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의 재산권을 쥐락펴락하는 경제검찰이자 4대권력 기관으로 불리는 국세청의 수장은 2만여 세무공무원들의 인사권, 대한민국의 모든 기업, 개인 납세자들에 대한 세무조사권 등 아주 막강한 권한이 집중되어 있다.
반면 2인자인 차장은 어떨까? 차장 역시 청장처럼 딱 한자리 뿐으로 대단히 영광스러운 자리이며, 국세공무원이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직책이다. 그런데 국세청의 문화는 2인자보다는 1인자인 청장에게 모든 힘이 집중되는 게 현실. 그런 점에서 차장은 하는 일은 많은데 비해 권한이 많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실적으로 1인자인 청장의 눈치를 살펴야 하고, 청장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해서 처리해야하면서도 빛은 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또한 자칫 잘 난체 했다가 청장의 눈 밖에라도 날 경우 자리보전이 어렵기 때문에 보통 어려운 자리가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동안 국세청에는 1966년 초대 차장으로 김재덕씨가 취임한 이후 20여명의 차장이 임명되었다. 차장으로 재직하다 청장으로 승진하는 경우도 많았으나, 소위 얼굴마담 역할만 하다가 단명한 차장도 많았다. 국세청 초창기에는 대개 차장을 3~4년, 길게는 6년 넘게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최근 들어서는 청장으로 승진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단명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능력이 모자라거나 청장으로서의 끼가 없어서 청장이 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정치적 희생양일 수도 있고, 아니면 거기까지 올라간 것 만 해도 과분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지난달 10일 박윤준 전 국세청 차장이 21명의 역대 국세청 차장 중 마지막으로 국세청을 떠났다. 1년5개월 남짓 재직하던 김문수 전 차장의 바통을 이어 취임한 지 채 10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현동, 허병익, 한상률, 전군표, 이주성 전 청장 등의 경우 차장에서 곧바로 청장으로 영전하는 영예를 안았으나 박 차장의 퇴임은 김 전 차장과 함께 차장에서 청장에 오르지 못하고 아쉽게 공직을 마친 2인자 클럽에 이름을 올렸다.
전 정부에서 마지막으로 차장에 올라 새 정부에서도 손색없는 청장감으로 불렸으나, 행시 동기이면서 나이가 좀 많은 현 김덕중 청장에게 수장 자리를 내주고 공직을 마감할 수 밖에 없었다.
국세청 직위상 차장 아래인 중부청장이 수장에 임명되었으니 거기까지 오른 것에 만족하고 물러나 주는 게 도리인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나이 이제 겨우 61년생으로 아직 앞길이 창창하다는 점에서 국세청으로선 인재를 놓쳤다는 이야기가 오랫동안 회자되고 있다.
그는 평소 후배들로부터 검소하기로 소문난 선배 국세공무원이라는 평을 얻었다. 특히 그 흔한 골프까지 멀리하는 등 말 그대로 소박한 차장으로 알려져 왔다.
그는 행정고시에 합격해 젊음을 바쳤던 직장을 떠나면서 기관장이 아니라는 이유로 다들 하는 퇴임식도 생략하고, 길지 않은 퇴임사만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
그런데 지금 국세청에서는 그가 떠나면서 건넨 퇴임사가 국세청 후배들에게 오랜 여운을 남기고 있다고 한다.
옮겨 보았다.
| -박윤준 전 국세청 차장의 퇴임사 중 발췌- ‘과세여부를 검토하고 판단함’에 있어 합리성을 유지해 달라는 당부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말씀이지만 제 공직 과정에서 그러지 못했던 많은 분들을 보아 왔고 저 또한 그리 못했던 사례들이 적지 않았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또한 쉽지만은 않은 일 같습니다. 특히 이 문제는 ‘사람의 일관성이나 신뢰성’ 문제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저도 내일이면 바로 신분이 바뀌게 되지만, 결국은 세금에 관한 일로써 제2의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의 미래도 대부분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비록 처지가 달라짐에 따라 어느 정도 논리의 변화는 불가피하겠지만, 재직 시와 퇴임 후의 논리가 너무 바뀌게 되면, 그 논리 자체의 당부나 다른 사람들의 눈을 떠나 스스로 우습고 초라해 집니다. 그러지 않으려면 재직 시에 항상 ‘나의 과세논리가 객관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것인가‘를 자문해야 합니다. 그런 태도가 각급 과세처분 전반에 더욱 견고해 지면 소위 ‘전관예우’가 작용할 소지도 작아질 것입니다. -중략- |
국세공무원이 과세를 함에 있어 국세청의 힘을 믿고 ‘어거지 과세’로 납세자가 억울해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라는 지적으로 읽혔다. 그리고 후배들은 선배인 세무사들의 부탁(전관예우)에 흔들리지 말고 당당한 과세논리로 국세청의 과세에 국민들이 객관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그런 국세행정을 펼쳐달라는 준엄한 훈수로 들렸다.
그러면서 나 또한 납세자의 편에 설 수 있지만 ‘전관예우’가 아닌 정당한 논리로 납세자를 변호하겠다는 이야기로 전해왔다. 한 국세청 간부는 아직도 긴 여운으로 뇌리를 맴돈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