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무에서 상속세 업무를 하다 보면 절세만큼,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과제가 있다. 바로 남겨진 가족이 다투지 않고 화목하게 재산을 슬기롭게 나누는 일이다. 그동안 납세자가 국세청에 상속세를 신고하는 과정이나 상속세 세무조사가 진행될 때 상속인들이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불편해하는 장면을 수도 없이 보았다. 준비 없는 상속 탓에 가족 모두가 신용불량자가 되기도 하고, 상속 분쟁이 장기간 진행되는 사이에 분쟁의 당사자가 세상을 떠나는 사례를 보면서 재산상속의 분쟁을 겪으면 형제자매의 관계는 남보다 못하게 된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재산상속의 분쟁 배경에는 시대 변화도 한몫하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는 예절과 윤리를 중시하는 교육을 받았고, 과거에는 장자 중심의 상속 관행이 강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가 동등하다는 인식이 널리 자리 잡으면서 분배에 대한 기준이 달라졌다. 여기에 사위·며느리 등 당사자의 배우자까지 개입하면 더욱 복잡해진다. 문제는 많은 가정이 부모 생전에 정리하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 치매나 신체적 변화로 사무처리 능력이 떨어진 뒤에야 혼란을 맞는다는 점이다.

해법으로 흔히 유언장을 떠올리지만, 현실에서 유언이 그대로 집행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자필·공정증서 등 형식 요건을 갖춰도 내용의 진위 다툼이나 집행 과정에 갈등으로 소송으로 이어지는 일도 많이 발생한다. 그래서 최근 주목받는 수단이 신탁이다. 생전에 재산을 신탁해 목적과 분배 기준, 관리 원칙을 명확히 설계하면, 사망 이후에도 안전하게 재산을 운용·배분할 수 있다. 특히, 가업을 특정 자녀에게 승계해야 하는 경우, 자녀 중 발달장애 등 취약한 자녀에 대한 보호가 필요한 경우, 손자녀의 교육·생계 등의 용도로 쓰게 하는 등은 신탁의 장점이 분명하다.

신탁 방식은 크게 둘로 나뉜다. 첫째, 상사신탁(신탁회사 등 영리기관 수탁)으로 전문성이 높고 집행력이 강한 대신 수수료가 발생한다. 둘째, 민사신탁(가족이나 전문가가 참여) 방식으로 비용 부담을 덜 수 있으나 설계와 감독 장치를 보다 정교하게 마련해야 한다. 어떤 방식을 택하든 핵심은 “분배의 원칙과 절차를 생전에 합의·문서화”하는 것이다. 잘 설계된 신탁은 유언의 의사표시 기능에 더해 지속적 관리·감독 기능을 갖춰 분쟁의 여지를 좁힌다.

유언과 신탁을 비교하면 유언은 작성이 간편하고 비용이 적게 들 수 있지만, 사후에야 효력이 발생해 집행 단계의 갈등을 충분히 제어하기 어렵다. 반면 신탁은 생전에 실행되므로 자산의 이전·관리·배분을 장기적·조건부로 설계할 수 있다. 예컨대, 가업 주식은 특정 자녀에게, 임대수익은 배우자의 생활비로, 손자녀 교육비는 필요시 분할지급하는 식의 다층 설계가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신탁의 가장 큰 장점은 분쟁 없는 상속에 있다. 숫자상의 균등만으로 평등이 담보되지는 않는다. 각자의 삶을 존중하는 기준을 미리 정하고 문서로 남기는 용기가 필요하다. 상속은 마지막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부터 시작해야 할 프로젝트다. 유언과 신탁, 그리고 투명한 소통으로 준비한다면, 남겨진 이들의 삶은 더 단단해질 수 있다.

[김완일 세무사 프로필]

김완일 세무사
김완일 세무사

△ 세무법인 가나 대표세무사
△ 주식평가연구원장
△ 한국재산신탁협회 부회장
△ 서울지방세무사회장 역임
△ 국회입법조사처 국민공감입법혁신위원 역임
△ 기재부 세제발전심의위원회 위원 역임
△ 행안부 지방세발전위원회 위원 역임
△ 국세청 재산평가심의위원회 위원 역임
△ 한양대학교 겸임교수 역임
△ 한국세무학회·한국세법학회 부회장 역임

저작권자 © 세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