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이 네 번 변하는 기간 동안의 길고 긴 국세공무원 생활. 그 세월동안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노(老)계장의 퇴임식이 어찌 서운하지 않으리. 

그를 떠나보내는 직원들의 모습은 아쉬움으로 눈시울을 붉히는가 하면 세무서 청사 바깥까지 따라 나와 꽃다발을 건네는 등 ‘아름다운 퇴임식’의 한 장면이었다. 

지난달 27일 종로세무서 대강당. 세무서장의 퇴임식도 그리고 과장의 퇴임식도 아닌 쉽게 보기 힘든 6급 계장의 퇴임식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퇴임식 자리를 만들어 준 세무서장과 과장들, 그리고 동료였던 계장들과 직원들에게 연신 감사를 표했다. 

1977년 2월 국세청에 첫 발을 내디딘 후 37년여의 국세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이날 공직을 마감한 문점규 종로세무서 부가1계장의 퇴임식이었다. 

그는 퇴임사를 통해 37년 긴 여정을 회상했다. 

국세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1979년 10·26 사태,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직접 겪기도 했으며, 그리고 1981년에는 같이 근무하던 동료들이 원하지도 않은 강제퇴직을 당하는 아픔을 지켜보기도 했다. 

1981년 국세청에서 실시한 부기시험에 2등으로 합격, 우수요원으로 발탁되어 광주에서 서울청(종로세무서)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서울에서의 생활은 동료직원들이 생각한 것처럼 무지개 빛 만은 아니었다. 

원천세 납부증명을 잘못 발급하여 타기관에 불려가 어려움을 당하던 직원, 악질적인 납세자로부터 괴로움을 당하다가 결국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직한 직원,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하여 상대방의 청부납치에 의해 테러를 당한 후 사직한 직원 등 여러 가지 사유로 국세청을 떠나게 되는 직원들을 바라보게 될 때마다 국세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것에 회의를 가지며, 국세청을 떠날까하는 생각을 가진 적도 많았다. 

무엇보다 자신이 겪은 어려운 일들은 지워지지 않는 사진 속 앨범처럼 더욱 선명하게 남아있다. 

국세청 부동산 투기조사반 근무시절, 상대방과 타협하지 않고 성과를 올리면서 자부심도 있었지만 반면 상대방으로부터 크고 작은 억울한 모함을 받은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던 기억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또 감찰팀으로 부터 강도 높은 조사를 받고 무고였음이 확인되어 무혐의로 처리된 사건에 대한 기억은 그 때의 억울함과 함께 지금도 어제 일처럼 기억에 생생하다. 

청량리 세무서에 근무시절, 밤 12시 가까이 일하다가 수위 아저씨로부터 “우리도 잠 좀 잡시다”라며 거의 강제로 쫓겨나다시피 하며 퇴근하였던 일도 새록 새록 기억으로 떠올랐다. 

법무과에서 근무하면서는 민사소송을 전담해 법정에서 판사들로부터 질책을 받기도 했지만, 심도있는 연구로 직원들 중에서 승소율이 가장 높았을 뿐만 아니라 매년 새로운 판례를 이끌어 내는 등 남다른 노력으로 서울고등검찰청장으로부터 민사소송 우수 소송수행자로 표창을 받았던 것은 잊을 수가 없는 일들이다. 

이러한 민사소송 실력을 인정받아 2005년도부터는 국세공무원 교육원 겸임교수로 추천되어 10여년 가까이 국세공무원 교육원과 관세공무원 교육원에서 채권자 대위소송실무, 사해행위취소 소송실무, 민사소송 실무 등을 강의한 기억은 더 없는 영광으로 남아있다. 

노 계장은 퇴임사를 마무리 하면서 “저의 인생 대부분을 보낸 국세청을 떠나지만 퇴직으로 인하여 국세청과 인연이 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며, "항상 국세청맨으로서 음으로 양으로 국세청과 함께 할 것"이라고 국세청에 대한 애정의 끈을 놓지 않았다. 

노 계장은 “선배들은 앞에서 후배들을 이끌어 주고, 후배들은 앞에 나간 선배들을 밀어줌으로써 우리 서로 따뜻한 인간애를 가진 국세청 맨이 되어 보길 기원한다”고 퇴임사를 맺었다. 갈채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그는 국세공무원으로서 서울에서의 첫 발령장과 마지막 발령장을 받은 특별한 인연을 가진 종로세무서에서 공직을 마무리 하는 ‘복 많은’ 노 계장으로 기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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