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누리’라는 아름다운 우리말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음에 가슴이 아려 온다. 한문인 割引(할인)이나 디스카운트라는 영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세태가 안타까운 현실이다. ‘에누리’는 할인이나 디스카운트라는 외래어에 비해 우리 국민의 정서에 닿아있다. 디스카운트에서 오는 값을 깎아 준다는 의미보다 인정을 나눈다는 절절하고 따뜻함이 묻어난다. ‘에누리’와 한 쌍인 ‘덤’도 빼놓을 수 없는 민족 정서의 한 조각이다. 에누리는 값을 깎아 주는 것이고 덤은 같은 값에 더 주는 것이다. 에누리와 덤은 지금도 우리 생활에 필요한 덕목이요, 존재 이유가 명확한 삶의 재미요, 인생의 낙이다. 에누리와 덤은 상술인가? 아니면 인정인가? 처음은 상술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오랫동안 상인과 소비자의 관행으로 자리 잡으면서 오고 가는 정이요 세상인심의 바로미터로까지 성장했다. 상술보다는 인정에 무게추가 넘어간 아름다운 인생의 양념인 정서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시골 영감 처음 타는 기차 놀이라/ 차표 파는 아가씨와 승강이 났네/ 이 세상에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딨어/ 깎아달라 졸라대니 어이구 내 팔자” ‘서울구경’이라는 대중가요 가사다. 1930년대부터 지금까지도 우리를 웃게 하는 노래다. 대중가요가 시대상과 삶을 대변하듯이 에누리는 우리의 삶 자체라 할 정도다. 덤도 마찬가지다. 못 깎아 주면 덤이라도 줘야 기분이 난다. 농경사회에서 공업화가 급속하게 추진되고, 제조업과 서비스업이 사회의 주류로 바뀌면서 서양의 문물이 무분별하게 유입되었다. 그래도 에누리와 덤은 사라지지 않았다. 에누리는 포인트 또는 마일리지로 개명했고 덤은 인센티브라는 멋을 부리며 바뀌었다. 편의점을 제외한 대부분의 마트(대형, 소형)는 계산대에서 포인트를 적립하는 것이 보편적인 행위가 됐고, 직장인들의 대다수는 자주 가는 커피집의 포인트 카드나 도장명함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국민적 감성과 정서에 기반한 ‘에누리’의 과세 여부와 관련한 연구가 이목을 끌면서 그동안 관련 판결을 보면서 다시 한번 ‘국민정서법’을 생각하게 된다. 지금까지 관련 판례도 일관되지 못하고 재판부에 따라 결과가 달라져 온 것이 결국 연구와 해결 과제로 등장한 것이다. 과거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2015두58959)은 포인트 사용분을 ‘에누리액’으로 보아 부가가치세 과세표준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부는 `17년 부가가치세법 시행령을 개정해 제3자로부터 보전받는 금액은 과세표준에 포함한다는 규정을 신설해 제3자 보전분을 과세 범위에 포함시켰다. 최근 서울고등법원(2024누57516)과 수원고등법원(2023누15045)은 유사한 ‘제3자 적립 포인트 정산’ 사안에 대해 정반대의 판결을 내렸다. 서울고법은 포인트 사용을 사전 약정된 할인이 맞다며 과세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한 반면, 수원고법은 카드사가 비용을 부담해 대금을 보전하는 구조라며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다.(본지 2026년3월20일 자 보도 참조) 이와 관련 국민정서법으로 보면 비과세가 답이다. 최근 연구 논문도 ‘포인트’에 대해 과세를 규정한 시행령이 잘못이라는 결론을 내놓고 있다. 포인트 적립은 전국민적 사항이고 금액이 천차만별이기는 하지만 개개인으로 놓고 보면 과세의 실익이 없을 정도이고, 대부분 0.3% 미만의 소액을 포인트로 적립해 주어 과세 대상을 확정하기도 너무 어렵다. “포인트 적립 금액이 수십 나아가 수백이면 문제가 다르지 않느냐”는 반론도 있지만 국민정서법은 비과세가 타당하다고 보인다.
세상은 천지개벽을 해도 우리 정서에 깊이 뿌리내린 에누리와 덤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음이다. 덤과 에누리는 우리의 민족적 정서에 굳건히 자리 잡은 불문법이고 어떤 성문법 보다 우선하는 것이 맞는다는 생각이다. 문서로 된 성문법은 헌법을 최고의 상위법으로 하여 하위로 일반법률과 특별법을 두고 시행령 시행규칙 형식으로 법체계를 갖추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성문법들은 정서법의 바탕 위에 최소한의 필요한 규정들이라고 봐야한다. 즉, 성문법이 변화무쌍한 모든 현상을 모두 정할 수도 없거니와 정확하게 개별 사례별로 구체적인 기술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법 해석이 필요하고 분쟁이 생겼을 때 이를 합리적으로 해결하고 조정할 법관과 판결이 필요한 이유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진실은 두 가지다. 첫째가 법관의 판결이 완벽하게 진실을 말하느냐는 의문이고 둘째는 국민정서법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이냐 이다. 판결의 진실성과 관련해서는 최근 정치적으로 국민적 합의가 모아지고 있는 법관의 판결에 대한 처벌까지 부상하고 있다. 과거에는 법관은 “양심에 따라 판결로 말한다”라는 대원칙 아래 1심 재판이 2심 재판에서 뒤집어져도 문제 삼지 않았고 최고권위의 3심인 대법원판결은 그 자체로 진실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법관도 사람인 이상 실수할 수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부정한 방법이 동원될 수도 있다는 감성이 힘을 받고 있다. 이제 법관의 양심도 재단의 대상이 된 느낌이다. 그 원인은 독자적으로 증거와 법리에 따른 판결을 전제로 “증거와 법리에 따라 양심이 시키는대로 최선의 판단을 내렸다”는 논리로 정치적 외풍에 휘둘리거나 권력에 굴종하여 왜곡된 판결을 일삼은 법원이 자초한 것이다. 부정한 양심은 처벌받아야 마땅하다. 그동안 너무나 권력 위에 잠자는 양심과 판결을 부의 축적 수단으로 이용한 사악한 법관이 자라는 환경을 만든 사법권도 견제받아야 한다는 당위성에 많은 국민이 공감한 것이리라.
둘째, 존재도 없고 근거도 없는 국민정서법이 무슨 효력을 인정하느냐이다. 국민정서법은 곧 양심법이다. 법 없이도 산다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가진 양심 즉, 선량한 마음으로 공동 번영을 위해 솔선하며 삶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상식이다. 조문도 없고 판례도 없다. 그런데 옳고 그름은 있다. 쉽게 말하면 다른 사람이 불쾌하지 않음이다. 오랫동안 우리가 살아온 방법이다. 우리 내면에 자리 잡고 의식을 지배하는 원동력이다. 어떤 판사도 내면에 심어진 정서에 기반하여 법 조항을 해석하고 그 정서에 혼돈을 초래하는 원인이 생기면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이름하여 국민정서법이고 정서가 행위를 지배하는 한 헌법보다 상위에 두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할 것이다.
판례가 절대불변의 진리도 아니고 사회 변화에 따라 바뀌어야 할 필요성이 높아지면 뒤집어져야 하는 것이 판례이다. 다만 판결례를 뒤집어야 할 때는 그만한 당위성과 국민 정서에 합당한지 살펴야 한다. 신중해야 한다는 의미다. 국민정서법을 무시했다가 권좌에서 쫓겨 난 사례가 적지 않다. “‘에누리’라는 게 고작 얼마나 된다고 과세 하느냐”가 국민의 정서이지 싶다. “다정도 병인 냥 하여라” 옛말이 생각나지만 ‘情(정)에도 세금 붙는다’는 말은 만들지 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