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민정부 이후 역대 국세청장

[국세청 홈페이지 캡처]
[국세청 홈페이지 캡처]

1993년 2월 25일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했다. 군사정권을 종식시킨 문민정부의 시작이었다. 당시 야당들은 3당야합이라고 했으나, 당시 김영삼·노태우·김종필 3자연합이 없었다면 문민정부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라고 반문하면 그 비판도 분명 옹색해 질 수 있다. 당시 3당합당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여당후보로 나서지 않았다면 또다시 군 출신이 여당 후보로 낙점되고, 당선되었다면 문민정부의 시작은 더 늦어졌을 것이라는 견해다.

한국 정치사의 굴곡을 넘어 대한민국은 그렇게 문민정부 시대를 맞았다. 많은 것이 바뀌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개혁의 화신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과감한 개혁조치들로 조선총독부 건물을 폭파시키던 한때 국민지지도가 90%를 넘어서기도 했다. 지방자치제 실시, 하나회 해체, 금융실명제, 부동산실명제, 공직자 재산등록 공개 등 수 많은 개혁조치들을 단행했다. 그리고 강력한 사정바람으로 많은 공직자들이 부정부패 혐의 등으로 구속되거나, 자리에서 물러나는 등 사정과 개혁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그러나 그러한 개혁조치에도 자본주의 파수꾼이라고 불리는 국세청의 수장은 바뀌지 않았다. 아마도 개혁조치들을 실행하기 위해 오히려 국세청이 필요했었다는 이야기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당시 국세청장은 추경석 씨 였다. 노태우 정부 때 임명(91년 12월)되어 1년 이상 재직 중이었다.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은 다시 새 정부 국세청장으로 그를 임명했다. 추 청장은 `95년까지 김영삼 정부의 국세청장으로 재임하면서 김영삼 정부의 수많은 개혁조치들을 뒷받침했다. 그는 김영삼 정부에서만 2년 9개월여를 재직하면서 적잖은 족적을 남겼다. 국세청의 많은 후배들은 그를 존경하면서도 ‘성공한 국세청장’이라고 부른다.

이어 `95년 12월 21일 임채주 씨(10대)가 다음 청장으로 임명됐다. `98년 3월 8일까지 임기였다.

임채주 전 청장은 국세청 최대 비리 사건으로 기억되는 이른바 ‘세풍사건’의 주역 중 한명이다. ‘김대중-이회창-이인제’의 대결로 치러진 `97년 대선 상황에서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의 동생 이회성 씨가 임채주와 이석희(국세청 차장) 등과 공모해, 대우그룹 등 24개 기업으로부터 166억7000만원의 대선자금을 불법 모금한 것. 임채주 씨는 재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됐다. 김대중 정부 첫 국세청장은 당시 서울국세청장으로 재직하던 이건춘 씨가 임명됐다. 충청도 출신으로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는 소위 실세가 아니었다. 정권의 실세 국세청장은 대통령과 동향인 경우가 많았듯이 당시 국세청의 실세는 차장에 임명된 안정남 씨였다. 그래서인지 이 전 청장은 겨우 14개월 만에 안정남 전 청장에게 바통을 넘기고 건교부장관으로 영전했다. 실세로 불린 안 전 청장은 23개 언론사에 대한 보복성 동시 세무조사를 단행하는 무리수를 두면서 지탄을 받기도 했다. 이후 건교부장관에 임명되었으나 부동산투기 혐의 등으로 단명했다.

이어 바통은 안정남 씨의 후배인 손영래 씨가 받았다. 그 역시 퇴임 후 법정을 오가는 등 부침을 겪으며 성공한 국세청장이라는 평가는 듣지 못했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이용섭 관세청장이 국세청장에 발탁됐다. 경상도 출신 대통령에 전남 함평 출신 국세청장이었다. 그는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친 첫 국세청장이었다. 소위 외부인 국세청장으로서 맘고생을 많이 했으나 청와대 수석, 행안부장관, 국회의원 등(현 광주시장) 승승장구했다. 그리고 어려운 시기 고생한 국세청장으로 불렸다.

그러나 그 역시 앞선 김대중 정부시절 이건춘 씨처럼 실세 국세청장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후 실세로 불린 이주성 씨가 임명됐다. 하지만 이 전 청장은 1년 3개월여만에 불명예 퇴직했다. 이어 임명된 전군표, 한상률 전 청장도 명예롭지 못한 퇴진으로 세사람 모두 성공한 국세청장이라는 소리는 듣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의 당선으로 정권이 바뀌었다. 3연속 국세청장의 불명예퇴진으로 국민들로부터 욕을 먹어오던 국세청은 또다시 외부인 청장을 맞았다.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으로 불렸던 백용호 씨였다. 이화여대 교수 출신으로 공정거래위원장에서 국세청장으로 임명됐다. 그는 1년여동안 위기의 국세청을 안정시킨 후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영전했다. 외부인이었지만 이용섭 전 청장과 함께 성공한 국세청장으로 불리고 있다.

백 청장 후임에는 당시 또다른 실세로 불렸던 이현동 씨가 바통을 이었다. 서울청 조사3국장에서 대통령직 인수위 파견, 국세청 조사국장, 서울국세청장, 차장을 거쳐 수장에 올랐다. 그러나 그 역시 퇴임 후 재판정을 오가는 등 여전히 고생을 하고 있는 처지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 들어선 박근혜 정부 첫 국세청장은 김덕중 씨였다. 국세청 4인자라고 불리는 중부국세청장직에서 곧바로 수장에 발탁되는 영광을 안았다. 그 역시 충청 출신으로 김대중 정부에서 안정남 씨가 청장을 맡기 위한 일정 기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후임 임환수 씨가 청장이 되기까지 1년 4개월여 기간동안 청장직을 수행했다.

박근혜 정부 두 번째 청장이자 마지막 청장이었던 임환수 씨는 무려 3년 가까이 청장직을 수행했다. 그리고 퇴임 후에도 대통령이 구속되는 상황에서도 뒷말이 나오지 않는 것은 물론 유명 회계법인에 몸담고 활동하면서 후배들은 그를 ‘성공한 국세청장’으로 부르고 있다. 이후 문재인 정부에서는 한승희, 김현준씨가 청장을 맡았으나, 아직까지 문재인 정부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에 대한 평가가 이르다.

국세청장들의 임기를 반추해 보면서 ‘성공한 국세청장’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경우는 국세청장 재직기간이 2년을 넘어서거나, 퇴직전후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은 경우인 것으로 나타났다. 그 중에는 외부인 청장(이용섭·백용호)과 강한 청장(추경석·임환수)이 동시에 꼽히고 있었다. 외부인 청장이라고 성공하고, 내부인 청장이라고 해서 반드시 실패하는 것은 아니었다. 윤석열 당선인이 차기 국세청장 발탁에서 참고해야 할 반면교사다.

어려운 시기 국세청장을 지낸 한 전직 청장은 국세청장은 임기가 정해져 있지 않으나 검찰총장(임기 2년) 등의 경우처럼 국회의 인사청문회를 거치는 만큼 2년 정도는 보장해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그만큼 발탁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라는 조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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