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세청은 법과 원칙에 따라 세무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역사의 씻을 수 없는 오점이자 국세청 최악의 사건은 단연코 ‘세풍(稅風)사건’이다.
`97년 대선을 앞두고 유력 후보였던 이회창 당시 신한국당 총재의 측근들이 국세청 이석희 차장 등을 통해 불법으로 선거 자금을 모금했다. 현대, SK, 대우 등 23개 기업으로부터 받은 대선자금이 166억3000만원이었다. 이 외에도 정치적 조사로 판명된 케이스가 있지만, 세풍사건과 함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촉발했다는 지적을 받고있는 태광실업에 대한 세무조사도 국세청의 대표적인 정치적 세무조사로 인식되고 있다.
그나마 가장 최근의 정치적 세무조사라고 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자금을 쫓기 위한 국정원의 작전명 ‘데이비드슨 프로젝트’에 국세청이 힘을 보탠 사건일 것이다. 물론 이 작전은 실패했고, 재판에 넘겨진 전직 국세청장 및 국세청 차장은 무죄를 선고받으며 혐의를 벗었다.
임환수 전 국세청장은 인사청문회에서 당시 사건들을 가리켜 “국세청장으로서 정치적 중립이 얼마나 중요한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밝히며 정치적 세무조사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지금의 국세청은 그렇게 과거 일들을 반성하고 국민 앞에 ‘법과 원칙에 따른 공정한 세무조사’를 약속했다. 그리고 국세행정에 대한 국민 신뢰를 높이고 청렴도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했다. 공정한 세무조사를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한 제도도 마련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감사관실 의무보고’ 조항이다. 이에 따라 국세공무원이라면 누구나 세무조사의 착수나 무마를 지시받았다면 감사관실에 보고해야 한다.
정치적 세무조사는 사라졌을까.
최근 대구지방국세청 조사국 팀장이 세무대학 출신 세무사로부터 부적절한 세무조사 청탁을 지시받았지만 감사관실에 보고는커녕 요구에 따라 감액을 해준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의무가 주어져도 이행이 안 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세무업계에서는 “조사팀에 세대 출신이 없으면 일이 되지 않는다”는 말도 횡행한다.
해당 조사국의 또 다른 조사팀장은 세무조사 업무에 경비가 많이 든다며 업체에 금품을 요구한 사실도 있다. 이후 해당 팀장은 조사 종결 후 업체에 대한 1900만원의 과태료를 깎아줬다. 이는 지난달 열린 전 대구지방국세청장 재판에서 ‘사실만을 말하겠다’는 선서하에 나온 이야기들이다.
지방청 한 곳에서, 조사국 한 곳에서도 이 같은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데, 전국에서 실시되는 연간 1만4000여건의 세무조사 중에 ‘법과 원칙에 따른 세무조사’는 과연 몇 건이나 될까. 전관 출신이자 대형 로펌 소속이었던 모 세무사는 “국장, 과장은 컨트롤할 수 있고, 국장은 같이 골프도 많이 친다”며 국세청 세무조사와 관련한 영향력을 자랑했다.
언뜻 보면 과거처럼 특정한 목적을 갖고 실시하는 정치적 세무조사는 사라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윗선의 지시로 정치적인 이유에 따라 세무조사가 자행되는 일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지금은 ‘조심하는 윗선’과는 반대로 ‘일선의 일탈’이 더 큰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난 정부에서는 부동산 대책을 발표할 때 국세청장이 참석해 얼굴을 비친 것, 유치원 개학 연기 관련한 정부대책 발표에 국세청장이 대동한 것 등을 두고 ‘세무조사로 압박하기 위한 의도’로 읽혔다. 이 역시 정치적 세무조사에 해당한다. 반대로, 소상공인 등에 대해서는 세무조사를 유예 또는 면제해 준다는 정책을 펼친 것도 일종의 정치적 현안에 따른 정책이라며 ‘정치적 세무조사’로 지적받기도 했다.
이번 정부에서는 대통령의 사교육 카르텔 언급 이후 대대적인 학원가에 대한 세무조사가 이루어졌다는 것, 바이든-날리면 발언을 보도한 mbc와 ytn처럼 정권에 비판적인 보도를 했다는 언론사 세무조사 등이 정치적 조사로 읽혔다.
이런 정치적 세무조사 문제는 지난 16일 강민수 국세청장의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도 하루종일 도마에 올랐다. 쌍방울, 네이버, 학원가에 대한 세무조사 등을 놓고 대통령의 발언 한마디에 국세청이 수일내에 세무조사에 착수한 것 아니냐면서 정치적 세무조사라고 쏘아 부친 것.
이에 강 후보자는 "어떤 업체이든 탈루 혐의가 있으면 조사에 들어간다"며 "정치적 세무조사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윗선의 의중이 어떠하든, 탈세가 있는 곳에 세무조사를 실시하는 것은 국세청 입장에서 당연한 일이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수록 더 엄정하게 시행해야 하는 것도 마땅하다.
하지만, 최근 법정에서 드러난 것처럼 빼줄 것은 빼 주고, 봐줄 것은 봐줘서 대충 조사를 마무리하는 것은 ‘정치적 조사’보다 더 악질이라 할 수 있다. 법에서 ‘중복 세무조사’가 금지돼 있기 때문이다. 적당히 조사가 마무리되면 해당 연도에 대해서는 또다시 조사할 수 없다. 한 번 조사할 때 ‘제대로’하는 것이 중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