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같은 인생에서 오아시스같은 삶 으로! Living in an oasis in the desert life!

▲ 석호영 세무사

몇년전 로스앤젤레스의 샌프란시스코에서 모하비 사막을 관통 하면서 네바다주와 아리조나주 유타주를 횡단 여행시 가이드는 "저 곳이 바그다드 까페란 영화를 촬영한 장소"라고 지목했을 그 당시만 해도 영화에 큰 관심이 없었던 나로서는 크게 반응 하지를 못했다.

바그다드 까페를 감상한 요즘 바로 그곳이 미국의 정신이 숨쉬고 있을줄 알았다면 더욱 인상 깊게 들여다 보았을 듯 하다. 황량하고 모래 바람만이 스산하게 불어대는 사막의 한 복판에 초라하게 서있는 바그다드 까페였다.

그저 바그다드는 이라크의 수도인데 왜 하필 바그다드 까페라고 명명했을까에 대해 질문 했을때 가이드는 그에 대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나의 엉뚱하고 생뚱맞은 질문이겠거니 하고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그러나 인적이 드물고 삭막하기만한 사막 한복판의 까페가 사업이 되겠는가 하는 의문만은 남았었다.

주지하는 바와같이 미국은 다민족으로 구성된 복잡하고 다양한 문화와 사연들이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나라다. 따라서 미국에 거주하려면 무엇보다도 조화(Harmony)를 이루지 않고서는 버텨 나가기가 쉽지 않은 나라다.

어느 나라에서 이민 왔건 어느 민족이든 미국이라는 용광로(Melting pot)속에서 녹아 미국인으로 재주조되고 재 태어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나라일 것이란 생각이다.

바그다드 까페란 영화에 등장 하는 인물들의 면면이 독일인, 흑인 ,인디언, 백인, 트럭 운전수, 사막을 배회하는 혈기 왕성 하고 젊은 청년들, 그리고 정처없이 떠도는 집시 여인과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노숙자 같은 화가 등 자유인, 아웃사이더 혹은 경계인 등 이방인들이 함께 모여 황막한 사막에서도 아름답고 조화로운 일상을 일궈 나가는 모습을 그린 영화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미국이라는 국가에서 녹아 미국인이 되어 가는 모습의 그 일단을 잘 표현 해주는 영화로서 요즘 어쩌면 이민족에 대한 강력한 규제 정책을 추진하는 미국 사회에서 다시금 각광을 받고 주목을 받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황량하기만 한 사막 한 가운데에서 마치 서부 개척 시대의 뉴 프런티어 정신과 행동의 단면을 보는 듯 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독일에서 건너온 아름답고 향기로운 마음을 지닌 여행객, 야스민이라는 여인과 까페 주인 브렌다라는 여인으로서 미시적이고 협의로 보면 페미니즘을 그린 영화 아니면 깨어진 가족(Broken family)에서 확장되고 재건된 가족(Extended family)에 대한 영화라는 평가가 더욱 정답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도 생각된다.

더 심플하게 애기하면 어느 낯선 이방인이 마음을 열어 자신을 내려놓고 헌신적 노력을 통해 불행하고 부조화된 바그다드 까페 주변의 일상적 삶이 조화롭고 행복한 삶으로 변해 가는 과정을 담은 영화라 해도 좋을 듯하다. 그러면서도 자유분방한 그들, 개개인의 깨알같은 연기를 통해 자유라는 진가를 보게 되는 듯 했다.

야스민은 독일에서 남편과 함께 미국의 대륙 횡단의 꿈을 안고 여행중이나 여행도중 남편과 무엇이 틀어 졌던지 싸우고 헤어져 남편은 차를 몰고 휙 떠나 버렸다. 남편으로 차인 듯 했다. 가없는 모하비 사막의 한 가운데에 버려진 야스민은 여권과 남편 백을 바꿔 들고 묵을 곳을 찾아 무작정 방황하던 중 바그다드 까페에 당도하여 삶에 찌든 브렌다라는 까페 주인을 만나 숙소를 정한다.

한편 까페 주인 브렌다는 나날이 일에 치이고 사람, 아니 가족에 치이면서 매일 매일을 버겁고도 지옥같은 일상을 보내며 매사 짜증과 불만의 목청만을 높이며 피폐한 생활을 한다. 삶에 이유도 목표도 없이 시끄럽게 소리만 지르고 하루 하루를 버텨 나간다. 사막에 위치한 까페 못지 않게 그녀의 삶 자체가 사막이다. 모래 바람과 아스라이 끝없는 광야만이 펼쳐진 인생 사막인 것이다.

시내에 나가 커피 보드 하나 사오지 못하는 무능력한 남편, 매일 피아노만 쳐대는 철딱서니 없는 아들, 며느리가 누군지도 모르는 어린 손자, 집에는 도통 있을 생각이 없는 듯 밖으로 남자들과 어울리며 무작정 놀기만을 즐기는 말괄량이같은 천방지축의 에너지 넘치는 딸, 그리고 의욕이라고는 찾아 볼수 없는 카우엔나라는 까페의 인디언 웨이터, 손님이라곤 간간히 사막을 횡단하는 트럭 운전수가 고작, 그리고 먼지만 날리며 대륙을 횡단하는 트럭과 기차의 굉음, 그 무엇 하나 브렌다에게는 희망적이거나 만족할 만한 것 없는 삶이 버겁고 지겹기만 한 상황이다.

급기야 브렌다는 맨발로 널브러져 나뒹구는 주변의 빈깡통을 주워 모으면서 남편과 대판 싸움이 벌어진다. 인내의 임계점이 폭발한 것이다. 제 역할을 못하는 남편에게 사자후와 같이 무능력함을 지적하며 몰아세운다.

남편은 "그렇게 긁어 대면 집을 나갈 것"이라고 말한다. "당장 나가라"라는 브렌다의 응수에 남편 살은 기다렸다는 듯이 차를 몰고 사막 저편으로 훌쩍 사라진다. 브렌다는 그의 차에 빈깡통을 마구 던지며 "우는 것도 아깝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가라고 했다고 무작정 나가 버리는 남편에 대해 내심은 야속하고 서운한 눈치다. 그러나 남편은 집을 나가기는 했으나 멀리 못가고 까페 근처에서 맴돌며 망원경으로 까페를 살핀다.

결국 독일에서 온 여성, 야스민은 남편으로부터 길도 없고 이정표도 없는 막막한 사막 한 복판에 버려 졌고 바그다드 까페 주인 브렌다는 무능한 남편을 내 쫓아 서로는 사막에서 누구에게 의지 할수도 없는 극단적인 상황에 내 몰리게 된 것이다.

여행 가서 남편을 버리고 온다거나 곰국 끓여 놓고 집 나간다는 여성이 있다는 애기는 들어 봤어도 사막 한 복판에서 저런 경우가 있다는 것은 처음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까르트르는 타인은 늘 괴로운 존재고 고통을 수반한다"했듯이 브렌다나 야스민에게의 남편이라는 존재는 타인, 아니 타인만도 못한 존재였을까?

결국 그녀들은 남편을 통해서 최악의 상황에 몰려 고통을 격고 있으니 말이다. 결혼은 오아시스가 아닌 사막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시장에서 까페에 필요한 식료품을 사온 브렌다는 까페 사무실에 널브러져 있던 쓰레기같은 집기 비품들이 치워지고 먼지만 자욱하여 엉덩이 대고 앉을 틈도 없던 그녀의 사무실은 물론 유류 저장탱크, 주변 간판들까지 말끔히 정리 정돈되고 깨끗하게 청소된 상황을 발견하고 총을 든채 금방 죽일 듯 난리를 친다.

브렌다는 이상야릇한 모자를 쓰고 희귀한 남성 옷만 방에 걸어 놓은 독일 여성 야스민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고 보완관을 불러 확인까지 시켰다. 그러나 "정당한 여권과 영주권을 지지고 있어 별 문제가 없다. 미국은 자유스런 나라다" 라는 보완관의 말을 듣는다.

브렌다는 야스민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은 상황이다. 야스민은 브랴브랴 버림을 받아 마술을 하는 남편 백을 들고 튀었으니 이상한 옷과 기재가 많을 뿐 여자 옷이 있을리도 없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브렌다는 "누가 맘대로 자기 사무실의 비품을 치우고 청소를 하면 일을 어떻게 하라고 그러느냐. 당장 원위치 시키라"라며 일갈 한다. 미운털 박히고 오지랍 넓은 야스민을 향해 하는 소리다. 아들이 고딩때 너절한 책상 위와 자기방을 청소했다고 왜 치웠나며 난리치던 장면이 순간 뇌리에 스쳤다. 야스민은 "나"라고 간단히 대답한다.

그리고 "깔끔하게 해놓고 편하게 사는게 행복한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 야스민이 한쪽에 쌓아 놓은 물건들을 원위치 시키려 하자 브렌다는 "그냥 놔두라"며 자기가 야스민에게 심했음을 깨달았는지 "자신도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라고 겸연쩍고 좀 미안한 표정으로 말한다.

꽁꽁 동여매고 닫혔던 얼음장 같던 브렌다의 마음 한켠을 슬쩍 여는듯 했다. 누구한테 친절한 도움을 받아본 경험도 없고 청결한 환경에 익숙치 못한 그녀에게는 야스민의 그런 행동이 당연히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정리 정돈 되고 청결하게 청소된 환경을 누가 싫어하랴.

야스민은 남편이 사용하던 매직 기재를 통하여 기술을 습득하여 바그다드 까페에서 마술 쇼를 보인다. 그리고 브렌다의 아들이 연주하는 음률에 취해 눈을 지그시 감고 감상하는가 하면 딸을 이해하며 함께 즐겁게 놀아 주기도 한다. 그들을 이해해주고 인정하며 다가가 주니 애들도 야스민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또한, 트레일러에서 노숙자와 같이 생활하는 허리우드 출신의 자유로운 영혼 콕스라는 화가의 모델이 되기도 하는 등 삭막한 사막의 까페 분유기를 윤택하고 웃음 넘치는 분위기로 반전 시켜 나간다, 인간 사막을 인간 오아시스로 변모시켜 가고 있는 듯했다.

야스민은 콕스의 모델을 하며 날이 갈수록 정장 차림의 모습을 란제리로 또 한쪽 가슴을 보이는 모델에서 두 가슴을 열어 제친 모습으로, 급기야는 실오라기 한날 걸치지 않은 누드 자세를 스스로 취해 준다. 아마도 소통하거나 친해지려면 겉치레를 내 던지고 먼저 조금씩 조심스럽게 마음을 열어야 됨을 암시라도 하는 듯 했다.

그러나 영주권의 유효기간이 만료된 야스민은 독일로 돌아가게 되고 그로 인하여 바그다드 까페는 또다시 음산하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주변 사람들은 수면제를 복용 후 덜 깨어난 표정으로 맥이 없고 무료하기만 하다. 활기찼던 까페도 브렌다도 아이들도 콕스도 사는 맛이라고는 전혀 없는 무중력, 무의욕 상태다. 도무지 일상이 돌아 움직이질 않는 것 같다.

그러던 어느날 독일로 귀국했던 야스민은 까페로 다시 돌아오게 되고 그녀의 농익은 마술 쇼와 친화력에 의해 바그다드 까페는 다시금 활기와 생기를 되찾게 된다. 또한 바그다드 까페는 라스베이거스 쇼보다도 유명세를 타게 되어 대륙을 횡단하는 트럭 운전수의 입소문을 타고 대 성황을 이루게 된다.

말끝마다 신경질적이고 몸과 정신은 나날이 피폐해져 가던 브렌다도 야스민과 손님,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쇼와 노래를 부르는 등 지상 낙원같은 천국이 전개 된다. 매일 매일 음악과 춤이다. 그리고 야스민의 매직 쇼로 삭막하고 살벌하기까지 하던 까페에 웃음만이 가득하다.

또한 집을 나갔지만 늘 까페 주위를 맴돌며 망원경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남편 살도 돌아와 브렌다와 뜨거운 포옹을 하며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브렌다도 남편을 뜨거운 포옹으로 맞아 준다. 콕스의 모델이 되었던 야스민은 영속한 영주권이 필요하지 않느냐며 너스레를 떨며 자기와 결혼을 청혼하는 콕스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별 대사도 없이 란제리를 입고 또라이처럼 여기 저기 끼웃거리며 바그다드 까페의 변모해 가는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노숙의 집시 여인은 모처럼 정장차림과 함께 한마디 말을 남기고 사막을 향해 유유히 떠난다. "Too much hamony" 너무나 조화롭다는 의미일 것이다. 조화롭게 사는 것에 질투라도 하려는 것인가.

이렇게 바그다드 까페는 사막중의 사막에서 사막을 떠돌고 여행하는 모든 사람들, 이방인에게도 즐거움과 행복이 넘치는 오아시스로 변했다. 짚시 여인의 말처럼 조화롭고 화합하며 사는 모습의 지대가 된 것이다.그런 인간 오아시스가 되기까지 어떻게 마음의 문을 열고 조화를 이루며 행복하게 살 것인가를 웅변해 주는 영화같았다.

야스민과 브렌다는 그 어느것 하나 닮거나 유사한 점이라고는 찾아 볼수 없는 관계였다. 피부면에서는 백인 흑인, 성격도 적극적 소극적, 낙관적 비관적, 친절 불친절, 몸뚱아리는 뚱보 홀쭉이, 무자식 다자녀 등, 다만 남편으로 부터 버림 받았거나 남편을 내 몰아서 사막에 덜렁 남아 있는 것외는 도무지 비슷한 점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점은 상징적이기는 하나 이렇게 다민족 다종의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미국이라는 사회와 그 국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미국적 용광로에 녹아 미국인으로 다시 태어나 마음의 문을 열고 조화롭게 살아야 됨을 역설하는 영화같기도 하였다.

유유상종, 끼리끼리 모여 사는 것보다 다채로운 사람들이 조화를 이룰 때 더욱 굳건한 힘이 나오지 않나 생각 되었다. 미국이라는 국가가 그렇게 성립되었음을 암시하는 듯 했다.믿거나 말거나다. 미국뿐 아니라 어느 조직이나 가정인들 다르랴.

그러나 어느 가정이든 조직이든 간에 한 사람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우쳐 주는 영화임과 동시에 동일한 악조건의 환경에서도 어떠한 자세로 삶에 임해야 되는지를 아울러 대변해 주는 영화로 오래 오래 가슴 한 켠에 여운으로 자리 잡아 남을 것으로 생각 되었다.참 향기롭고 좋은 영화였다.

Let's make our home harmoni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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