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은 시인
김서은 시인

   오래된 책 속에서 이승훈 교수님의 비누를 꺼내 본다 비누를 만지고 커피를 마신다 비누는 온화하고 커피는 부드럽고 미끌거린다 교수님은 침묵하고 계시지만 비누는 화장실에도 있고 책상 위에도 있다고 쓰셨다 커피를 마시면서 유리창을 반쯤 열고 사람들의 어깨 위로 옆 광이 스치는 것을 보셨을 거다 어디든 수북이 쌓여있는 비누 커피나 박카스로 바꾸어 목을 축이시지 않았을까 비누를 사러 상가에 갔다 한쪽 구석에 앉아있는 비누들 노란 옷 붉은 옷 어떤 비누는 핑크색 레이스를 달고 있다 비누를 사고 커피를 산다 비누마다 장르가 있는 것일까 달콤하고 비루한 연애 시의 종말 같은, 끈적거리는 비누를 주머니에 넣었다 오늘은 해가 길구나 비누야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볼까 콘서트가 열리는 해가 지는 그곳에서 헤비메탈 음악을 들으면서 헤드뱅잉이나 돌려볼래,
   안녕, 비누야
 

시인 박정원
시인 박정원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비누는 과연 어디 있는가.” 비누는 씨앗도 아니고 열매도 아닙니다. 한평생 틀에 가두지 않은, 비 인식의 언어를 버리고 시마저 버리고자 했던 이승훈 시인(1942-2018)의 존재하지도 않는 언어, 에오라지 ‘포스트모더니즘’을 추구한, 어찌 보면 선생님을 기리는 시입니다. 언어의 다의성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추구했던 시인, 자아를 성찰하면서 의식의 흐름을 정확하게 좇아가던 시인, 언어조차 파괴했던 시인, 아방가르드를 추구한 선생님의 암울함에서 벗어나 “명랑한 비누”로 승화시키면서, 김서은 시인이 또 다르게 시를 해체합니다.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구름 신발』(2024,시와세계)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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