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호영 세무사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Night train to Lisbon' 대사는 "인생의 최고 감독은 우연이다"라고 갈파하고 있다. 요즘은 필자도 나이가 연세이니 만큼 가끔 인생의 뒤안길을 돌아보는 경우가 빈번해지는 것 같다. 과연 '진정한 나'는 '누구이고 무엇이었느냐'에 대한 질문에 대한 자신의 답을 나름대로 찾아보기 위해서인 것 같다. 그러나 솔직히 그 때마다 답은 명쾌하지가 않다.

반추하고 복귀할 때마다 느끼는 소회는 '그저 그럭저럭 여기까지 오게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스스로를 생각하고 평가할 때 '비교적 소신이 있는 편이었고 정체성을 견지하면서 나름대로 자기 주도의 삶을 지향해 왔다'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생각의 끝머리에서는 나 자신의 의도보다는 '의도와 크고 작은 우연적 상황 등이 범벅 되어 그냥 저냥 현 시점까지 흘러 왔구나'라는 귀결에 봉착 하곤한다. 인생여정을 놓고 볼 때 의도 보다는 오히려 우연이 더 큰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도 생각된다.

춘분이 막 지난 오늘, 날씨는 포근한데 미세 먼지가 유난히 많다는 생각을 했다. 코로나도 여전히 극성이다. 영화를 한편 감상할까 아니면 허기(虛嗜)와 허정(虛靜)의 심미적 감성을 가지고 하늘과 바람 산과 나무, 시냇물 소리와 새소리를 따라 외곽으로 나가 볼까하는 두 갈래 마음으로 혼란스러웠다. 언제나 자아는 욕구의 충돌 속에 조율과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오늘도 그렇다.

마음의 갈피를 못 잡을 때는 상호 파장이 유사하고 콜라보가 잘 되는 친구의 도움이 유익한 경우가 많다. 절친 중 한명인 그는 늘 내 입장을 고려하며 이성적, 감성적 사고에 기반을 두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에도 언제나 공감을 일으키는 판단을 해주니 ‘참 좋은 친구 일수밖에 없다’라는 생각을 해본다.

오후 4시 30분, 토요일인 오늘도 친구는 사무실에서 쌓인 일을 하고 있단다. 정말 바쁘게 열심히 사는 친구다. 그러나 친구는 시간이 가능 하단다. 늘 멋진 친구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또한 고마운 친구다. 언제나 시간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삶의 여정에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하루 중 이 시간 이후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영화 한편 감상하고 저녁 식사하면 적당한 시간이다. 요즘 코로나19 사태와 관련 지구촌 전체가 신음하고 있으며 사회적 거리 두기 캠페인을 전 지구적으로 전개하는 상황이다. 따라서 밀폐된 공간에서의 영화 감상은 좀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수도권에서 30여분 이면 도착 가능하고 경관도 비교적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춘천 방향의 서정리 근처에서 가볍게 바람을 쐬고 담소하며 저녁 식사나 하고 오겠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고 출발했다.
 

▲ [필자 제공]

서정리 도착!

달리는 차창에 '아침 고요 수목원'이라는 이정표가 시선에 들어왔다. 마음이 움직였다. 필자 에게는 새로운 곳이다. 이미 익숙해진 것과 곳에서 자유스러워야 감동과 감격을 조우할 수 있다. 서정리에서 20여 km를 더 질주해야 당도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내친 김에 무심코 향했다.

목적지 인근에 도착하니 은은한 빛이 눈에 펼쳐졌다. '별빛 축제'라는 축제가 진행되는 중이란다. 우연이었다. 그리고 볼만한 광경이었다. 나름대로 삼라만상을 축소해서 배치해 놓은 별천지 같다는 착각에 빠지게 했다. 공을 많이 들여 조성한 것 같았다.

친구는 '우연히 눈이 호강한다'라며 즐거워한다. 나 또한 같았다. 눈 호강뿐만 아니라 오감, 육감 등 모든 신체 기관들이 호사하는 것 같다. 우연한 선물이었다. 이런 산골에 이런 광경과 조우할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낯선 것에 대한 기쁨이다. 익숙한 곳은 편안하기는 해도 큰 기쁨은 주지 못한다.

입구에 들어서니 심하게 휜 소나무 한 구루와 서로 몸통을 휘감으며 뒤엉켜 서있는 천년향이 눈에 들어온다. 소나무는 외롭고 고독하게, 천년향은 화려해 보이나 함께 뒤엉켜 있다. 뒤엉킴이 서로에게 도움이 될지 불편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한그루의 소나무는 서너번을 휘었다. 밑둥에서 또 중간에 그리고 가지 앞에서 휜채로 서있다. 비바람에 크게 서너 번은 당한 것 같다, 의사도 없으니 묵묵히 자가 치료를 받고 서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잎을 피우는 모습이 장군보다도 더 장군같이 의연해 보였다.

▲ [필자 제공]

또 소나무 인근에 화려하게 서있는 천년향이 눈에 들어온다. 멀리서는 화려해 보였으나 가까이 가보니 죽은 줄기와 산 줄기가 뒤엉켜 있음을 알았다. 산 자와 죽은 자의 동거, 그렇게 천년향은 천년을 산단다. 죽은 자가 산 자를 떠받쳐 주는 형상이다.

한 겨울의 삭풍과 북풍 한설, 폭풍과 비바람을 이겨낸 경륜과 내공, 의연한 아우라가 두 나무에서 순간 우러나옴을 느꼈다. 우리 인간에게도 동일한 경우가 아닐까 생각 되었다. 고딩 입학시험 한번쯤 떨어지고 재수라도 한 친구가 언행에 중심이 더 잡혀 보이고 중량감이 있어 보였으니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상처는 인간에게 성숙을 선물한다.

중년의 나이에 들다보니 굽어서 있는 소나무 한 그루와 엉켜 자라는 천년향 한 그루에서도 상처를 들여다볼 줄 아는 성숙이 싹튼 듯 하다. 그러나 마디 마디 세월속에서 개인적으로 보면 벅찬 감격과 감동의 순간, 환희와 행복의 순간 등 화양연화의 순간들도 많았던 여정이었다. 누구나 그러리라.

오랜만에 복잡한 속계를 떠나 수목원의 이곳 저곳을 한가히 거니 노니 소요유(逍遼遊)의 순간이 아닐까 착각을 일으키는 듯했다. 이른바 무위자연(無爲自然)적 도의 경지인 '생사가 없고 시비도 없으며 지식도 없고 마음도 없으며 참으로 행복한 곳' 또는 그런 마음의 상태, 그야말로 무념무상(無念無常)의 방하(放下)의 상태다.

어느 누군가가 장자에게 천하를 다스리는 법을 묻자 "나는 구만리를 순식간에 날수 있는 대붕을 타고 창공으로 치솟아 세계 밖으로 나가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노닐며 광막한 황야, 끝없이 넓은 들판에서 살려고 한다. 그런데 너는 천하를 다스리는 소소한 일 따위로 나의 마음을 괴롭히는가?" 라며 호통을 쳤다지 않던가.

요즘같이 시끄러운 정치 만개의 시대에 장자가 태어났다면 뭐라고 했을까 궁금해진다. 이 곳에서 거대 담론이나 그 외 어떤 이론과 논리가 수반된 이성적 사고는 불필요할 듯 하다. 심미적이고 유미적 감성어 외 담론이나 여타 애기는 정말 사족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밤 하늘의 빛 축제로 아이들이나 좋아할 듯 하지만 그러나 아직 동심이 자아 한 켠에 살아 있음을 느꼈다. 빛속에 묻혀 있다 보니 속세를 떠난 계에 있는 듯 했다. 비약이라는 생각이 드나 무릉도원이나 별천지, 이상향 같은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이라고 해야 할까!

멋지고 아름다운 테마 축제인 것 같았다. 아마도 이런 수목원을 조성할 때 당사자는 그런 세계를 꿈꿨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25년 세월 동안 청정한 곳을 조성한 것이라니 감사한 마음마져 든다.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의 원작자 카잔타키스가 그의 묘비명에 ‘나는 두려움이 없다. 기대하는 것도 없다. 나는 완전한 자유다’라고 남겼듯 누구나 자유를 만끽하고 싶을 것이다. 자유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 권리이나 누리기 어려운 대상이기 때문이다. 오늘 귀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친구도 연속으로 아름답다고 탄성이다. 전기불 축제지만 분명 나도 즐거웠다. 이런 것이 소확행을 실천해 보는 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소확행 이상의 어떤 행복감 일수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사실 계획을 세워 의도적으로 이곳에 오지는 않았을 것같다. 우연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레고리우스가 '우연한 설렘'에 이끌려 홀연히 리스본행을 떠났듯 오늘도 우연이었다.

"나쁜 방향으로 가는 군중과 함께 하기보다는 차라리 혼자 가는 것이 더 좋다, It's better to walk alone than to go with a crowd going in the wrong direction"라는 말이 있듯이 뜻이 맞고 조화와 조율이 잘 되는 친구와 함께라면 금상청화 일 것이다. 오늘 따라 이 귀절이 크게 다가온다.

누구나 군중 속에 휘말려 갈때 오히려 고독하고 외로울 때가 많았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홀로 갈수 있는 용기, 자기주도의 삶을 추구하면서도 거기에 진정으로 소통이 되는 한두 명의 친구가 있다면 ‘만사 오케이’라는 생각이다. 오늘도 만사 오케이다. 무심히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이 아닌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만한 카이로스적 시간이었다.

고독해 보이나 의연하고 당당해 보이는 소나무 한 그루와 화려해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서 보면 죽은 자와 산자가 엉켜 사는 것을 보며 삶에 대한 한 토막의 의미라도 깨달을 수 있는 날이었다. 이제 좀 조금은 철이 들어가는가 보다.

오늘은 축령산 기슭의 이곳이 ‘별천지, 무하유 지향(無何有之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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