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의 온갖 추한 작태와 세상에서 매일 보게 되는 고통으로 항상 내 머리속에서는 유리가 깨지는 것 같았다.” "When I saw the human being suffering everyday and ugly behavior in the world, it seemed that the glass broke in my head."

Green mile !

▲ 석호영 세무사

문자로만 보고 언뜻 상상해 보면 푸른 초원을 달려가는 마라톤 코스를 그려 볼 수도 있고 푸른 초목이 좌우에 잘 가꿔진 고속도로가 아닐까 상상 해볼 수도 있는 말이다. 그러나 그런 의미와는 수천 마일 동떨어진 의미로 사형 집행관과 사형수가 최후로 함께 걸어가게 되는 교도소 내의 "녹색의 복도"를 일컷는 말이다. 죽음의 마지막 길목인 것이다. 죽음만이 기다리는 사형수가 복역하는 감옥을"라스트 마일"이라 한단다.

주인공 톰행크스 (폴 에지콤)가 1935년 그의 나이 44세 되던 해에 미국 콜드 마운틴 교도소에서 교도관으로 근무하면서 사형수 존 코피와 경험했던 사연을 친구 알렌에게 경험담으로 들려주는 플래쉬 백 fresh back 형식으로 전개되는 영화다. 폴은 회상 당시 초로의 108세라니까 1999년도에 회상한 이야기일 듯 하다. 그당시 그때까지 생존했으니 꽤 장수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늘 죽음을 소원 하나 죽지 못한다. “누명 쓴 것을 알면서도 존 코피를 사형집행하고 아름다운 아내를 먼저 보냈으니 죄값을 치루느라 오래 살게 된다”며 영화 말미에는 “그린 마일이 멀기만 한다”고 한숨 짓듯 독백 한다. 요즈음의 장수 시대를 예언이라도 하는 듯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게 되는 장수는 곧 축복아닌 죄라고 외치는 듯하다.

영화의 형식은 다큐 같기도 하고 내용상으로는 종교적인 요소와 환타지적이고도 어쩌면 서구 영화답지 않게 동양의 샤마니즘적 요소까지도 가미된 듯 했다. 따라서 감상하는 내내 멘탈에 정확히 느낌이 오지 않았다.

휴머니즘적 요소도 있는가 하면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고 재단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던지는 영화인 듯도 하다. 철학을 이해하고 인간의 무의식속에 있는 내면과 본성을 이해해야만 영화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 주변에라도 얼쩡거릴 수 있는 좀 난해한 영화라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의 초반과 중반에 이르기까지 신장 2미터에 140킬로그램의 무게를 지닌 육중한 거구의 흑인 사형수이나 순진해 보이는 존 커피의 신통력 내지 영력에 의해 주인이 등장한다. 그는 폴의 요도염을 치료도 해주고 죽어 가는 쥐를 살려 내는 등 황당하고도 엉뚱한 행동과 그로 인한 기적과 같은 결과에 무슨 저런 쇼적이고 허구적인 영화가 있나하고 의아하게 생각들기도 하였다.

그래서 영화로서의 그레이드가 좀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중반을 지나 마지막으로 치달을수록 영화에 빠져 듬을 어쩔수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교도관인 주인공 폴과 죄수인 존의 관계에서 휴머니즘과 후렌드쉽이 짙게 품어 나오면서 점점 생각을 깊이 해야만 이해될 수 있는 영화임을 알아 가게 된 것이다.

교도소 내에서 인품이 훌륭하고 인간미가 철철 넘치는 교도관과 비이성적이고 다소 포악하고 악랄한 교도관, 그리고 살인죄를 지고 복역하는 사형수들의 온갖 작태의 군상을 보여주면서도 교도관 폴과 존 커피라는 특별한 캐릭터의 사형수를 통해서 핵심 포인트를 끌고 가는 영화였다.

그리고 존이 감옥에 갇히면서 “이 세상에서 일어난 일은 신만이 정확히 알수 있다”라고 외치는 흑인 사형수 존 코피의 독백 하듯이 알쏭달쏭 내뱉는 말은 영화 감상 내내 귓전을 머무는 언어였다.

그리고 무엇이 인간은 알 수 없는 영역일까에 대해서 궁금해하며 감상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인간이 인간을 단죄할 수 있는 것인가? 의 물음을 던지면서 사형제도가 내포하고 있는 한계와 누명에 죽어가는 존엄한 생명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계기도 되었다.

어쩌면 1935년 당시 미국에는 대공황 시대로 실업이 만연하고 경제가 피폐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인간의 삶 또한 삭막하고 거기에 미국 사회의 흑인에 대한 홀대와 차별과 편견적 병폐가 드러낸 백인들의 우월주의 인식을 영화를 통해 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에 뒷맛이 개운치가 않았다. 물론 주제와는 좀 거리가 있는 애기일 것이다.

영화는 톰행크스가 은퇴하여 시설 좋은 실버타운에서 교도소 동료였던 알렌과 영화감상을 하면서 어느 장면을 보고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서 밖으로 뛰어 나가는 상황부터 발동이 걸린다. 아마 영화를 통해서 교도소의 간수로 근무하던 당시의 경험이 불현듯 되살아났던 듯 하다. 나는 그 순간 그가 감상한 어느 장면에 과거의 고통스러웠던 트라우마가 연상되어 그런 상황이 되었을까 감상 내내 또 궁금한 점이었다.

폴은 콜드 마운튼 교도소 E 구역의 교도관이다. 요도염에 걸려 부인과는 덤덤하고 냉랭한 부부생활을 하지만 직장에서는 매우 성실하고 인간적이며 또 때에 따라서는 엄격하기도 하다. 교도소의 재소자들이 스트레스를 덜 받고 인간적으로 지낼 수 있도록 늘 배려하는 덕과 휴머니티가 가슴에 듬뿍 충만된 인물이다.

폴은 요도염으로 가끔 면도날로 살을 베는 듯한 아품이 엄습 할때는 쓰러지기까지 한다. 요도염이 그렇게 통증을 유발하는 병인지는 이번에 처음 알게 된 것도 조그마한 수확이라면 수확일 것 같다.

그리고 교도소 생활중 각기 다른 캐릭터의 많은 사형수들이 등장하는데 독방에 들어온 쥐를 잡아 쥐에게 서커스를 가르쳐 무료한 시간들을 달래는 놈, 교도소에서 교도관들의 뒤에서 갑자기 목을 조르며 폭행을 가하며 난동을 부리는 와일드 빌이라든지 오줌과 변을 싸질러 대며 잡지랄을 하는 놈, 입에 빵을 담고 있다가 교도관에게 내 품는 놈이라든지 어쩌면 악랄한 인간들의 내면을 그대로 표출되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죽어갈 놈들이니 무엇인들 두려우랴.

교도관들 중에는 역시 폴과 같이 인간적이고 순리와 대화로 문제에 접근 하는 교도관이 있는가 하면 퍼시라는 교도관은 죄수는 마치 동물보다 못한 놈들로 취급하여 죄수들에게 온갖 못된 짓을 다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 또한 인간들에게 있을 수 있는 본성과 내심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한 연출자가 의도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었다.

특히 본 영화의 핵심 포인트로 여자 아이 두 명을 죽인 살인죄로 입소한 흑인 사형수 존 커피는 거구에 말도 어둔하여 다소 저능아로 보인다. 그리고 사형수 이지만 어두운 곳을 싫어하여 그래서 교도관 폴은 그의 방을 희미하게나마 불빛을 밝혀주는 배려를 한다. 거구의 몸에 어울리지 않게 어둠을 두려워하는 겁장이다.

그리고 폴은 늘 그를 주시하며 불편함이 없도록 해준다. 사실 그는 저능아 갔지만 특별한 영력과 신통력을 가지고 있어 병을 고치고 죽어가는 쥐에게 생명력을 불어 넣는 등 교도소 내에서 가끔 기적과도 같은 신비한 영적 신통력을 발휘 하기도 한다. 그는 감옥에서 수형하면서 네 번의 신통력을 발휘한다.

첫째는 요도염으로 고생하는 폴을 완치 시켜 준다. 그리하여 폴은 요도염으로 인해 아내와 의무방어도 못할 정도로 소원했던 부부관계를 역대급으로 황홀 찬란하게 해낸다.

둘째는 감옥에서 사형수와 함께 기거하며 온갖 재주를 부리는 쥐를 악랄한 교도관인 퍼시에 의해 치명적인 상해를 입자 그 쥐를 재생시켜 주기도 하며, 셋째는 형장에서 처절한 사형 장면을 목격하고 시름시름 암으로 앓고 있는 여인을 쾌차시키기도 한다.

넷째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고 휴머니티가 넘치는 폴과 신통력을 공유 하면서 본인의 과거 행적을 사실적으로 폴의 뇌영상에 고백하듯 보여준다.

특히 존으로부터 영력을 쉐어한 폴의 두뇌 스크린에 두 여자 아이를 실제 살인한 자가 등장하게 된다. 결국 이 장면을 통해서 존은 살인자가 아니며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음을 암시해준다. 폴은 존이 살인죄를 저지르지 않고 누명에 의해 복욕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한다. “인간을 이해하고 상대의 진실을 공유한다는 것은 서로 염력이 통하든지 신의 경지에 이르지 않으면 어렵다”는 것을 말해 주는 듯 하다.

감독은 존에게 신인격을 덧씌워 의신화 함으로써 인간과 신의 존재로 부각하였던 것 같다. “신의 위치에서는 존이 무죄인 것을 알수있으나 인간의 입장에서는 알기 어렵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 되었다. 그만큼 인간이 엉터리이고 부족하고 비이성적이며 무지함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사형제도의 한계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을 스파키라는 전기 고문을 통해 온몸에 전기가 관통하는 고통과 함께 죽어가게 하니 말이다. 어쩌면 인간의 한계며 비극이다.

그렇다. 인간의 세계는 법으로 대부분 다스려 지고 다룰 수 있는 영역이 대부분 있는 듯 하면서도 그런 부분이 지극히 단편적이기에 준법정신을 강조하고 극악한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급기야 사형제도까지 존치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수많은 전쟁들이 법하고 무슨 상관이 있으며 중세 유럽의 종교재판에 의한 마녀사냥이 무슨 법하고 연관이 있으며 나치즘이나 파시즘이 무슨 법집행과 그리 가까우며 홀로코스트나 수많은 대학살 등이 법집행과 하등 관계가 있었을 것인가? 인간 개인의 본성과 집단 본성대로 역사는 기록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쩌면 사상과 이념과 체제라는 큰 덫에 의해 힘없는 개인은 매몰되거나 죽어 갈지도 모른다. 존은 형장에서 “사랑을 담보로 매일 수많은 사람이 세상 도처에서 죽어 간다”고 담담히 말한다. 다수를 위해 소수가 무력하게 희생되고 사랑이라는 큰 덫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것인가? 그것이 본인 일수도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억울하게 죽어간다는 의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미국사회는 대공황의 시대로 국가 경제는 어려워 졌고 인간의 삶 또한 피폐했던 상황으로 누명 쓴 흑인 한명의 죽음 또한 미국 다수를 형성한 집단의식에 그리 대수로웠을까? 그런 가운데에서도 폴의 인도적 처사는 미국이라는 사회에 한줄기 정의와 인간애가 흐르고 있음을 나타내주고 있었다. 어쩌면 이점을 클로즈엎 시키고자 한 것은 아니었까도 생각해 본다.

아니 우리 전체 인류에게도 똑같은 논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경제학에서도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라는 그레샴의 법칙이 있지만 정치나 종교 일반사회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 현상은 너무나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정의는 늘 진실이 수반 되어야 되겠지만 진실은 늘 정의롭게 대우받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지 않은가? 악과 선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 스파키가 존의 머리에 장치되기 전에 폴은 존에게 질문을 던진다. "주님 앞에 섰을때 왜 기적을 죽였냐고?"물으면 나는 어떻게 답해야 하는가?

이에 존은 "친절을 베풀었다"라고 답하라는 존의 말에서 교도소에 수감된 동안 폴로부터 인간적 대우와 친절과 배려를 받은 존의 고마움의 표시를 보게 된다.

그리고 누명에 의한 사형수이기는 하나 순순한 영혼의 소유자인 존은 죄도 없이 전기가 관통하는 스파키를 머리에 차고 억울한 죽음 직전에 마지막 말을 내 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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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이제 생을 끝내고 싶어요 전 지쳤어요.

비 맞은 참새 마냥 홀로 떠도는 것도 지쳤고
인생을 나눌 진정한 친구가 없는 것에 지쳤고

사람들의 추한 작태를 보는 것에 특히 지쳤고
매일 세상 속에서 고통을 느끼고 듣는 속에서 지쳤고

그래서 항상 머리 속에서 유리가 깨지는 것 같아요 머리 속에는 온통 유리 파편만 가득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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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고기에 으깬 감자국과 옥수수 빵 그리고 영화 한편이면 좋은 것 같아요" 사형 집행 전 존코피의 마지막 심정과 소박한 소원이었다.

108세의 폴이 왜 실버타운에서 동료들과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갑자기 밖으로 뛰쳐 나갔는가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 그린마일을 거닐며 나눈 존과 폴의 위의 마지막 대화 내용이 문뜩 살아났을 것이며 마지막으로 존과 함께 감상했던 바로 그 영화를 실버타운에서 보게 되었기 때문이며 아마 이 영화가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 포인트 일 것으로 생각 된다.

"인간이 인간을 이해 한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것이다"라는 말도 있다. 그리고 아무리 머리가 명석하고 똑똑한 변호사, 검사나 판사가 변론을 하고 수사를 하고 언도를 한다 해도 누명에 의해 감옥 생활을 하게 되고 누명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 많은 현실이기도 한 것이다. 똑똑한 사람들이 변론을 하고 수사를 하고 판결을 내려도 물리적인 죄 하나도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데 어떻게 복잡다기한 인간 내면을 이해한단 말인가?

"그린 마일"! Green mil~~~~~~~~~e

결국 폴이 노년을 지내고 있는 실버타운이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있는 듯 하지만 ‘죽음을 기다리는 마지막 관문으로서의 그린 마일’은 아닐까? 아니 온갖 고통과 난마들이 뒤엉켜 우리가 숨 쉬고 살아가는 삶의 여정, 그 인생길 자체가 결국 그린 마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죽어가는 존의 영상에는 “천국에는 억울하게 죽어간 캐티와 코라라는 두 소녀 그리고 인간을 즐겁게 해줬던 쥐 한마리 그리고 존 자신이 있다”는 말속에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답이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감상후기를 썼다 해도 이 영화 전체를 이해했다고는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 마치 코끼리의 한 부분을 더듬고 전체 코끼리 인양 표현하는 것과 같음을 떨쳐 버리기 힘들기 때문이다. 물고기의 비늘 한쪽, 편린을 이해했다면 다행이다라고 위안해 본다. 인간이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도 이런 것이 아닐지? 인간을 이해한다고 함부로 말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거듭 해본다. 그래서 나는 인간을 함부로 평가하지도 않는다.

살벌한 교도소 내에서 주인공 폴과 사형수 존코피와의 인간적 우정이 인상적인 영화였으며 난동을 부리는 죄수도 있지만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죄과를 반성하는 모습에서 삶의 방향에 대한 팁과 힌트를 얻을 수 있는 영화였다.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존 코피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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