겁게 내리 쬐는 햇볕에 돌탑들이 유난히 빛을 발하는 모습을 보노라니 그들이 기원했던 소망 또한 광명을 받는 듯한 느낌이었다.

필자도 일행과 함께 우정과 사랑을 담아 정성스럽게 돌탑을 쌓았다. 수많은 돌탑들을 바라보면서 부처님 자비의 손길을 기다리는 중생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곳이었다. 필자와 친구들도 그 일원이 되어 각자 소망을 담아 정성스럽게 돌탑을 쌓아 올렸다.

예수의 사랑(愛),공자의 인(仁),부처의 자비(慈悲),모두 근본적으로는 사랑으로 귀결 될 것이니 소원과 소망을 기원하는 마음에 굳이 특별한 종교에 큰 의미는 부여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사내에 있는 백담 다원에서 십전대보탕과 대추탕 등 각자 기호에 따른 차를 주문하여 마시며 잠시 여독을 풀었다. 사찰에서 마시는 차이니 정성과 거룩함이 더욱 깃들여 있을 것 같았다.

어느 한 친구가 준비해 온 맛있는 구름떡과 싱싱한 바나나를 곁들이니 시장기까지 해결 되었다. 정성을 담아 준비해온 친구에게 감사한 마음이 깊게 들었다. 동시에 깊은 우정도 느낄 수 있었다.

차(茶) 마시는 주위에 눈에 띄는 문구가 시선에 잡힌다."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지 않는다"라는 짧은 시(詩)였다. 사실 요즘 초여름으로 주위는 봄을 아름답게 수놓았던 만화방초의 꽃들은 보이지 않는다. 시의적절한 문구이며 시(詩)였다.

만화방창(萬化方暢), 온갖 생물이 활짝 피어나는 모습을 보며 그 생명의 역동성과 화려함, 어떤 상대보다도 먼저 피어나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고 결실을 얻기 위한 피나는 투쟁의 모습에 우리는 매혹 되곤 하던 봄이 아니던가.

금년 봄이던, 멀리 지난 청춘 시절의 봄이던, 필자와 친구들과 지내 온 봄 나들이를 다시금 반추하게 하는 시(詩) 같았다. 어찌 봄꽃이 졌다고 그 찬란했던 봄날들을 잊을 수 있겠는가.

아니 사랑과 감동, 설렘과 전율, 그리고 희구와 경이를 선물한 그 멋진 봄날들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다시 한번 그런 봄날들의 아름답고 찬연했던 순간을 반추 해주는 시였다.

그리고 동행한 한 친구가 '인연설' 이라는 제하의 시를 필자에게 읽어 보라 한다. "깨끗한 사랑으로 오래 간직 할 수 있는 나는 당신을 그렇게 사랑할 것입니다"라는 문구로 끝을 맺는다.

일행들은 마치 필자의 목소리와 톤이 독경을 낭독하는 것 같단다. 그리고 필자의 시 낭송 소리 외 백담사에는 고요함과 그윽함 외에 염불 소리 혹은 독경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만해 기념관 내부에 일제 강점기의 독립 운동가이자 사상가, 시인이며 승려였던 한용운 선생이 형무소 수영 생활 할 때 내건 3대 원칙, 즉 1.사식 거부, 2.변호사 거부, 3.보석 거부라는 글을 보니 어느 독경 소리 보다 크게 심금을 울리는 것 같았다.

또한 한용운 시인의 재판 과정의 일화 중, 아래 내용을 읽어 내려가는 순간, 숙연해짐은 어떤 이유에서 일까. 필자와 동향(同鄕)인 한용운 시인이기에 더욱 깊은 울림으로 다가 오는 듯 했다.

재판장: "피고는 금후에도 조선독립 운동을 할 것인가?" 한용운: "그렇다, 언제든지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몸이 없어진다면 정신만이라도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

백담사의 운치와 풍광을 만끽한 백담사 여정,

그리고 만해 한용운 시인의 불타는 애국심과 민족정신, 의기와 의분의 만남, 깊은 뜻이 담겨있는 그 분의 시,

그 뜻 깊고 멋진 여정을 추억의 뒤안길에 남겨 두었다. 백담사에서 지었다는 한용운 시인의 역작 <님의 침묵>과 함께, 필자와 친구들의 뇌리에 아름답고 멋진 추억의 여운으로 오래 오래 남아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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