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길 33년…초심 잃지 않고 한결같이 ‘고객보호’에 최선
화합의 달인…“32차 가을대회 회원 가장 많이 참석해 뿌듯”

“70명이 공동집필한 ‘여성세무사들의 세금이야기’출간 보람”
새둥지…서초구 법원로1길11, 금구빌딩 503호 “놀려오세요”

 

“바다는 외로움을 감당 못해 파도를 잉태합니다. 그 파도는 억겁의 세월을 살아온 바다를 위로하느라 언제나 무희처럼 춤추고 노래하며 포말로 분화합니다.

여성세무사 외길 33년을 살아오면서 우리네 인생살이가 언제나 철썩이는 파도를 닮았다고 생각해 봅니다. 30년 넘는 세월 쉬지 않고 달려온 세무사의 외길인생, 납세자들을 위해 얼마나 좋은 일을 했나 라고 자문해봅니다. 세정일보가 ‘레전드&담’이라는 주제로 인터뷰를 제안해왔습니다. 나 자신을 성찰해 볼 수 있게 됨을 무한 감사드립니다”

여고시절 문학소녀로 작가가 꿈이었던 그녀는 작은 교육도시 경남 거창(거창읍 상동)에서 태어났다. 어쩌다 작가의 꿈을 접고 여성세무가가 됐지만, 한 번도 세무사란 직업에 대한 후회는 없었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삶이었다고 술회한다. 그가 바로 1300여명의 리더 김옥연 세무사이다. 하지만 개업 초창기에는 외로움에 떨고 두려움에 떨며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 시절을 반추해보면 추억으로 간직하기엔 너무 힘든 세월이지만 긴 세월 노력한 만큼 보람을 영위할 수 있어 지금은 행복하다고 했다.

‘김옥연 세무사사무실’간판을 3번째 옮겨 단 곳이 서울시 서초구 법원로1길 11, 금구빌딩 503호. 집무실이 깔끔한 성격만큼 예쁘게 꾸며져 안정감을 더한다. 사통팔달 교통이 너무 좋아 만족스럽다고 했다.

그녀를 보면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는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란 시구가 떠오른다.

2년 임기의 한국여성세무사회장도 6월말로 끝난다. 재임기간 1300여명의 여성회원 리더로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그의 세무사의 삶과 인생철학. 유년시절의 기억들을 되짚어봤다.
 

◆ 유년시절의 기억

-작은 교육도시 경남 거창군 거창읍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는 누구나 비슷한 환경이라 가난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다. 초등학교에서는 점심시간에 노란 강냉이 죽을 나누어 주었고 때론 하얀 우유죽도 주었다. 읍내에 학교도 2군데 밖에 없어 교실부족으로 인해 2부 수업을 하였고, 한 반의 학생수가 70명을 넘어 그야말로 콩나물시루 교실이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도 한반에 70명으로 7반이 있었으니 졸업생만 500여명, 한국 농촌의 베이비 붐 세대가 그랬다.

그래도 그 시절이 잊히지 않는다. 지금 생각해보면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가 한 걸음에 달려갈 거리이었는데 그 때는 꽤나 멀어보였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눈이 발목까지 올라오고 교문 턱이 그렇게 높지 않은데 그 때는 왜 그렇게 높았던지. 아마 병아리 같은 어린 동심의 탓인지도 모른다.

입학통지를 받고 느티나무 아래서 같은 색깔의 리본을 단 학생들을 기다리던 초등학교 입학식이 제일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교실은 흙바닥이고 일자의 식탁에 8명 정도 사용했는데 높은 것은 책상이고 낮은 것은 의자였다.

겨울에는 교실 한가운데 있는 난로에 나무토막을 넣어서 겨우 추위를 막았고, 여름에는 초가지붕에서 비가 줄줄 새기도 하였다. 흙바닥 교실은 몇 년 더 지나서 나무 바닥으로 바뀌었는데, 너무 오래된 50여년 전의 일이라 기억이 가물거리기도 하다.

그 때는, 초등 6년을 졸업했다 하여 누구나 가는 중학교가 아니었다. 아직도 감사한 것은 6학년 김일원 담임선생님께서 무상으로 과외 수업을 받게 해 주셨고, 3년 내내 학비 없이 중학교 생활을 할 수 있게 장학생 기회를 제공해 주시고 입학선물로 교복까지 주셨다. 덕분에 나는 우수한 성적으로 남녀공학의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 당시 고등학교에는 양잠과도 있었다. 양잠과는 가내공업 누에고치를 길러 비단 짜는 일을 배우는 학과인데 이런 과가 있었다는 걸 요즘 아이들은 생각조차 할 수 있을까.

내 삶에서 도약의 디딤돌은 고등학교 3학년 가을쯤에 일어났다,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입사 1기생을 모집한다는 신문 공고가 나왔는데, 나는 그때 울산이라는 도시가 있다는 것도 몰랐었다. 손윤일 담임선생님은 거창에서 울산까지 무려 8시간이 더 걸리는 길을 마다않고 가셔서 회사의 입사지원서를 직접 받아 오셨다. 몇 명이 시험을 쳤고 합격하였다.

나의 첫 직장이 세계 최대의 배를 만드는 회사가 되었고, 그 당시 여의도만한 배를 만들어 진수식을 갖는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큰 축복이었다. 육영수 영부인이 오셔서 첫 배에 대한 명명식을 하셨다. 바구니에서는 비둘기가 날아가고, 그 장중한 배가 물위에 뜨는 것을 보고 감탄하였다. 나의 어린 시절은 이렇게 흘러갔다.
 

◆ 세무사가 되기까지

눈만 뜨면 공장이 생기고, 회사가 생기고, 무한히 성장하는 시기에 온 몸으로 산업발전을 체험하였다. 계속적으로 회사가 탄생하니 승진도 빠르고 눈코 뜰 새 없이 기업이 돌아가고 있었으나 여성에게는 기회가 없었다. 당시에는 결혼과 동시에 회사를 그만두는 것은 당연하고, 승진조차 없는 게 직장여성이었다. 가장 좋다는 금융권 직장에서도 결혼과 임신을 숨기며 사회생활을 했었고 거의 25세만 되면 결혼하는 풍습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사회이고, 그것이 여성의 현실이었다.

난 이러한 현실을 벗어나고자 무언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의 꿈은 끝까지 하이힐을 신고 일하는 모습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런 상상을 늘 해 왔었다. 그 중심에는 내가 맏딸이라는 것도 작용을 했다. 난 사무실에서도 끊임없이 공부하였고, 1976년2월에는 혜화동에서 관악으로 이전한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서 대학 졸업식을 할 수 있었다. 서울대학교 부설 한국방송통신대학이었다. 나의 두 아들이 그곳에서 졸업했는데 난 그보다 37년도 더 전에 먼저 졸업했던 것이다. 일 하면서 틈틈이 대학 공부까지 해내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나 자신이 자랑스럽기도 하다.

그 후에 울산에서 서울 현대건설로 전출되어 올라오게 되었고, 한시도 쉴 줄 모르고 자기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서울 사람들의 모습에 큰 자극을 받아 나 자신을 가다듬게 되었다. 세무사시험에 도전하게 된 계기는 현대건설 재정부에 근무하면서 세금업무에 대한 것을 조금 알게 되었고, 여성의 몸으로 직장생활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홀로 설 수 있는 일을 찾다보니 세무사가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1년여 주경야독 시험 준비를 야무지게 했다. 1986년 초 제23회 세무사시험에 도전,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그해 86년10월에 ‘세무사 김옥연 사무소’를 개업했다.

◆ 세무사로서의 삶과 철학

첫 사무실은 종로3가 와룡동, 종로세무서 앞이었다. 개업 첫날 간판을 걸고 아무런 생각 없이 앉아 있는데 한 분이 들어오셨다. 나의 첫 고객이었다. 감격스런 한 장면이 펼쳐진 것이다. 그야말로 간판만 보고 들어오신 거다. 간판의 효과라는 게 이런 걸까?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도 간판만 있으면 그가 세무사인지, 의사인지를 알고 찾아오니 신기하다는 생각도 했다.

첫 고객과 면담을 마치고 나는 다짐했다. ‘김옥연 세무사 사무소’ 간판의 이름값을 성실히 해 내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세법을 잘 모르는 사람, 세무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적절한 조언을 해주고 그가 골치 아픈 세금이란 틀에서 해방되도록 곁에 있어 주는 세무사가 되어야 하겠다’는 나와의 약속이기도 했다.

세무사는 국가 건전재정확보에 기여하는 면도 있지만, 고객이 세금으로부터의 두려움과 억울함과 불공정함을 정성껏 설득하고 해명하여 마음 편히 이행하도록 하는 절차일 수도 있다. 그래서 늘 납세자의 마음을 위로하는 ‘택스 테라피’ 같은 세무사가 되기로 작심했다.
 

◆ 김옥연 세무사사무실 현주소?

-와룡동에서 개업을 한 것은, 세무사가 되기 전에 다니던 회사와 가깝기 때문이었다. 사무실을 구하겠다고 종로3가역 근처를 두리번거릴 때 우리 23기 세무사 네 명을 만나기도 했다. 보증금과 월세 합해서 500만원 정도였는데, 작고 오래된 건물이라 전기 사정이 나빠서 결국은 6년만에 서초세무서가 있는 남부터미널역 근처로 옮겼다. 그 곳에서 무려 27년이나 한 자리에서 일하다 최근에 서초역 주변 교통이 편리한 지금의 이 자리에 다시 터를 잡았다. 이곳이 33년 경력 세무사의 값진 이름을 마무리 짓는 곳이 될 것이다.

서초동 법조타운이 생길 무렵 이곳은 가장 좋은 건물이었으나 이제 좋은 건물이 많이 지어져 낡은 건물로 보인다. 그러나 나의 업무에 가장 적합하게 꼼꼼히 인테리어를 했다. 처음으로 가져 본 나의 사무실. 왜 이제 사 준비했는지 알 수 없다. 무려 33년 만에. 매번 타인의 일에는 감 놔라, 배 놔라 조언하면서 정작 자신의 일에는 신경을 접고 있었다.

좋은 장소라고 정의하기가 쉽지만 모두가 좋아하는 곳에 나의 자리를 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기왕 공간을 잡았으니 이곳이 최상이라 생각하고 가꾸어 가고 있다. 서초역과 교대역 두 곳을 이용할 수 있고, 더구나 한국세무사회관은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이다. 세무서와는 거리가 있지만 누구나 이용하기 쉬운 곳이라 생각한다. 여기에 자리 잡은 것을 아주 만족하고 있다.
 

◆ 한국여성세무사회장 2년 재임기간 기억에 남는 일, 보람?

- 그동안 우리 임원들의 많은 노력으로 제32차 가을전국대회는 창립 이래 가장 많은 회원이 참석했다. 서울이기도 하고, 유명한 가수가 출연하기도 했지만 알찬 프로그램 아래서는 이렇게도 많이 모일 수 있다는 걸 알았고, 더욱 좋은 진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도 제33차 가을 전국대회인데, 멀리 제주도에서도 행사를 진행해 보았는데, 역시 회원들의 참여가 좋았다. 회장으로서 이런 부분은 매우 기쁜 일이다.

그리고 회원들에게 유익했던 특강도 기억에 남는다. 무엇보다 ‘여성세무사들의 세금이야기’를 출판 한 것은 훌륭한 일이다. 회원 70여명이 한권의 책자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혼자서 하는 것 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다. 3월 결산 중에도 편집위원회를 여러 차례 열고 문장을 다듬어서 4월 특강 시 출판기념회를 열었고 전국 도서관에 배송하고 세무서마다 도서를 비치한 것은 정말 기억에 남는다. 여성세무사가 공동으로 만든 도서 ‘여성세무사들의 세금이야기’는 한국여성세무사회가 갖는 재산이라 길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 회원 1300여명에게 문자를 보내고 핸드폰에서 특강, 총회나 가을 전국대회 참석 여부를 신청할 수 있도록 한 것은 획기적이며, 총무, 홍보, 재무 등 여성세무사회에 7개 운영 부서를 두게 되어 업무의 적절한 분담과 효율적인 관리를 추가한 것도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두가 회원들의 공동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마침표를 뿌듯하게 찍게 해준 임원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특히, 일본여성세리사연맹 6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한 것은 매우 뜻 깊었다. 창립 60주년을 단상에서 맞을 수 있다면, 한 가지 업무를 60년간 지속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정말 보고 배울 점이 많았다. 앞으로 지속적인 관계를 갖기 바란다.

◆ 여성세무시회장을 두 번 씩이나 했다. 규정위반 아닌가?

-규정위반을 했다면 어떻게 이 자리에 있겠는가? 우리 회는 2회에 한해 회장을 역임하도록 되어 있다. 난 12대와 18대를 역임했는데, 나의 첫 12대 회장은 등록번호가 빠른 탓(?)이라 할 수 있고, 10년이 지난 18대 회장은 단독추대에 의해 선출된 것이다. 이제 19대 회장선출은 3명이 회장후보로 등록하였고, 이처럼 여성회장에 3명이 경선한 경우는 처음 있는 일이다.

그만큼 여성세무사회의 위상이 높아지고 회원의 봉사정신도 함양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17대 전임회장께서는 저에게 “이제 여성세무사회가 반석에 올랐으니 규정을 다듬고 내실을 기해 주세요”라고 당부하셨다. 저도 공감했었다. 그래서 우리 18대 임원은 어느 때보다 많은 회의를 하였고 더 많은 회원의 동참을 목표로 하였다.

우리에게 가장 알맞은 규정이 무엇일까? 명분도 있고 현실성 있는 적절한 규정을 준비해 보자. 우선 회원께 보내는 안내문의 업무량을 줄여보자. 우리가 사무국이나 직원 없이 업무를 하다 보니 무엇보다 간략하고 단순해야 했다. 팩스 보내기와 문자 발송 등은 시간이 많이 드는 작업이다. 젊은 세무사들의 제안으로 이런 서류 발송이 훨씬 간단해졌고 반응도 바로 받을 수 있는 방향으로 개선되었다. 그리고 재무업무, 사업업무 등 각 부서마다 고유 업무를 확정하고, 각자 책임지고 그 업무를 실천하는 방향으로 전개했다. 규정들이 보완되고 수정되었다.

회원 명단은 2배로 늘었고, 이제 우리도 1300명에게 안내문 발송하는 대 단체가 된 것이다. 앞으로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는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고 본다. 그러나 만족은 없다. 지회 활성화가 좀 더 필요하고 더 많은 회원들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는 여기서 머무를 게 아니라 한국세무사회에 진출하여 회원 모두의 위상제고와 복리증진을 위해 일해야 하고 더 나아가 국가 발전에도 기여해야 한다는 의지로 결집됐다. 저도 경선에서 선출되는 제19대 회장에게 당부할 게 있다. “다져진 기반아래 100년 대계의 강건한 여성세무사회를 만들라”고.

※ 여성세무사회는 회칙에 ‘선출직 임원의 임기는 2년으로 하고 1회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로 되어 있다. 회장을 맡은 지 10년 만에 다시 추대를 받아 재임한다는 것은 회원의 신뢰가 있었던 특별한 사람으로 평가 받았다고 해도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어쨌거나 영광스러운 추대임에는 틀림없다.
 

◆ 자식농사?

-자식농사라면 두 아들이 있다. 둘 다 공부를 잘해 서울대학교를 졸업했다. 요즘은 아들만 있으면 ‘목메달’이라고 하던데 난 아들이 좋다. 나처럼 일상이 바쁜 사람은 딸들을 어여삐 잘 키울 수가 없다. 그 섬세한 마음을 곱게 다 읽어주어야 하는데... 내버려 두어도 잘 자라는 아들이 좋다. 다행스럽게도 두 아들은 엄마의 손이 필요 없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란 것이다. 대학입학도, 취업도, 결혼도 모두 아들이 결정한다. 엄마에게 물어 보는 게 없다. 사실 아들의 잘못은 아니다. 아들이 20대가 될 때 쯤, 나도 나이 들면서 여유가 생겼다. “요즘 무엇 하냐”고 물어보았더니, “평소에 관심도 없으면서 왜 그러세요?”라고 답한다. 내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큰아들은 어릴 때는 게이머가 되고 싶어 했다. 고등학교 때는 스타크래프트 게임에서 1등을 해서 상금도 받아 왔다. 대학에서 생명공학을 공부하다가 경제학으로 전공을 변경했다. 분야가 완전 다르니 그 공부가 얼마나 힘 들었을까? 근데 잘 헤쳐 나갔고 지금은 본인이 원하는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작은 아들도 이제는 치과의사가 되었다. 지금은 혜화동 서울대학병원에서 인턴 과정 중이고, 레지던트 등 앞으로 3년은 더 공부해야 한다고 한다.

세무업계의 요즘 추세가 ‘자녀들 세무사 만들기’라고 하던데, 나의 두 아들은 분야가 너무 다르고 자기들 하고 싶은 게 따로 있어서 이 일을 이어 받기는 다 틀렸고, 혹시나 우리 며느리가 이 일을 해 주려나? 하면서 내심 고대하고 있기는 하다.

◆ 지식농사

-시간에 쫓긴다는 핑계로 지식농사는 제대로 짓지 못했다. 살면서 바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더 급한 일에 충실하다보니 거두어들인 게 없다. 단지 기한이 있는 학위 논문만 있을 뿐이다. 석사과정에서는 중소기업에 대한 자료를 정리했고, 박사과정에서는 ‘재정복지가 소득분배에 미치는 효과 분석(2007.08)’을 연구했다. 당시에는 인적 공제 및 특별공제 등이 모두 소득공제였는데 그 이후 많은 부분이 세액공제로 변경 되었다.

작은 도서로는 서울역이나 지하철 등에서 자판기에서 한 권씩 빼내어 볼 수 있는 소책자 에버그린문고 시리즈 ‘21세기 세테크 10계명’을 출간했고, 남편의 유고집 ‘다시 내리는 눈’을 출간한 적이 있다. 어린 시절에는 문학 소녀였고 그래서 문인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란 소소한 도서를 출간해 보는 것이다. 너무 전문적이고 어려운 책들은 나도 소화하기 어렵다.

◆ 꼭 이루고 싶은 것. 꼭 남기고 싶은 것(버킷리스트)

-꼭 이루고 싶은 게 없다. 이제는 인생을 잘 마무리할 단계이다. 여기서 무얼 더 벌린다는 것은 욕심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껏 해 왔던 일들을 잘 엮어 다음 세대에게 잘 전달하는 게 나의 목표이다. 한국여성세무사회도 마찬가지고,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동안 얻은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더 이상 다른 것을 얻으려고 시도하고 싶지는 않다.

남기고 싶은 게 있다면 좋은 습관을 유지하는 것이다. 좋은 습관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다. 작고 사소해보일지라도 매일 실천하여 끝까지 유지해야 한다. 또한 다른 사람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 좋은 관계는 나를 조금 더 양보하면 된다. 상대방의 이익을 조금만 더 배려한다면 될 것이다. 이 부분은 정말 중요하다. 몸으로 체험하고 머리로 배운 바를 좀 남기고 싶다. 요즘 시대에 안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관계는 하나의 정답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응용하여 본인의 것으로 만들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잘 살아간다는 것은 잘 적응한다는 것이다. 적응하는 자만이 이 시대의 승리자이다. 교육의 최종 목표도 잘 적응하는 사람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나의 부모님도 나를 변화는 사회에 잘 적응하는 사람으로 만드셨다. 우리는 어떤 환경을 만나도 잘 적응하면 살아갈 수 있다.
 

◆ 존경하는 인물-이유?

-존경하는 인물은 많지만, 난 나의 어머니를 가장 존경한다. 6남매를 손실 없이 키우셨고, 우리는 어머니가 하셨던 대로 근검, 성실, 긍정적으로 살아간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이 어디 있겠나? 학교를 다니신 적은 없지만 어려운 가계를 꾸리고 지혜롭게 사셨다. 우리 6남매 모두 열심히 이 세상을 잘 살고 있다. 건강하게 태어나게 하셨고, 긍정적인 사고를 갖게 하셨으니 이 세상의 누구보다 존경한다.

◆ 김옥연 세무사 그는 누구?

- 저의 프로필은 세무사이다. 우여곡절의 지난 과정은 이제 별로 의미가 없다. 이 업무 하나를 제대로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성공이다. 근데, 여전히 세무사업은 어렵다. 바뀌는 규정을 잘 따라 가기가 힘이 든다. 뒤처지지 않으려고 늘 공부하면서 머리 싸매고 있다. 이것이 우리 삶의 일부분이 되어서 늙을 겨를도 없는 것 같다.

나는 세무사가 되기 전에는 현대그룹에서 근무를 했고 그 후에는 만 33년을 이 업무를 하고 있다. 그 동안 한 번도 지겨운 적이 없고 여전히 세무사는 매력 있는 직업이라고 선전하고 다닌다. 자기가 시간을 마음껏 조정하고 관리하면서 일 할 수 있는 분야가 흔하겠는가? 난 나의 직업에 매우 만족한다. 나는 그렇게 세무사로 나의 삶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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